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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0주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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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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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7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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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 욜 2:23-32
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 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24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2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 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26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27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응송 | 시 65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가 의지할 주께서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서신 | 딤후 4:6-8, 16-18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 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복음 | 눅 18:9-14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 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눅 18:11-13을 묵상하십시오. 자신을 의롭다고 믿은 사람과, 자신을 죄인이라고 본 사람의 기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③ 딤후 4:6-8을 묵상하십시오. 떠날 시각이 가까워진 지금, 신앙의 도리를 다한 후(딤후 4:7), 바울의 시선은 누구에게 머물러 있습니까?
④ 욜 2:23을 묵상하십시오. 회개한 사람들이 기뻐해야 할 진정한 이유 는 어디에 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안토니 블룸(Anthony Bloom)은 '기도의 체험'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의 근본이며 원천이신 하나님을 부르면서 우리 마음 가장 깊은 속을 뚫고 지나갈 결심을 하고 실천한다면, 우리의 기도가 어디로 가야하고 어디에 목표를 두고 있는지 잘 알게 될 것이다. 뒤로도 위로도 아니고 깊이 더욱 깊이 들어가서 길을 막는 저항과 감추려는 거짓을 뚫어버리고 가장 깊은 핵심까지 들어가야 한다." 그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가장 깊은 핵심이신 하나님 현존에까지 도달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마음 가장 깊은 속을 뚫고, 더욱 깊이 뚫어 내 안의 거짓과 대면함으로서 겸손해지고 가난해지고, 진실해진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엡 3:16에서 이 '마음'을 '속사람'이라고 표현하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라고 당부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엡 3:17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이 '마음'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고, 자기 마음을 깊이 더 깊이 들여다봤던 것일까요? 마음은 인간 본성의 중심으로서 육(肉), 혼(魂), 영(靈)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인간의 모든 정신적 기관이 작용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게 하면 우리 마음은 천국이 되지만, 우리 마음을 본능이 이끄는 대로 방치해버리면 악마의 유혹이 판치는 지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러시아의 영성가인 테오판(Theophane the Recluse)은 마음에 특히 영(靈)이 연결되어 있고, 바로 이 마음에 자의식, 양심 및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깃들여있기 때문에 이 '마음을 들여다보며 기도하는 것'이 그 어떤 기도보다도 우선되고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 우리는 두 사람의 각각 다른 기도의 태도를 보게 되는데, 한 사람은 주변의 사람들을 의식하며 기도를 하고 한 사람은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며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매우 극명합니다.
요한 클리마쿠스(John Climacus)는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교만이라는 질병을 앓는 사람에게는 안타깝게도 구원의 희망이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속이 썩은 석류와도 같고, 교만한 사람에게는 마귀가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자신을 대적하는 원수 마귀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참 자아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의로우며, 지혜롭다고 생각하며, 죽은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가난한지를 발견합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의 기도가 바로 이 교만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나 자신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그들과 다른 한 사람을 보여주십니다. 그는 그들이 멸시하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자기의 죄를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주님은 이 세리의 기도에서 그의 겸손함을 발굴해내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던 바리새인이 아닌 이 세리가 더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려주십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은 이것입니다. 그 삶이 타인보다 의로워 회개할 것이 없었던 바리새인의 기도가 훗날 신앙의 후손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지지 못하고, 그 삶이 타인보다 악해서 회개할 것이 많았던 세리의 기도가 훗날 신앙의 후손들에게 올바른 기도의 표본으로 물려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뭐라고 기도했습니까?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지난 2천 년 간의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이 세리의 기도를 자신들이 해야 할 기도의 표준으로 삼고, 자신의 심장을 깊이 들여다보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기 내면의 거짓들과 아프게 대면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오직 그 한 마디 언어로만 기도해 왔습니다. 살전 5:17에 보면 사도 바울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당부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했던 이 세리의 기도를 '마땅히 쉬지 말고 해야 할 기도'로서 우리에게 전승시켜주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것입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그래서 우리교회도 세리의 기도로부터 시작되고, 신앙의 선조들을 통해 전승된 기도의 모범을 따라 예배 때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이고 우리 찬양대는 '키리에 엘레이손'을 불러주는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502주년 기념주일입니다. 마틴 루터가 핵심적으로 전하려고 했던 주장 가운데 하나가 '솔라 피데'입니다. 솔라 피데는 '오직 믿음'이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루터가 보았을 때, 인간은 아무리 선한행위로 무장해도 온전하게 의로워질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안에는 선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도 있지만 밤이면 피어나는 악한 욕망도 함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은 이미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죄의 지배 아래 놓여 있으며, 그래서 선한 일도 하지만 악한 죄도 짓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것을 분명하게 보았고, 루터 역시 그것을 강조했습니다. 바로 그런 면에서 주님은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하는 바리새인의 기도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구석에서 기도하는 세리의 기도보다 못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 내면에는 바리새인도 있고, 세리도 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의롭게 살기도 하지만, 세리처럼 악하고 이기적이게 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처럼 교만한 기도도 하지만, 가끔씩은 세리처럼 자신을 낮추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 인생이 저물어 가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까지 겸손해야만 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겸손은 하나님을 얻고 교만은 하나님을 잃기 때문입니다. 서신서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의미 깊은 고백을 봅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시선을 타인에게 둔 채 자기 내면을 외면하고 살고 있지 않은가?
