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6주 너는 이것을 기억하라
■ 읽기 | Lectio
구약 | 렘 32:1-2, 6-15
1 유다의 시드기야 왕 열째 해 곧 느부갓네살 열여덟째 해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2 그 때에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혔으니 6 ○예레미야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기를 7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 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8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나에게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 9 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되 10 증서를 써서 봉인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11 법과 규례대로 봉인하고 봉인하지 아니한 매매 증서를 내가 가지고 12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과 매매 증서에 인 친 증인 앞과 시위대 뜰에 앉아 있는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매매 증서를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부치며 13 그들의 앞에서 바룩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증서 곧 봉인하고 봉인하지 않은 매매 증서를 가지고 토기에 담아 오랫동안 보존하게 하라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응송 | 시 91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서신 | 딤전 6:6-19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복음 | 눅 16:19-31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 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 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눅 16:25을 묵상하십시오.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는 부자에게 아브라함은 무엇을 '기억하라'고 말합니까?
② 눅 16:27-29을 묵상하십시오. 나사로를 보내 내 형제들에게 증언하게 해달라는 부자의 요청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③ 딤전 6:10-12을 묵상하십시오. 성도들이 피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따라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너는 이것을 기억하라
공자의 논어(論語) 자로(子路)편 6장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子曰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 (자왈 기신정 불령이행 기신부정 수령부종), "자신이 올바르면 백성들은 명령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행하고, 자신이 올바르지 않으면 백성들은 명령을 해도 따르지 않는다." 즉 사람들을 올바로 이끌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부터 바로 세우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지도자이던 집단이던 스스로 올바르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야 사람들은 마음을 다해 따르게 될 것입니다. 지난 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이 세습을 사실상 허용하는 결정을 표결을 통해서 내렸습니다. 교회는 결코 외부의 압력이나 세속적인 영향력에 굴복하지 않아야 하는데, 통합교단의 이번 결정은 세속적인 가치 즉 돈에 굴복한 처참한 결정이라 하겠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올바르지 않은 길로 간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복음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다움을 상실한 교회를 누가 더 이상 교회라 하겠습니까? 사실 이런 현상은 비단 통합교단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감리회를 포함해 오늘날의 교회는 자정능력을 상실한 채 광범위한 영역에서 추문에 휘말려 있고, 그 중심에는 돈과 교권이 있습니다. '其身不正 雖令不從(기신부정 수령부종)' 오늘의 교회가 뼈아프게 새겨들어야 할 유가(儒家)의 일침이라 하겠습니다.오늘 복음서에 등장하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돈이 오로지 개인의 만족과 성취의 수단으로 사용될 때 찾아드는 파멸적 능력을 극적인 형태로 보여줍니다. 재물에의 집착은 이렇게 하나님의 공의도, 이웃의 궁핍도 알아보지 못하게 할 만큼 마음의 문을 마비시켜 버립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 "야훼께서 시온에 안 계시는가? 왕 노릇 그만 하시려고 물러나셨는가?"(렘 8:19) 라며 불만을 터뜨린 것은 그들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떠나 '보이는' 우상에게로 기울어진 증거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우상에 대해 '헛된 것들' 즉 '허무한 실체'라고 이야기 하지만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상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강력한 실체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눅 16:13)시며 우상에게 기울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키시려 애를 쓰셨고,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까지 들어가며 돈보다 이웃, 그리고 미래적 가치에 마음을 두고 살아갈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었고, 그들이 비웃는 이유를 누가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눅 16:14) 그리고 오늘 복음서의 말씀이 뒤이어 지는데, 여기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도 '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이냐는 질문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는 이 세상을 사는 두 부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의 삶은 살아서도 극단적으로 비교되었지만, 죽음을 기점으로 더 극단적인 비교가 이어집니다.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는 음부에 떨어졌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이 비유가 어떤 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비유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종교권력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15장과 16장의 이야기는 모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눅 15:2절에 따르면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에게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오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향해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며 비난합니다. 