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3주 행복의 반대쪽으로 가라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렘 18:1-11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주리라 하시기로 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 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7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8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9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11 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응송 | 시 139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서신 | 몬 1:1-21
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2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4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5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6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7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9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3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함이라 15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9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20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21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 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복음 | 눅 14:25-33
2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다 비웃어 30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32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마 14:26, 27, 33절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② 렘 18:6을 묵상하십시오.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③ 몬 1:11을 묵상하십시오. 빌레몬에게 무익했던 오네시모는 새로이 빚어져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행복의 반대쪽으로 가라
박노해 시인이 매 주 화요일 아침에 메일링을 통해 자신의 시를 보내주는 '박노해 시인의 숨고르기'에서 '인생에' 라는 시를 소개한 걸 보았습니다. 그 시에서 시인은 헤르만 헤세의 글을 인용해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의 반대쪽으로 가라.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 그리고 이어지는 연에 보면 "인생에 주어진 단 하나의 진리는 행복하려면 행복의 반대쪽으로 걸어가라는 것, 거기 또 다른 내가 울고 있으니까" 라고 말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서는, 행복이 있다고 여겨지는 그 방향을 향해 걸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정 반대로 말합니다. 행복의 반대편으로 가라는 겁니다. 이 역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취지의 말씀을 하십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눅 14:26, 2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참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녹녹치 않다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세 가지를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부모와 처자이고, 둘째는 형제와 자매이고, 셋째는 자기 목숨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눅 14:33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가족과 목숨과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족과 목숨 그리고 소유 이 세 가지는 우리가 지상 생활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행복의 조건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복의 조건들을 미워하라는 말씀은 정말 행복의 반대쪽으로 가라는 의미이겠습니다. 그것이 곧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27절)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말씀 그대로 순종하며 제자의 길을 걸어가실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아마도 사람들이 가족과 목숨과 소유에 과도하게 얽매여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 바로 앞에 있는 눅 14:15-24에 보면 '잔치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청했습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눅 14:17)라는 이 초청사는 '당신들을 행복하게 해 줄 모든 것을 마련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초청받은 사람들이 저마다 핑계를 대며 초청을 거절합니다. 한 사람은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눅 14:18)고 말하고, 또 한 사람은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눅 14:19)고 말하고, 또 한 사람은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눅 14:20)고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초청을 거절한 이유는, 그들이 초청이 싫거나 혹은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밭과 소와 가족이 더 귀해서 그것 너머의 행복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행복보다 가족과 소유와 목숨을 지키는 일이 더 현실적인 행복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가족과 소유와 목숨', 정말 귀하디귀한 현실적인 행복의 조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 심지어 목숨을 미워한다면 어떻게 그 행복이 행복일 수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행복이란 가족과의 사랑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자기 존중과 자기실현, 그리고 자기완성을 통해 행복을 느끼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것들을 미워해야 제자의 길에 설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참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니, 그러면 도대체 참 행복이란 어떤 행복을 말씀하는 걸까요? 이 지점에서 우리가 성찰할 게 있습니다.역설적이게도 대부분 사람들이 고통과 불행에 빠지는 이유 역시 가족과 소유와 목숨이 원인인 때가 많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모순입니다. 어떻게 가족과 소유와 목숨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일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바로 이 모순과 역설을 꿰뚫어보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진정한 행복에 이르고 싶은가? 그러면 그대가 빠져있는 빗나간 가족사랑, 빗나간 자아사랑, 그리고 소유에 대한 빗나간 집착에서 벗어나라."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로이 설정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를 믿어 신뢰하고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행복하려다 빠진 불행'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참으로 애틋하고 소중한 저 행복의 요소들이 오히려 나에게 불행의 요인이 되어버린 이유는, 가족이나 목숨이나 소유가 악해서가 아니라, 기준과 표준을 잘못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즉 나의 미성숙한 가족사랑에 하나님을 예속시키고, 나의 유한한 목숨에 영원한 생명을 희생시키고, 나의 덧없는 소유에 하나님 나라를 희생시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고통과 불행의 원인입니다. 가족을, 목숨을, 소유를 사랑한다는 미명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희생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로 가기 위해 자기 가족과 목숨을 미워해야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미워하다'는 뜻의 헬라어는 '미세오(μισέω)'인데, 이 단어가 셈어 계통에서는 '덜 사랑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이 말씀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목숨을 ○○보다 덜 사랑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내 가족보다 목숨보다 '더' 사랑해야 할 ○○은 무엇일까요? 언제나 예수님 메시지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부터 줄곧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일상의 염려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향해서는, 그러한 염려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거라면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염려와 가족과 목숨에 대한 염려는 같은 차원에 속합니다. 이런 것은 우리의 삶에서 긴급하기도 하고 절대적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떠나서는 삶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앞에서는 이런 것들이 '덜 사랑해야 하는' 상대적인 차원으로 떨어집니다.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면 삶이 파괴됩니다.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조차 하나님 나라가 절대적인 것으로 경험되지 못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주님의 말씀이 막연하고 관념의 세계 안에서만 겉도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 나라를 향해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고, 가족과 목숨과 소유에 대한 집착만 더해갈 뿐입니다. 이 악순환을 어찌할 것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두 가지 예증을 들어서 하나님 나라는 어떤 이론이나 추상의 세계가 아닌 실제임과, 예수님 제자로서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희생과 애씀이 필요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 눅 14:28-32
