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9주 하나님의 뜻을 품은 사람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사 1:1, 10-20
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 이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 털 같이 희게 되리라 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20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응송 | 시 50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서신 | 히 11:1-3, 8-16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복음 | 눅 12:32-40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사 1:10을 묵상하십시오. 앗수르가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고 남유다 조차 위기에 직면해 있을 때, 이사야의 처방은 무엇이었습니까?
② 히 11:10을 묵상하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삭과 야곱과 함께 약속을 믿고 살아갈 수 있었던 궁극적인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③ 눅 12:33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한 믿음의 행동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하나님의 뜻을 품은 사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책이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이 58세이던 1958년에 쓴 글인데, 6.25 전란을 겪고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질타하는 예언자적인 목소리가 담겨있는 책입니다. 그 책에서 함석헌 선생은 "모든 일에는 뜻이 있다. 모든 일은 뜻이다"라고 말하며, "뜻 품으면 사람이고, 뜻 없으면 사람 아니다. 전쟁을 치르고도 뜻도 모르면 개요 돼지다" 라고 단언합니다. 결국 우리 사람됨은 뜻을 품고 있느냐, 뜻을 깨닫지도 품지도 못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란 뜻인데, 함석헌 선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은 뜻이다'라고 말하고, 종교란 '하나님의 뜻을 찾음'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서일과는 바로 이 '뜻'과 밀접하게 연관된 말씀들입니다. 즉 과거 혹은 현실세계에서 '뜻'을 찾고 그 안에서 살아가기를 당부하는 말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인 이사야서가 기록되던 BC 740-680년은 정치적 격변기였습니다. 당시 앗수르 제국의 정복군주인 디글랏 빌레셀 3세는 이미 북시리아 지역의 작은 나라들을 다 정복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아람의 도시국가인 하맛 정복을 필두로 시리아, 페니키아, 팔레스타인의 소왕국들을 차례로 정복하고, 마침내 최강대국 중 하나인 애굽의 국경선까지 진격해서 정복일지에 '애굽 강 앞에 군사기지를 구축했다'고 자랑을 하기도 했습니다. 같은 시기 북이스라엘의 왕 므나헴은 앗수르 왕 불에게 은 천 달란트를 바침으로서 가까스로 자기 왕위를 유지했는데(왕하 15:19), 당시 앗수르 제국의 정복일지에 유다 왕 웃시야는, 조공을 바친 공신 명단에서 제외되어 있었던 걸 보면 아직 앗수르의 공격이 남부 팔레스타인까지는 진출하지 못하고 있던 때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남 유다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된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웃시야의 치하에서 남 유다는 주목할 만한 경제적 성과를 거두고 있었고(대하 26:15), 정치적 강국의 면모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 왕 웃시야가 죽던 해'(사 6:1)가 BC 742년임을 가정하면 그들의 안정된 삶 역시 시한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구약의 말씀은 '곧 끝나버릴 안정'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도, 가슴에 품지도 못하고 그저 눈에 보이는 안정에 겨워 흥청망청 살아버린 당시 남 유다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 사 1: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는 예루살렘 사람들, 그러니까 예루살렘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왕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비교적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역대하 26:22절과 32:32절에 보면 이사야가 웃시야 왕과 히스기야 왕의 서기관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일찍이 유다 왕실의 내부자였던 셈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사야는 선지자로 부름받기 전부터 나라의 외교정책과 백성들의 상황에 대해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당시의 고위 관료들과 유다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 사 10:10
여기서 이사야는 당시 이스라엘의 역사를 악하게 주도했던 두 세력을 적시합니다. 그들은 '관원들'과 '백성'이었습니다. 고위 공직자들이 '소돔의 관원'이라 불린 건 그들이 권력을 이용해 수탈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고, 백성들이 '고모라의 백성'이라 불린 건 그들이 땅과 관련해 사회적인 약자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을 소돔과 고모라와 비견한 것은 그들의 삶과 그 결과로 주어진 심판이 소돔과 고모라와 유사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장에서 5장까지 망라되고 단죄된 그들의 죄악상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깨뜨린 자요, 하나님이 정하신 선악의 기준을 뒤엎어 버린 자들이었습니다.(사 5:8-24)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이스라엘 언약공동체를 지탱해주는 하나님의 의지이자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 즉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마음에 품는 대신 갖가지 '죄성(罪性)'을 마음에 은폐하고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들의 죄악상을 보다 상세하게 나열합니다.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 사 1:11, 12
그들의 타락은 거짓예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예배와 제물 등 외적 의무를 다했지만 그러나 마음에 진정함은 담기지 않았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허울뿐인 예배로 하나님을 속였고, 하나님은 그들의 거짓 예배를 혐오하셨습니다.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이 말씀에 하나님의 혐오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공평과 정의가 결여된 종교적 행위를 하나님은 단호한 어조로 거절하십니다.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 사 1:13-15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 그게 뭐겠습니까? 예배와 삶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예배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었기 때문에 삶 역시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산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약속한 절기를 모두 지켰습니다. 월삭도 지키고 안식일도 지켰습니다. 종교적인 모든 행위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서면 약자를 착취했습니다. 교도통신 서울특파원을 지낸 저널리스트 아오키 오사무가 '일본회의의 정체: 아베 신조의 군국주의의 꿈, 그 중심에 일본회의가 있다' 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일본회의는 표면적인 얼굴로 문화인, 경제인, 학자를 내세우지만, 실제 모습은 '종교우파단체'에 가까운 정치집단이라 할 것이다. 그 '종교우파집단'이 선도하는 정치활동이 작금에 기세를 떨치며 현실정치에 영향력을 높이고 있다." 현재 아베 정부의 역사 왜곡을 근간으로 하는 막말, 고집, 증오, 선동, 그리고 경제보복 등의 이면에는 '종교우파집단'의 뿌리 깊은 '종교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하급 신흥종교와 기독교를 감히 비교할 건 아니지만, 그러나 최근 기독교 우익집단이 보이는 행태를 보면 사실 '무엇이 다를까' 싶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슴에 묻은 믿음, 참 믿음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배하는 마음'과 '살아가는 마음'이 동일한 것이 참되고 진정한 믿음입니다. 예배하는 사람답게 악을 떠나야 하고, 기도하는 사람답게 손에 피를 묻히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 깊이 하나님의 뜻을 두고,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고 손해를 볼지라도 하나님이 살라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서신서의 말씀을 보십시오.