자신들이 가진 종교적 기준에 비추어서 예수님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예수님은 잃은 것을 다시 찾는 세 개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마음을 설명해 주십니다. 잃은 양의 비유(눅 15:1-7),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눅 15:8-10), 그리고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눅 15:11-32)입니다. 그리고 지난 주 말씀에서는 부자와 청지기 비유로 재물을 미래를 위해 사용할 것을 권장하셨고, 이어서 오늘 복음서에서 주님은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를 들려주신 겁니다. 이런 일련의 흐름을 놓고 볼 때, 부자와 나사로 비유는 종교적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서 한편으로는 타인들을 배척하고, 한편으로는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 있던 당시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입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매우 호화로운 삶을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 눅 16:19-21
이 이야기의 두 주인공 사이의 대조적인 모습은 더 이상의 부조화를 이룰 수 없을 정도입니다. 부자는 화려한 의복에서부터 진수성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여유가 있었고, 가난한 거지는 그 부자가 식사 후에 손을 닦고 식탁 밑으로 버리는 빵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개들까지 몰려와서 거지의 몸에 생겨난 상처를 핥아 덧나게 함으로서 거지의 고통을 배가시켰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여기 나오는 부자는 자기 집대문간에 누워있던 그 거지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부자로서의 자신과 거지로서의 나사로를 그저 그렇게 살도록 숙명적으로 태어난 것으로 여기고 그 숙명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간 것일까? 그런데 사실 오늘 복음서에서 누가가 우리에게 정말 보여주고 싶어 하는 건, 부자가 생전에 누렸던 호사스러운 삶도 아니고 나사로가 생전에 시달린 굶주림도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누리고 싶어 하는 부자의 호사함도, 우리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 하는 가난의 지겨움도, 거기에 조바심하고 관심하는 것은 우리이지 지금 누가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의 모습은 우리가 늘 보는 풍경입니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그렇게 부자거나 가난한 존재로 살아갑니다. 하나도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정작 새삼스럽고 놀라운 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입니다. 누가는 두 사람의 운명이 순식간에 바뀐 바로 그 풍경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 눅 16:22-24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내심 놀라는 건, 순식간에 장면이 바뀌면서 모든 상황이 완전히 뒤집어져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퍽 오랫동안 눈에 익은 풍경이 바뀌어 전혀 예상치 못한 풍경이 전개됩니다. 거지 나사로는 '영원한 행복'을 뜻하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배고프지 않은 식탁에 자리를 잡게 되고, 반면에 부자는 죽음의 세계에 거꾸로 떨어져서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부자는 자기의 전 생애 동안 단 한 번도 마음에 두지 않았던 나사로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 두 사람의 운명은 왜 이렇게 순식간에 바뀌고 만 것일까요? 부자는 부자여서 지옥에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또 그가 특별한 죄를 지었다는 흔적도 없습니다. 그는 단지 허락된 기회와 여건을 활용해 재산을 모았고, 그 재물이 주는 쾌락을 누리며 살았을 뿐입니다. 나사로 역시 거지라는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게 아닙니다. 또 그가 특별히 선하거나, 남보다 뛰어난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흔적 역시 없습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한 평생 그저 남의 것을 얻어먹으며 질병으로 고생한 것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사후(死後)에 그들의 운명을 그렇게 결정적으로 뒤바꿔 놓은 것일까요? 나사로는 아무 것도 없어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았고, 부자는 재물이 많아서 재물만 바라보고 산 것입니다. 물론 모든 부자가 재물만 바라보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재물로 하나님 사랑을 실천할 수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것도 없다 해서 가난한 모든 사람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에 한이 맺혀 재물에 더 집착하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사로라는 이름이 '엘리에제르(דןעלא)' 즉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가 가난한 중에도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온 신앙인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가난하면서도 재물 아닌 하나님만을 전부로 알고 산 사람, 그가 바로 나사로였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 눅 16:25, 26
한 가지 경계할 것은 예수님의 이 비유를 신학적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당시 유대인들의 내세관 눈높이에 맞추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 이후의 세상을 서로 마주볼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두 개의 세계 즉 기쁨의 세계와 고통의 세계로 나뉘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그들의 내세관에 맞춰서 그들이 이해하기 쉽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었던 것일까요? 지금 주님은 하나님의 정의가 어떻게 인생의 불의와 불공평을 정의롭게 짜 맞추시는 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역사가 펼쳐지는 동안, 거기에 개입하시지 않는 듯하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은 것이 나사로의 이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나사로'의 이름에는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 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했던 대답, 즉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정의가 이미 실현되고 있고, 그것이 지금 현실로 드러나고 있음을 주지시켜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의심받고 배척되었던 '하나님의 정의'가 우리 모두 죽음에 직면했을 때 가장 위대한 가치로 드러나고 있는 것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을 늘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 눅 16:25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있는 동안 '무엇에 힘쓰며 살아야 할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세상의 