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5주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암 7:7-17
7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8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 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9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파괴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하시니라 10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11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12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13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 14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15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16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네가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지 말며 이삭의 집을 향하여 경고하지 말라 하므로 1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가운데서 창녀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측량하여 나누 어질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땅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
응송 | 시 82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서신 | 골 1:1-14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8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 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복음 | 눅 10:25-37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눅 10:33을 묵상하십시오. 강도 만나 쓰러진 사람을 발견했을 때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은 무엇이었습니까?
② 암 7:10, 13-17을 묵상하십시오. 목동이요 농부에 지나지 않는 아모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듣는 아마샤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③ 골 1:4, 5을 묵상하십시오. 복음이 골로새 사람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이런 시가 있습니다.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 수류인득성(隨流認得性), 무희역무우(無喜亦無憂)"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마음은 만 가지 경계를 따라 굴러다니나 그 굴러가는 곳마다 모두 깊고 그윽하네. 흐르는 대로 견디며 본마음을 깨달으면, 거기는 기쁨도 없고 또한 슬픔도 없으리."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만 가지 경계를 따라 구르며 꽃도 되고 새도 되며 구름도 되고 사람도 됩니다. 그렇게 흐르는 대로 견디며 중심을 잘 잡고 있으면 항상 맑고 참되고 본 된 마음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참되고 본 된 마음을 상실하는 데 있습니다. 이를테면 신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이고, 오늘 복음서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 같은 사람이겠습니다. 그들은 처음 가졌던 순수한 본마음을 잃은 사람들이고, 상실한 마음으로 만 가지 경계를 따라 굴러다니다보니 아주 안 좋은 종교인의 예(例)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처음 성직자나 성전 봉사자로 부름 받았을 때,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뜨겁고 경건했을까요?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영적 긴장감이 무디어지면서 그들은 삶속에서 성과 속의 균형을 상실해 갑니다.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라는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일상사가 다르지 않다는 뜻인데, 우리의 경제생활이나 사회생활이나 먹고 배설하는 일들이 사실은 기도요 예배이며 성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과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빛과 어둠'만큼이나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 신랄한 예를 오늘 복음서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을 통해 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눅 10:25
율법교사의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되물으십니다.(눅 10:26) 율법교사는 신 6:5절과 레 19:18절을 인용해서 대답합니다.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 눅 10:27
그의 이 대답은 매우 정확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어딘가 매우 교과서적이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실제로 유다 전승에서는 율법 안에서 이 두 계명이 여러 차례 결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맞출 수 있는 정답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께서도 "네 대답이 옳도다" 라고 그의 말이 정답임을 인정해주시면서도 그러나 바로 이어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 10:28) 라시며 정답보다 중요한 건 실천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율법교사는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눅 10:29) 라며 이번에는 이웃의 자격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두 번 째 질문에서 그의 질문의 의도를 눈치 채고 맙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눅 10:29a)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눅 10:29b) 라고 물었다는 겁니다. 당연히 구약성경의 전통에서 '이웃'은 이스라엘 동족만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 시대 즈음해서는 이웃의 개념이 종교적, 정치적, 이념적 등등으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으로 좀 더 축소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만 이웃으로 생각했고, 사두개파 사람들은 사두개파 사람들만 이웃으로 생각했고, 에세네파나 열심당원들은 그들끼리 이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협소하고 이기적인 이웃개념을 전제로 질문을 해오는 것임을 파악하신 예수님께서는 대답대신 하나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 눅 10:30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고도차가 1천 미터 이상이나 되는 경사진 길입니다. 