② 시선을 자기 마음에 두고 하나님께 진정한 회개로 나아가는가?
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 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24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2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 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26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27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응송 | 시 65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가 의지할 주께서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서신 | 딤후 4:6-8, 16-18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 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복음 | 눅 18:9-14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 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눅 18:11-13을 묵상하십시오. 자신을 의롭다고 믿은 사람과, 자신을 죄인이라고 본 사람의 기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③ 딤후 4:6-8을 묵상하십시오. 떠날 시각이 가까워진 지금, 신앙의 도리를 다한 후(딤후 4:7), 바울의 시선은 누구에게 머물러 있습니까?
④ 욜 2:23을 묵상하십시오. 회개한 사람들이 기뻐해야 할 진정한 이유 는 어디에 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오늘 성서일과를 묵상하면서 문득 우리 기독교 영성생활의 근본이며 영속적인 주제인 기도에 대해 성찰해보았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하며, 기도에서 모든 영적 삶의 에너지를 얻고 있습니다. 기도가 중요한 까닭에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역사 속에서 최상의 기도의 도(道)를 찾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가장 오래되고 전통적인 기도는 '마음의 기도(prayer of the heart)'입니다. 인간 존재의 중심인 '마음(심장, heart)'을 기도의 자리로 보고 발전시켜 온 기도인데, 좀 더 실존적이고 체험적인 하나님 체험을 추구하는 이 '마음의 기도'는 지난 2천년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예수기도(Jesus Prayer)'라는 이름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장 라프랑스(Jean Lafrance)는 이 '마음의 기도'를 '우리의 영혼이라든가 감정은 물론 기도의 방법까지 뛰어넘어 우리의 존재 깊은 곳에서 기도의 근원과 뿌리를 찾는 기도'라고 했는데, 이 기도의 성서적 기원은 예수님께서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하신 마 6:6 말씀입니다.안토니 블룸(Anthony Bloom)은 '기도의 체험'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의 근본이며 원천이신 하나님을 부르면서 우리 마음 가장 깊은 속을 뚫고 지나갈 결심을 하고 실천한다면, 우리의 기도가 어디로 가야하고 어디에 목표를 두고 있는지 잘 알게 될 것이다. 뒤로도 위로도 아니고 깊이 더욱 깊이 들어가서 길을 막는 저항과 감추려는 거짓을 뚫어버리고 가장 깊은 핵심까지 들어가야 한다." 그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가장 깊은 핵심이신 하나님 현존에까지 도달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마음 가장 깊은 속을 뚫고, 더욱 깊이 뚫어 내 안의 거짓과 대면함으로서 겸손해지고 가난해지고, 진실해진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엡 3:16에서 이 '마음'을 '속사람'이라고 표현하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라고 당부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엡 3:17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이 '마음'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고, 자기 마음을 깊이 더 깊이 들여다봤던 것일까요? 마음은 인간 본성의 중심으로서 육(肉), 혼(魂), 영(靈)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인간의 모든 정신적 기관이 작용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게 하면 우리 마음은 천국이 되지만, 우리 마음을 본능이 이끄는 대로 방치해버리면 악마의 유혹이 판치는 지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러시아의 영성가인 테오판(Theophane the Recluse)은 마음에 특히 영(靈)이 연결되어 있고, 바로 이 마음에 자의식, 양심 및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깃들여있기 때문에 이 '마음을 들여다보며 기도하는 것'이 그 어떤 기도보다도 우선되고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 우리는 두 사람의 각각 다른 기도의 태도를 보게 되는데, 한 사람은 주변의 사람들을 의식하며 기도를 하고 한 사람은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며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매우 극명합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 눅 18:9, 10
이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누가는 이 비유를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던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난주의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가 '어떻게 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비유라면, 오늘의 비유인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는 '어떻게 하는 기도가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비유라 하겠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바리새인과 세리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이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의 본보기였다면, 세리는 율법 밖에서 살아가는 죄인의 본보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보면 두 사람이, 똑같이 성전에 올라갔고(눅 18:10), 똑같이 성전에서 기도하고(눅 18:11-13), 똑같이 성전에서 내려갑니다.(눅 18:14) 기도하는 시간과 장소는 서로 같았는데, 기도하는 태도는 극명하게 달랐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 내용은 길었고, 기도의 주어는 계속 '나'였습니다. 반면에 세리의 기도 내용은 짧았고, 기도의 주어는 '하나님'이었습니다.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 18:11-13
