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7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 읽기 | Lectio
구약 | 애 1:1-6
1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 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 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2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3 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도다 그가 열국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궁지에서 그를 뒤따라 잡았도다 4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 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 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도다 5 그의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이 형통함은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6 딸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그의 지도자들은 꼴을 찾지 못 한 사슴들처럼 뒤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아났도다
응송 | 시 37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서신 | 딤후 1:1-14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3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 이니 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복음 | 눅 17:5-10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눅 17:6, 10을 묵상하십시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을 때 맺히는 두 가지 열매는 무엇입니까?
② 애 1:1, 5을 묵상하십시오. 예루살렘은 왜 이렇게 슬픈 비극을 당하고 곤고하게 되었을까요?
③ 딤후 1:7, 8을 묵상하십시오.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안수하며 희망한 믿음의 열매는 어떤 것들입니까?
■ 기 도 | Oratio
■ 묵상 나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최근의 말씀들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사는 동안 '무엇에 힘쓰며 살아갈 것인가'를 묵상했습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청지기로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 허락되어있는 재물을 선용함으로써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서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극단적으로 비교되었던 두 인물을 통해 불현듯 찾아온 죽음 앞에서 돈이 얼마나 무능한지, 동시에 살아있을 동안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결국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서나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통해서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던져주시는 메시지는 '믿음의 문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위의 비유와 설명을 듣고 난 다음에 사도들은 주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눅 17:5) 라고 당부합니다. 왜 사도들이 그렇게 당부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비유를 다 듣고 나니까 아직 자신들에게는 '큰 구렁텅이' 저쪽 편에 위치한 아브라함의 품을 벌써부터 바라보며 아직 오지도 않은 그 미래를 준비할만한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이 스스로 보기에도 돈만 알고 살다가 음부에 떨어진 부자나 자기들이나 그 삶의 내용에서 그다지 다른 면이 없어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생각해보니까 결국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 차라리 나사로처럼 이 세상에서 거지로서 사는 한이 있더라도 불현 듯 다가올 죽음의 때에 자기들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믿음을 더해달라고 당부를 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오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는 그냥 아는 것에 불과하지 실제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믿음보다 외적 조건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지를 여전히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숙제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더해달라는 사도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 눅 17:6
우리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라는 사도들의 요청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라는 요청에는 우리에게 얼마간의 믿음이 있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은 '지금 자신들에게 있는 그 믿음' 위에 믿음을 더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너희에게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다"는 겁니다. 만약 그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들은 뽕나무를 뿌리 채 뽑아 바다로 옮길 만한 능력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흔히들 생각하듯이 이 말씀이 "믿음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식으로 이해해 버리면 그건 주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팔레스티나 지방의 뽕나무는 뿌리가 매우 깊어서 바람이나 폭풍우에도 잘 뽑히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그 뽕나무를 뿌리 채 뽑아 바다로 옮길 만한 능력을 행할 수 있다는 말씀에서 우리가 먼저 성찰해야 할 것은 뽕나무 뿌리가 의미하는 바입니다.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사도들이 예수님께 '믿음을 더해달라'고 당부하게 된 동기는 스스로에 대한 절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보기에도 돈만 알고 살다가 음부에 떨어진 부자나 자기들이나 그 삶의 내용에서 그다지 다른 면이 없어보였습니다.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들려주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자신에게 속지 말고 너희 안에도 어김없이 독버섯처럼 뿌리내리고 있는 탐심과 탐욕 그리고 이기적인 자아(自我)를 보라는 겁니다. 진실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마음속 깊이 뿌리박고 있는 그 지독한 우상들을 뽑아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그 지독한 우상들을 뿌리째 뽑아버릴 때, 그들은 비로소 '큰 구렁텅이' 저쪽에 있는 아브라함의 품에 심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듯이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우리는 우리 안에 고질적으로 뿌리박은 자신에 대한 집착과 물질에 대한 집착을 소멸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란 어떤 믿음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당시 사도들은 '믿음' 하면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능력의 사람들을 가장 먼저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이 클수록 큰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오늘도 많은 신자들이 믿음을 그런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의 가치를 생명력이라는 차원에서 보았습니다. 겨자씨는 그 크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품고 있는 강력한 생명력 때문에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식물입니다. 