주님은 당시 제자들이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망대'를 예로 설명합니다. 망대는 농장 건물을 뜻하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막연한 관념의 세계가 아닌 농장의 망대만큼이나 가까운 실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 역시 망대를 세우는 일 만큼이나 치밀한 준비와 애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망대를 세우는데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를 미리 계산하지 않고 망대를 세우려다가는 기초만 쌓고 끝나버리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 전쟁을 예로 들어 설명하십니다. 어떤 임금이 전쟁을 치르려면, 그럴만한 준비가 되어있는지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그렇듯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자신에게 그런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미리 살펴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제자가 되기 위한 준비로는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우선 우리가 미워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빗나간 가족사랑, 빗나간 자아사랑, 그리고 소유에 대한 빗나간 집착을 미워해야 합니다. 행복의 반대쪽으로 정말 가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완전한 지혜를 100% 신뢰하고 예수님의 말씀만 의지해 걸어갈 때 가능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이 창조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참 행복에로 이끌어 주십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새 창조'를 이렇게 말씀합니다.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주리라 하시기로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 렘 18:1-4
하나님은 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고 하실까요?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으깨어져 완벽하게 다른 그릇으로 빚어지는 과정을 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듯 빗나간 가족사랑, 자아사랑과 소유에 대한 빗나간 집착에 매여 있는 이스라엘을 으깨어 다시 빚으시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 렘 18:6
여기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비유합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백성의 운명은 토기장의 손에 있는 진흙처럼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실제로 토기장이 집에서 어떻게 토기가 만들어지는지를 보았습니다. 흙이 원해서 어떤 용도의 그릇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판단의 주체는 토기장이입니다. 토기장이가 마음에 안 들면 그릇이 원치 않아도 부숴버립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토기장이이신 하나님 손에 맡겨져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부서져야 하고, 우리는 매일매일 다시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어제와 다른 오늘의 내가 되어야 하고, 어제보다 완성된 오늘의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제보다 다른 오늘의 내가 되게 하는 신앙의 그릇으로서 우리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 렘 18:10
어제보다 더 진보된 신앙의 기준은 하나님의 목소리에 대한 청종의 여부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청종을 통해 우리는 매일매일 새롭게 빚어지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골방에 앉아서 신학적인 이론을 전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 역사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가 하는 진술은 모두가 구체적인 역사적 과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역사의 현장과,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말씀에 청종하는 삶'이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고, 마침내 참 행복을 얻게 하는 '외길'이란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몬 1:10) 오네시모와 관련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오네스모를 소개하면서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골로새에서 주인에게 죄를 짓고 도망쳐 온 오네시모를 바울이 옥중에서 영적 해산의 고통을 통해 변화시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변화된 오네시모를 사도 바울이 그의 주인이었던 빌레몬과 교회에 소개하며 하는 말이 인상적입니다.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 몬 1:11
아마도 그는 빌레몬에게서 도망가기 전에도 유익하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런 무익한 오네시모의 회심 전과 회심 후의 상태를 비교해주기 위해 매우 대조되는 두 단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는 '무익하였으나'라는 뜻의 '아크레스톤(ἄχρηστον)'이고, 하나는 '유익하므로'라는 뜻의 '유크레스톤(εὔχρηστον)'입니다. 이 두 단어는 비슷한 발음을 가졌지만, 정 반대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오네시모의 변화를 매우 상징적으로 표현해줍니다. 그는 외형적으로는 달라진 것이 없지만, 그러나 그의 내면은 유익한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이 오네시모는 그 삶이 부서져버렸다가 하나님의 손에 다시 빚어진 사람입니다. 분명히 그는 무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를 다시 빚어서 모두에게 유익한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이기를 원하십니까? 그럼으로써 참 행복 얻기를 원하십니까? 보이는 행복, 내가 집착했던 행복의 반대쪽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과 표준으로, 이전에 내가 사랑하던 것, 집착하던 것들과의 관계를 새로이 설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또 다른 내가 있습니다. 그 '또 다른 나'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죄와 사망이 되어버린 나, 빗나간 생각과 집착과 관념에 사로잡힌 나가 아닌,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나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기 이전의 나입니다. 행복하게 에덴동산을 뛰놀던 나입니다. 그 나를 회복하면 우리는 다시 참 행복을 회복하게 됩니다. 부디 하나님 말씀의 손길로 매일매일 다시 빚어지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거듭나고 성숙해져서, 이제는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유익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아침이 오는 것도 저녁이 오는 것도 행복하고, 여름이 가는 것도 가을이 오는 것도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내 생각과 신념을 고수하며 깨어짐을 거부하지는 않는가?
②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며 깨어짐을 위해 애쓰고 있는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41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6주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
KOR | 2024.11.17 |
41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5주 나를 넘어 하나님께로
|
KOR | 2024.11.10 |
410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4주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
KOR | 2024.11.02 |
409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3주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
KOR | 2024.10.26 |
408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2주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
KOR | 2024.10.19 |
407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1주 하나님만이 오직 최선이시다
|
KOR | 2024.10.12 |
406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0주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KOR | 2024.10.05 |
405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8주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
|
KOR | 2024.09.21 |
404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7주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
KOR | 2024.09.14 |
403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
KOR | 2024.09.07 |
40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
KOR | 2024.09.01 |
40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
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