먼저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장면은, 그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먼저 의식하는 것입니다. 아마 세리와 같은 시간에 성전에 올라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어떤 우월감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세리와 자신을 비교해 보니까 자기가 기특하게 의로웠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자기자랑으로 채워지는데, 우선은 자기가 범하지 않은 것들, 즉 토색, 불의 간음을 열거하고, 다음은 자기가 잘한 것들, 즉 금식과 십일조를 자랑합니다. 그런데 이 즈음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이 비유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의로움에 취해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을 향해 '그 마음을 교만이 이끄는 대로 방치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겸손할 것'을 교훈하시려고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왜 그가 교만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그는 기도의 자리에 섰지만, 그러나 시선은 자기보다 못한 다른 사람들을 경멸스럽게 응시하며 상대적인 의로움에 취해 있었습니다. 교만의 출발점이 자신에 대한 허영이라면, 교만의 중간지점은 자기 업적을 과시하는 것이고, 교만의 종착점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무서운 함정입니다. 이 교만이 무서운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부인하라고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하나님보다 나를 더 숭배하도록 만들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을 찬양하게 합니다. 그 예가 바로 이 바리새인입니다. 그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여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감사의 내용이 자기 찬미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특히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사도 야고보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런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약 4:6) 교회의 원로에게 말씀을 듣던 어느 교만한 형제가 "아버지여 나는 교만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지혜로운 원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교만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네가 교만하다고 증거하는 것이 아니냐?"요한 클리마쿠스(John Climacus)는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교만이라는 질병을 앓는 사람에게는 안타깝게도 구원의 희망이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속이 썩은 석류와도 같고, 교만한 사람에게는 마귀가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자신을 대적하는 원수 마귀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참 자아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의로우며, 지혜롭다고 생각하며, 죽은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가난한지를 발견합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의 기도가 바로 이 교만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나 자신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그들과 다른 한 사람을 보여주십니다. 그는 그들이 멸시하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자기의 죄를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주님은 이 세리의 기도에서 그의 겸손함을 발굴해내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던 바리새인이 아닌 이 세리가 더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려주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 눅 18:14
사실 이 사람은 그 삶의 내용에서 결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 정권과 계약을 맺은 다음에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둬 그 차액을 자신들의 수입으로 삼았습니다. 로마 정권은 계약 기간이 될 때마다 입찰을 붙여서 가장 많은 액수를 제시한 사람에게 세금 징수권을 주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비리가 개입되었을지는 뻔합니다. 세리를 향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원성도 커서, 세리와 죄인이 동의어로 사용될 지경이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당시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주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대단히 서민적이고 개혁적인 사람들이었고, 특히 부활을 믿고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인들과도 어느 정도 통하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보려고 노력했고, 실제로 그들로 인해 유대인들은 신앙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삶의 내용에 있어서는 우리는 정말 그들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비난하고 세리를 칭찬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우리는 두 사람의 시선의 차이를 봐야 합니다. 세리의 시선은 정확하게 자기 존재의 중심인 '마음(심장, heart)'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 마음에 현존하시는 하나님께 그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밖을 향해 자랑을 늘어놓는 기도라면, 그의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기도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근본이며 원천이신 하나님을 부르면서 자기 기도의 핵심이신 하나님 현존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자기 안의 거짓과 대면함으로서 겸손해지고 가난해지고 진실해진 자신이 되어가고 있습니다.정말 놀라운 사실은 이것입니다. 그 삶이 타인보다 의로워 회개할 것이 없었던 바리새인의 기도가 훗날 신앙의 후손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지지 못하고, 그 삶이 타인보다 악해서 회개할 것이 많았던 세리의 기도가 훗날 신앙의 후손들에게 올바른 기도의 표본으로 물려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뭐라고 기도했습니까?