불의와 불공평 앞에서 체념하고 참아내며 천국만 바라보는 아편이나 진정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 이후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이 땅에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부자로 살던 가난하게 살던 그 모든 상황을 거슬러 보다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것에 나의 의식을 일깨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입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가치 그러나 하늘에 속한 영원한 가치에 주목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비롯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경고'라고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세련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도 교양이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존경받을 만한 일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종교적 행위와 구제와 선교는 위선이었습니다. 실제 그들의 삶의 전제는 언제나 '현실'이었고, 그들의 삶의 목적은 '현세'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내세나 영생이란 현실과 현세를 꾸미기 위한 장식물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이 보이는 종교행위는 자신들이 타인들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의 경고에 따르면 그들은 '하데스' 즉 '음부'에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생물학적으로 죽기 전에 그들은 이미 영적으로 하데스에 들어간 것입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단절이 죄라면, 그 '하나님과의 단절'은 바로 자기 몰입에서 시작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는 필연적으로 자기 밖과의 단절로 이어지는데, 오늘 복음서의 부자가 보여준 삶의 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국소적으로 보지 말고, 영원이라는 시간 안에서 봐야 합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로웠다는 것은 그가 돈의 문제를 미래지향적으로 매듭지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도 돈을 좋아했지만 그러나 미래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눅 16:24) 부자의 이 절망적인 애원이 아브라함에 의해 거절당한 것(눅 16:25)도 비극이지만,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 16:27, 28)라던 그의 애원이 거절당한 것은 정말 처절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 내 다섯 형제에게 증언하게 해서, 그들이라도 이 고통 받는 음부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부자에게 아브라함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 눅 16:29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 눅 16:31
주님의 말씀은 명료합니다. 회개함으로서 고통 받는 음부에 가지 않고, 나사로처럼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사람, 그는 '말씀을 새겨듣는 사람'입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바로 그 사실을 말씀해줍니다.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 딤전 6:11, 1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 딤전 6:14
바로 앞 절에서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져서 마침내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된다"(딤전 6:9)고 말하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다"(딤전 6:10)고 경고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본 바리새인을 비롯한 종교권력자들과 오늘 복음서의 부자가 바로 이 교훈의 모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부와 영광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허비하다가 스스로 자기를 찌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돈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탐욕과 미혹에 떨어져 믿음에서 떠날 것을 경고하고 앞으로 그가 살아가야 할 모습으로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는 삶을 제시해 줍니다. 그 삶이 어찌 쉽기만 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굳이 '믿음의 싸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싸움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겠습니다. '현재'라는 이 시간이 저와 여러분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지금', '현재'의 나의 믿음과 삶이 나의 영원을 결정한다는 엄숙한 진리를 실감하고 계십니까? 지금 나의 삶이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불행, 영원한 승리와 영원한 패배가 결정되는 순간입니다. 지금까지 무엇에 힘쓰며 살아오셨습니까? 이제부터 무엇에 힘쓰며 살아갈 것입니까?"子曰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자왈 기신정 불령이행 기신부정 수령부종) 이 말씀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재해석 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올바르면 세인들은 강요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믿고, 우리가 올바르지 않으면 세인들은 전도해도 믿지 않는다."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끌기 위해 지금 우리가 가장 힘써야 할 것은 '우리 자신부터 말씀으로 올바르게 하는 것'이겠습니다. 그럼으로써 불현듯 죽음 앞에 섰을 때, 그 때가 우리의 가장 행복한 순간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말씀에 귀를 닫은 채 현재의 쾌락에 집착하고 있지 않은가?
② 말씀을 경청하며 자신을 올바르게 세워 미래를 준비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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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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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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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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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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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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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