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22주 우리가 아는 만큼 그만큼 본다
■ 읽기 | Lectio
구약 | 학 1:15b-2:9
15 그 때는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이십사일이었더라 1 일곱째 달 곧 그 달 이십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라 3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4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5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6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9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응송 | 시 145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서신 | 살후 2:1-5, 13-17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5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13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14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5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17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복음 | 눅 20:27-38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8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9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31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 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3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 묵상 | meditatio
① 학 2:5을 묵상하십시오.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기억하며 새 성전의 초라함에 낙담한 백성들에게 학개 선지자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② 눅 20:38을 묵상하십시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 떤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③ 살후 2:13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택하신 목적 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우리가 아는 만큼, 그만큼 본다.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의 당수이자 파시즘의 창시자인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이탈리아의 히틀러'로 불리기도 합니다. 1922년 9월 그는 혁명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그 해 10월 28일 5만 명의 파시스트 민병대인 '검은 셔츠단'을 이끌고 무혈로 이탈리아 정권을 장악합니다. 과거 로마제국의 화려한 영광을 부활시키겠다며, 선동정치를 시작한 그는, 가장 먼저 노동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위성도시를 로마 인근에 건설합니다. 그의 건축물의 특징은 파시즘을 상징할 수 있도록 웅장하고 위압적이었는데,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가인 마르첼로 피아첸티니와 함께 바티칸 광장에서 콜로세움에 이르는 거대한 도로건설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콜로세움 인근이 모두 고대 로마문화의 유적지였기 때문에 많은 고고학자들이 반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솔리니는 그곳을 흙으로 메우고 돌을 깔았습니다. 문제는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발생했습니다. 길을 내기 위해 1927년 '토레 아르젠티나(Torre Argentina)'에 있는 건물을 부수기 시작했는데, 그 아래 땅에서 뭔가가 발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은 로마의 역사에 있어서 아주 의미심장한 장소로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가 BC 44년 자신이 양자로 삼았던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한 장소였습니다. 그가 브루투스에게 죽기 전에 마지막 남긴 말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는 세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서 소개하면서 유명해졌고, 그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남긴 말,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 역시 희곡이나 많은 예술작품 등에서 소개된 바 있습니다. 바로 그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장소가 발견되자 이탈리아의 여론은 술렁대기 시작했고, 무솔리니의 도로건설은 무산되었습니다. 한국인 최초, 그리고 동아시아 최초로 바티칸 대법원(Rota Romana) 변호사를 지내고, 서강대학교에서 라틴어를 강의한 한동일 교수가 '라틴어 수업'이란 책에서 이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과 관련해서도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그가 카이사르가 암살된 장소를 알게 된 것은 법의학 수업 때였다고 합니다. 그때 그는 카이사르가 브루투스 외의 여러 사람의 칼에 찔려서 자상으로 사망하려면 몇 사람이 동시에 어떤 자세로 찔러야 가능한가에 대한 수업을 듣고 있었습니다. 교수님이 설명을 위해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장소를 슬라이드로 보여주는데, 놀랍게도 그 장소는 자기가 매일 무심히 지나다니는 장소였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솔리니도 한동일 교수도 한 사람은 몰라서 그 유적에 도로를 내려고 했고, 한 사람은 몰라서 그 명소를 무심코 지나친 겁니다. 그때 그가 절감한 말이 이 말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만큼, 그만큼 본다.(Tantum videmus quantum scimus)" 그리고 그는 자기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중요한 건 아는 사람은 그만큼 잘 보겠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성찰하는 사람은 알고, 보는 것을 넘어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이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신앙적 각성을 갖게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 시선과 마음을 빼앗겨서 보이지 않는 진실 혹은 사실을 보지 못할 때, 우리의 신앙은 하염없이 진리의 표면만을 맴돌게 되는데, 오늘 구약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그런 모습들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눈에 보이는 '보잘 것 없음(ניא, 아인)'에 얽매여서 보이지 않는 '여호와(יהוה, 야훼)'를 망각한 것입니다.