더욱이 그 길에는 계곡과 절벽이 첩첩이 들어차 있는 광야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약탈자가 활동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한 여행자가 그 길을 걷다가 그만 심한 폭력과 약탈을 당하고 맙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거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이 비유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율법교사의 협소하고 이기적인 테두리를 부수시고 이웃의 개념을 무한히 확대시키십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친구든 적이든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든, 어떻게 만났던 서로에게 '이웃'이라는 말씀입니다. 놀랍게도 이 비유에 언급된 등장인물들의 행동은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것과 정반대로 나타납니다.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 눅 10:31-35
제사장과 레위사람은 성직자였고 성전 봉사자였기 때문에, 그들은 누구보다 '이웃 사랑'에 대해 '자기 일'로 여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율법교사가 신 6:5절과 레 19:18절을 인용해 잘 대답했듯이 그들 역시 같은 구절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사람을 목격한 그들의 행동을 이렇게 고발합니다.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눅 10:31),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눅 10:32) 그들은 순간적으로 강도가 어디선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공포감을 느꼈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제사장은 순간적으로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다"는 민수기 19:11의 말씀을 떠올렸을 지도 모릅니다. 실제 제사장이 그를 만지면 성전에서 차례로 돌아오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자격을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결국 이 비유에 등장하는 제사장은 사랑의 실천보다 종교의식 행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성전예배의식이 한 인간이 처한 고통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성전 봉사자인 레위인의 행동 역시 제사장과 같은 차원에서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 레위인은 자기 행동을 결정하기가 매우 쉬웠을 지도 모릅니다. 그는 자기보다 제사장이 앞서 그 길을 지나갔음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 제사장의 직무를 돕는 성전 봉사자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간 제사장이 이미 선례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는 양심의 부담 없이 쓰러진 사람을 지나칠 수 있었습니다.어쩌면 이 비유를 듣고 있는 율법교사는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등장시킬 사람은 분명 착한 사람일 것이고, 그는 당연히 유대인일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 번째 등장인물은 그가 경멸하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남한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북한사람이 등장한 것이고, 백인우월주의자의 입장에서는 흑인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나쁜 사람이어야 합니다. 어쩌면 저 사람을 쓰러뜨린 강도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사마리아 사람이 쓰러진 사람을 목격하고 느낀 감정은 '불쌍하다'(눅 10:33)는 것이었습니다. 불쌍하다는 이 아름다운 감정을 소개하면서 예수님은 갑자기 비유의 속도를 줄이십니다. 그리고 그의 행동을 섬세하게 묘사해주십니다. 케네스 베일리는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에서 11세기 바그다드의 신약학자인 '이븐 알 타이이브(Ibn al-Tayyib)'가 제시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의 일곱 장면'을 소개합니다. 앞선 두 사람이 못 본 체 피해 지나간 그 사람에게 사마리아사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가갑니다. 그는 다친 사람의 상처를 싸매주고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습니다. 우리가 읽은 개역성경은 먼저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그 다음 상처를 싸매준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시리아어와 아람어 역본에서는 셈어 문법을 따라 상처를 싸매주는 행위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는 행위가 묘사된다고 합니다. 상처가 깊을 때는 먼저 상처를 싸맨 다음에 약을 부어 약이 그 싸맨 것을 통해 상처로 스며들게 할 때도 있었는데, 오늘 말씀은 그 경우에 해당한다는 겁니다. 실제 1세기에는 가끔씩 기름과 포도주를 섞어서 상처를 치료하는 약을 만들기도 했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마리아 사람이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것, 즉 기름과 포도주, 헝겊과 짐승을 동원해서 쓰러져있는 사람을 보살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사마리아인은 다친 사람을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줍니다. '이븐 알 타이이브'는 이때 사마리아인이 다친 사람을 데리고 간 곳이 '여리고'였다고 콕 집어 이야기 합니다. 사실 사마리아인이 다친 유대인을 자기 짐승에 태우고 유대인 동네에 들어가는 행위는 매우 위험했다고 합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사마리아 사람을 오해해서 그에게 복수할 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친 사람에 대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희생을 다합니다. 그런 까닭에 오리게네스나 암브로시우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분들은 "이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를 상징하고 있다"고 단언하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단지 선행이 아닌 우리를 구원하시려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 나오는 강도 만난 사람은 사실은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자신'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늘 복음서의 비유는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그런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드러난 예수님 대답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묻지 말고 "나는 과연 이웃이 되어주었는가?"를 먼저 성찰하라는 겁니다. 누가 강도질 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습니까?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닌 사마리아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죄와 사망에게 사로잡혀 쓰러진 나의 이웃이 되어주었습니까? 사마리아 사람이 표상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구원해주셨고 치유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기막힌 은혜를 받은 까닭에 주님의 다음 말씀을 들어야만 합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 눅 10:37