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지난 2천 년 간의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이 세리의 기도를 자신들이 해야 할 기도의 표준으로 삼고, 자신의 심장을 깊이 들여다보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기 내면의 거짓들과 아프게 대면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오직 그 한 마디 언어로만 기도해 왔습니다. 살전 5:17에 보면 사도 바울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당부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했던 이 세리의 기도를 '마땅히 쉬지 말고 해야 할 기도'로서 우리에게 전승시켜주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것입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그래서 우리교회도 세리의 기도로부터 시작되고, 신앙의 선조들을 통해 전승된 기도의 모범을 따라 예배 때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이고 우리 찬양대는 '키리에 엘레이손'을 불러주는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502주년 기념주일입니다. 마틴 루터가 핵심적으로 전하려고 했던 주장 가운데 하나가 '솔라 피데'입니다. 솔라 피데는 '오직 믿음'이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루터가 보았을 때, 인간은 아무리 선한행위로 무장해도 온전하게 의로워질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안에는 선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도 있지만 밤이면 피어나는 악한 욕망도 함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은 이미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죄의 지배 아래 놓여 있으며, 그래서 선한 일도 하지만 악한 죄도 짓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것을 분명하게 보았고, 루터 역시 그것을 강조했습니다. 바로 그런 면에서 주님은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하는 바리새인의 기도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구석에서 기도하는 세리의 기도보다 못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 내면에는 바리새인도 있고, 세리도 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의롭게 살기도 하지만, 세리처럼 악하고 이기적이게 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처럼 교만한 기도도 하지만, 가끔씩은 세리처럼 자신을 낮추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 인생이 저물어 가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까지 겸손해야만 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겸손은 하나님을 얻고 교만은 하나님을 잃기 때문입니다. 서신서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의미 깊은 고백을 봅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 딤후 4:6-8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바울은 지금 자기 인생의 겨울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 인생의 겨울 앞에서 바울의 시선은 의로우신 재판장에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서 바울에게 중요한 건, 선한 싸움을 싸웠다는 사실과,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사실과, 믿음을 지켜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그 누구와의 비교도 없고 오로지 하나님께 재판 받을 자기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바리새인처럼 살기도 하고 세리처럼 살기도 하고, 바리새인처럼 기도하기도 하고 세리처럼 기도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 시선은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견고하게 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느 새 여름이 지나고 가을도 익어갑니다. 그새 상강(霜降)도 훌쩍 지나고 말았습니다. 밤에는 기온이 낮아져서 수증기가 지표에서 엉겨 서리가 되는 계절, 겨울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살아가는 것조차 다 무의미해 버린 시간이 도래하는데, 그래서 '죽음 앞에 선 자로서' 바울이 절감하는 건 오로지 하나님의 뜻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바울은 자기가 체포되어서 처음 재판정에 섰을 때, 한 사람도 자기를 위해 변론하지 않고 모조리 도망쳤다고 말합니다.(딤후 4:16) 그럼에도 바울은 그 사람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과 자기를 비교해 우월감을 비치지도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만이 자기의 힘 되심(딤후 4:17a)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심(딤후 4:18)을 알고 있었고, 회개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이 잘 스며들어 있는 것이 오늘 구약의 말씀입니다.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 욜 2:23, 24
요엘 선지자가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기쁨을 만들어내고, 내가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악한 죄를 짓고, 그로 인해 상한 마음으로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회개한 자녀들에게 계절을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참되고 진정한 복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서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세리가 자신 안의 거짓과 대면함으로서 겸손해지고 가난해진 심정이 되어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했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여미고, 나의 죄인 됨을 통절하게 고백함으로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존재 전체가 다시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시선을 타인에게 둔 채 자기 내면을 외면하고 살고 있지 않은가?
② 시선을 자기 마음에 두고 하나님께 진정한 회개로 나아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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