일곱째 달 곧 그 달 이십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 학 2:1
BC 538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페르시아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유다 백성들의 1차 귀환이 이루어졌는데,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재건 공사를 시작한지 거의 한 달이 되어 가던 7월21일이었습니다. 이 날은 추수를 마치고 지내는 절기인 장막절의 마지막 날이었는데, 바로 이 날 하나님의 말씀이 학개에게 임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 날이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날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날 학개에게 말씀하심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들을 수 있도록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2절에 보면 그들 중에서도 몇 사람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중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은 다윗 왕조에 속한 여호야긴의 자손이었는데, 그는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후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도와 BC 536년 성전의 정초식을 거행한 인물입니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에스라 3:2, 8에 언급된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동일인물입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대제사장 아론의 직계손이기도 한데, 그는 귀환한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였고, 스룹바벨과 함께 제2 성전을 완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은 백성'은 1:12, 14절에서 언급된 '남은 바 모든 백성'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성전재건을 촉구하는 학개의 선포를 들은 후에 하나님의 전 건축을 소홀히 한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향해 돌아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렇게 혈통이 좋고 믿음도 신실한 사람들에게 학개를 통해 말씀을 전하는 것일까요? 그들이 실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의기소침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성전을 완공하고 보니까 옛 솔로몬 성전에 비해 외형적(外形的)으로 너무 초라했습니다. 에스라 3:12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과거 솔로몬 성전의 화려함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새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면서 이미 그 초라함에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학개 선지자는 일부러 시각적 표현이 담긴 질문을 그들에게 던집니다.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 학 2:3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걸까요? 우리 삶이 시각적인 것에 많은 부분 의존되는데, 바로 그런 시각적인 것들로 인해 우리의 신앙이 위기를 맞을 수 있음을 짚어주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이라든지,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라든지, '남은 자들' 그들은 모두 당대의 지도자들이었고, 신앙적으로 남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눈에 보이는 보잘 것 없음'으로 인해 그만 낙담에 빠져버린 모습을 보면서, 소위 '보이는 것'에 일희일비(一喜一悲) 해 온 우리의 지나온 영적 관행이 오버랩 되기도 합니다. 그런 이들을 향해 학개 선지자가 전한 말씀에 오늘 우리도 귀를 기울이기를 원합니다.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 학 2:4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세심한 마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 낙담하고 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스룹바벨아, 여호수아야, 이 땅 모든 백성아" 하면서 의기소침한 너희 마음을 굳세게 하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굳세게 해야 할 이유는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보잘 것 없는 우리 현실들로 인해 얼마나 많이 의기소침하고 낙심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정작 보아야 할 것은 시간을 초월하여 늘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학개 선지자는 계속 말씀합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 학 2:5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이 말씀은 4절에서 세 번이나 언급했던 "굳세게 할지어다"와 같은 명령입니다. 백성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언약하신 말씀' 때문이고, 하나는 '하나님의 영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먼저 학개 선지자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결정적 관계를 맺었던 출애굽 때 맺어진 언약을 상기시켜 줍니다. 아마 학개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조상들이 출애굽 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과 맺어주신 언약의 역사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 언약에서 핵심적인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출 19:5-6 ; 34:10-11, 신 12:5, 11, 21 등에서 여러 표현으로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라시며 과거에 그들의 조상들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지금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 '머물러 있나니' 이 말씀은 히브리어로 '오메데트(תדמע)'인데, 과거로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함께 있을 것을 약속할 때 쓰는 분사형 단어입니다. 히브리어에 있어서 분사형은 '중단 없는 계속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머물러 있나니' 이 말씀은 '나의 영' 즉 '성령'이 과거에 너희 조상들에게 그랬듯이, '끊임없이, 지속적으로'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과거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하나님께서 주신 이 약속이 지금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이란 그런 것입니다. 모두가 '눈에 보이는 현상'에 낙담하고 있을 때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응시하는 것입니다. 학개 선지자는 가뭄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성전의 초라한 외형을 보고 또 다시 낙심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현재적 도우심을 '약속으로' 확신시켜 줍니다.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 학 2:6, 7