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 히 11:1-3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후 70년경에 그리스도인이 된 유다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들은 비그리스도인 유다인들과 이교도들에게 둘러싸여 살았는데, 그들 모두로부터 박해를 받으면서 자기 땅을 버리고 떠나도록 강요를 당했습니다. 낙심한 그들은, 혹시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실수가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마음이 위축되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본보기로서 아브라함을 보여줍니다. 그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고향을 떠나라 하실 때, 갈 바를 모르면서도 떠날 수 있었고, 낯선 땅에 천막을 치고 나그네 삶을 살아내며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히 11:8-10)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그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상' 혹은 '증거'라는 말씀은 모두 '확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믿음이란 확신입니다. 확신이 있었기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것 같이' 그는 살아낸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말씀을 하는 이유는 우리 역시 믿음의 확신을 토대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것 같이' 살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였고, 오늘 구약의 말씀을 기록한 이사야 선지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지자들은 '현재'가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던 영광스러운 '과거'와 하나님이 창조하실 영광스러운 '미래' 사이에 고통스럽게 끼어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망스러운 '현재'에 발을 디딘 채, 하나님의 구원역사인 위대한 '과거'를 되돌아보고, 하나님께서 열어주실 위대한 '미래'를 내다봅니다. 누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이사야 시대에는 '남은 자'들이었고, 우리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롬 9:27-29에서 사도 바울은 이사야의 '남은 자 사상'을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합니다. 구약시대의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품고, 아직 돌이키지 못한 사람들이 회개할 때까지 촉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리스도의 고난의 목격자로서, 그 고난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이킨 사람들이고, 아직 그 뜻을 깨닫지 못한 형제와 이웃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호소하는 사람들입니다. 세계 역사는 물론이요, 교회사 역시 인간의 누적된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야기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 한가운데 세워진 교회는 교회 내적으로는 오염과 부패의 유혹에 맞서 싸워야 하고, 교회 외적으로는 '빛의 삶'으로 거룩성을 지켜내야 합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와 맞물린 한국 교회사가 그리스도인들의 분투와 희망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 74년간 이어진 분단체제와 갈라진 이념, 고도의 소비사회와 문학적, 철학적 상대주의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국 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품고 살아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도전과 우리 겨레 내부의 자해적인 동족분열과 상잔의 역사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무엇을 기도하고 행동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인 누가복음의 수신자들 역시 히브리서의 수신자들과 비슷한 시대를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늦어지고, 자신들에 대한 박해가 계속될 때, 그들은 그만 낙담해버리고 맙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누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찾아서 들려줍니다.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 눅 12:32-33a
'뜻을 찾는 삶', '뜻을 품은 삶'이란 보이는 세상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현상 너머의 세상에 도달하기 위해 온몸으로 고투하고, 맞서면서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 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서 바로 직전에 있는 말씀을 보면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눅 12:31)시며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하고 온통 세속적인 염려로 삶을 채워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되돌려놓기 위해 애 쓰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소개됩니다.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말씀은 '그 나라를 향해 돌아서라'는 말씀이고, 동시에 '그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 나라 백성으로 사는 삶이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 눅 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라'는 말씀은 '소유를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소유를 전용(轉用)하라'는 뜻입니다. 관심의 초점을 영적인 것에로 옮겨놓으면, 물질은 자연히 흘러갈 곳으로 흘러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영적인 것에로 옮겨 가면 재물은 자연히 그 나라를 일구는데 쓰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삶은 일반적인 의미의 선행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내가 돌아가야 할 본향(本鄕)이라고 생각한 사람만이, 이 땅에서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뜻에 자기 마음을 묻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살아내야 할 아름답고 착한 삶은 믿음의 열매이고 믿음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오늘은 남북평화통일 기도주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은 한반도 평화가 가져다주는 정치, 경제, 사회적 이익 때문이 아닙니다. '평화'가 곧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명령하신 그리스도인이 살아내야 할 삶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교회 밖에서도 마찬가지이고, 한반도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를 몸으로 살아내는 것에 우리 모두의 그리스도인 된 정체성이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 5:9 공동번역) 교회의 거룩성은 어떻게 유지되는 것입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그래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주님의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지난 70여 년 동안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삶을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씀을 붙들고, 말씀의 힘으로 현상 너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앗수르에 의해 나라가 삼키어질 위기가 닥쳐올 때, 그 어떤 다른 말보다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사 10:10a)라고 말하고,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사 10:10b) 라고 그토록 간절하게 당부한 것입니다.유대계 이탈리아 작가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후 여러 작품을 발표한 '프리모 레비((Primo Levi)'가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할 것,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과 다른 생각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뜻'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뜻을 가슴에 품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품으면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뜻이 없으면 그리스도인 아닙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뜻인 평화를 가슴에 담고, 하나님의 아들딸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하나님의 나라를 깨닫지도 품지도 못하고 살아가지 않는가?
② 하나님의 나라에 뜻을 두고 그에 걸맞은 삶을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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