사마리아인처럼 하라는 말씀인데, 복음의 관점에서 다시 이해하면 사마리아 사람이 표상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사람의 마음이란 게 만 가지 경계를 따라 흐르며 꽃도 되고 새도 되며 구름도 되고 사람도 되지만, 그렇게 흐르는 중에도 가장 중요한 참되고 본 된 마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곳에 하나님 계시듯, 나의 모든 일상의 삶 중에도 예수님이 항상 내 마음에 계시게 하는 것입니다. 나의 경제생활이나 사회생활이나 먹고 배설하는 일들이 사실은 기도요 예배이며 성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주전 8세기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때의 시대적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빈부격차 즉 소득의 불균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변 강대국들과의 역학관계 속에서 소수의 사람은 사치를 즐기는 반면 다수의 민중들의 삶은 나날이 피폐해져 갔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 선지자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베델의 제사장인 '아마샤'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시대가 그토록 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선지자도 똑같이 타락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음이 만 가지 경계를 따라 흐를 때, 마음을 본능이 흐르는 대로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북이스라엘의 귀족이 되어 재물이나 탐하고, 때로는 이간을 벌이는 천상속물이요 간신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은 그를 더 사용할 수 없으셔서 뽕나무를 배양하는 아모스를 불러 타락한 시대의 선지자로 세우십니다. 아모스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예언합니다.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파괴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 암 7:7-9
아모스 선지자의 이 예언이 비수처럼 아마샤의 심장을 찌를 때, 그는 왕과 아보스의 사이를 이간(離間)합니다. 왕에게는 "아모스가 왕을 모반한다"(암 7:10-11)고 말하고, 아모스를 향해서는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해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암 7:12-13)고 협박합니다. 얼마나 시대가 썩어있고, 선지자들이 떡이나 밝히는 시대였으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도 아니고,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고, 양을 치며 뽕나무를 배양하는 아모스를 들어 왕과 선지자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겠습니까? 오늘 성서일과가 우리에게 묻는 것은 지금 너는 어떠한 상태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제사장이요!", "내가 레위인이요!", "내가 선지자요!" 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관심이 없으십니다.중요한 것은 현재 네 마음의 흐름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율법에 정통했던 율법교사는 예수를 시험하는데 자기 마음을 흘려보냅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 주머니를 허비해 사람을 구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제사장인 아마샤는 자기 지위를 이용해 사람을 이간하고 협박합니다. 그러나 양치는 목동이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농부인 아모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거리로 나섭니다. 이 차이는 무슨 차이일까요? 인품의 차이가 아니라 영성의 차이입니다. 그 마음의 중심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느냐, 세상을 향하고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은 겉만 번지르르한 신앙인일까요? 아니면 사마리아인처럼 내면이 예수님 닮은 사람일까요? 아마샤처럼 겉만 번지르한 사람일까요? 아모스처럼 속이 꽉 찬 신앙인일까요?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이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너희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골 1:3)고 말합니다. 골로새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어땠기에 바울이 그토록 감사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 골 1:4, 5
더 중요한 건 그 다음 말씀입니다.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 골 1:6
그들은 복음을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복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에서 그치지 않고 온 천하에 열매 맺어 자라는 성도들이 되었습니다. 공자는 논어 17편에서 "향원(鄕原)은 덕지적야(德之賊也)니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향원(鄕原)이란 마을에서 점잖고 바르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류(時流)에 영합하고 여론에 따라 줏대 없이 흔들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덕을 해치는'진짜 같은 가짜'를 말하는 겁니다. 우리는 향원(鄕原)이 되면 안 됩니다. 비록 겉은 거칠고 투박할 지라도 그러나 내면은 하나님을 향해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 같은 우리, 아모스 선지자 같은 우리, 골로새교회 성도들 같은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직위에 부끄럽게 실상은 죽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② 직위나 직분에 상관없이 신앙과 삶이 일치를 이루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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