"조금 있으면"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잠시 후에 다시 한 번"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종말론적 언어로 '짧은 시간'을 가리키는데, '잠시 후에 다시 한 번' 노아 홍수나 출애굽 같은 어떤 사건이 반복될 것임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로 이스라엘에는 그 약속과 연결 지을 만한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7절 하반절에서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하신 말씀은 이방나라들의 보배와 은과 금들이 예루살렘으로 이동되어 이전의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보다 더 영광스러울 것임을 시사하는 것인데, 이 말씀 역시 가까운 미래에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 약속들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요? 우리는 다음 말씀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 학 2:9
학개 선지자가 일관되게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봐야 합니다. 학개 선지자는 지금 유다 백성들이 그들이 과거에 눈으로 보았던 솔로몬의 영광에 붙잡혀 미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신앙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를 믿음의 시선으로 응시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눈에 보이는 현상'에 낙담하고 있을 때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응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반드시 그 뜻을 이루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 성취를 응시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란 그런 거라고 말씀합니다. 히 11:1-3을 공동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옛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곧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압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육신의 눈'으로 보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눈'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보이지 않던 미래'가 '보이는 현재'로 확증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아벨이고, 노아고, 에녹이고, 아브라함을 포함한 족장들과 모세였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 하신 약속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와 깊은 연관성을 갖습니다. 7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보배'를 그리스도로 해석하든 아니면 성전을 다시 세우는 재료로 해석하든 그것은 기독론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 약속하고 있는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하신 말씀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하신 말씀 역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 질 부활의 미래와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의미심장합니다. 사독의 후예로서 스스로를 의롭게 여겨 '사두개인'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누가는 그들을 향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눅 20:27)이라고 냉소적으로 표현합니다. 실제 당시에 그들은 귀족 엘리트 집단으로서 제사장 등 정치적 요직을 거의 독점하고 있으면서, 오직 현세에서 누리는 기득권에만 관심을 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인 부활이나 천사의 존재는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 눅 20:28-33
자식이 없이 죽은 형제의 상속자를 세워주기 위해, 죽은 이의 아내를 취해 상속자를 낳아주는 제도를 '시형제혼인법'이라고 부르는데, 당시 사두개인들은 이 '시형제혼인법'을 무기로 자신들의 정적이며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에서 번번이 우위를 점해왔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기를 지금 예수님께 사용합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그 법을 주신 취지는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들은 본래의 법정신을 왜곡해서 부활의 모순을 유도해 예수님마저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이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랬습니다.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 눅 20:34-36
주님 말씀은 명료합니다. 부활은 이 세상의 질서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며, '이 세상 질서'와 '부활 이후의 세상 질서'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보이는 세상'에 집착해 살아가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간과한 채 소멸되어가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보이지 않는 부활의 세계'를 믿음으로 산 자로 부활을 맞이함으로서 '부활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 눅 20:38
사람이 눈으로 보는 세상만을 바라보고 살아간다면 자기 자신마저 참되고 본 되게 바라볼 수 없습니다. 이 엄연한 사실을 외면하거나 무시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버리는지 모릅니다. 그러한 까닭에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살후 2:3)고 엄히 경계하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택하셔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살후 2:13)에 감사하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당부합니다.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 살후 2:15
"우리가 아는 만큼, 그만큼 본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말씀을 통해 그리고 성령의 깨우치심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부활의 세계'를 알고 '아는 만큼 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오늘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너희에게 머물러 있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보이지 않는 진리'에 온전히 마음 두지 못하고 '보이는 현상'에 시선과 마음을 빼앗긴 까닭에 지금껏 의미 없는 일상이 반복되어 왔다면 오늘부터는 기록된 말씀을 묵상하며 믿음의 눈을 결연하게 뜨고 '보이지 않는 진리'에 굳게 선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보이는 세계에 집착해 보이지 않는 진리를 놓치고 있지 않은가?
② 보이지 않는 진리의 세계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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