비록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은 씨앗이지만 그 안에 있는 생명력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천국을 설명하실 때도 겨자 씨 한 알을 예로 드신 바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 13:31, 32)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겨자씨 한 알처럼 작디작은 식물도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면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지친 깃을 쉬는 하나님 나라의 쉼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우리 안에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진정으로 있기만 한다면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깃들인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해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집착과 아집들이 소멸되고 마침내 아브라함의 품과 같은 평온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 눅 17:7-10
이 가르침은 사도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바리새인을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적인 행위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율법을 자기들보다 더 잘 지키는 사람들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기도, 헌금, 구제, 금식 등 모든 신앙생활에서 모범적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늘 그게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 남다른 율법행위로 인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헌신을 사람들 앞에서 과시했습니다. 말과 행동으로 과시하는 바리새인도 있었고, 기도로서 과시하는 바리새인도 있었습니다. 그런 현상은 인격의 문제인 듯했지만, 사실은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었다면, 그들은 결코 자기 주제를 넘어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자기의 수고는 은밀한 중에 상급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그리 오래 살지 않습니다. 불현 듯 죽음이 찾아오고, 불현 듯 하나님 앞에 섭니다. 그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릴 빛나게 하는 것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뿐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으면 이렇습니다.너희 가운데 누가 농사나 양치는 일을 하는 종을 데리고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오면 '어서 와서 밥부터 먹어라' 하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오히려 '내 저녁부터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실 동안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고 나서 음식을 먹어라.' 하지 않겠느냐? 그 종이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 눅 17:7-10 공동번역
여기에 나오는 종들은 철저하게 종의 신분을 넘어서지 않습니다. 그들은 일을 할 때도 종의 신분을 넘지 않고, 일을 마친 후에도 종의 신분을 넘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한 종이 주인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어서 내 안에 똬리 틀고 있던 자아에 대한 집착이 그 고질적이고 질긴 집착이 뿌리째 뽑혀서 주님의 은혜의 바다에 던져졌을 때, 그 때 비로소 우리가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자세히 봐야 보일만큼 작으나 생명력 짙은 그 믿음 때문에 자신의 '종 됨'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 고백하며, 내 능력과 업적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 살아갈 때, 그 때 비로소 우리는 구렁텅이 너머 아브라함의 품 같은 평온과 위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성경의 말씀에서 우리는 예레미야의 슬픈 노래를 듣습니다.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 애 1:1, 2
당시 유대인들은 '메킬로트'라고 불리는 '다섯 두루마리의 책들'을 해당 절기마다 읽었는데, '애가(哀歌)'는 예루살렘 파괴일에 낭독했습니다. 애가의 내용은 예루살렘 멸망에 따른 비참한 현실에 따른 비탄(悲嘆)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1절의 '슬프다'라고 번역된 '에카'라는 단어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에카'는 비극적인 상황을 묘사할 때 쓰이는 감탄사인데 시작부터 이 단어가 등장했다는 건 그들이 당한 비극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은 왜 이렇게 슬픈 비극을 경험하게 되었을까요?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의 죄가 많으므로"라고 대답합니다.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 | 애 1:5
그들의 죄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떠나 자기숭배에 빠졌고, 스스로 열방의 큰 자로 자처하던 교만함이 그들을 비참한 자리로 내몰고 만 것입니다. 그들은 종의 자리를 벗어나 스스로 주인이 됨으로서 그만 곤고함을 자처하고 말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의 '거짓이 없는 믿음'(딤후 1:5)을 칭찬합니다. 그 '거짓 없는 믿음'은 먼저는 그의 외조모 로이스에게 있다가, 후로는 그의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던 것이었는데, 이제는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 일 듯하게 하기 원한다"(딤후 1:6)고 말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이렇게 정리합니다.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 딤후 1:7b-9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얻을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려는 마음을 뿌리째 뽑아 하나님의 능력의 바다에 심어 복음을 열매 맺을 것이고,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것입니다. 때때로 조그만 봉사를 하고 나서 그것에 대한 인정과 찬사를 기대하거나, 그에 따른 특권을 주장하지는 않습니까? 그런 태도는 겨자씨만한 믿음조차 없는 태도입니다. 참된 믿음은 자기가 한 일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종일 힘든 노동을 하고 지친 몸으로 돌아와 또 다시 주인의 식탁을 준비하는 종처럼, "보잘 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라며 겸손하게 자세를 낮추는 참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믿음을 상실한 채 자기숭배의 우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② 내게 있는 작은 믿음이 스스로를 무익한 종이라 여겨지게 하는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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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6주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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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4주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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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8주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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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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