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2주 사람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시선
■ 읽기 | Lectio
구약 | 왕상 19:1-14
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 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 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 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응송 | 시 42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서신 | 갈 3:23-29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복음 | 눅 8:26-39
26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 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 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 마침 그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34 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 35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 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3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 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 묵 상 | meditatio
① 왕상 19:4-7을 묵상하십시오. 정신적 외상을 입고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하는 엘리야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이었습니까?
② 눅 8:30을 묵상하십시오. 귀신 들려 무덤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름을 물어주시는 예수님을 보며 무엇을 느낍니까?
③ 갈 3:27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묵상 나눔
사람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시선
지난 6월 20일은 '세계 난민의 날'이었습니다. 1969년 아프리카 통일기구에서 맺은 난민협약이 2000년 UN 총회에서 특별 결의안으로 채택돼서 해마다 6월20일을 세계 난민의 날로 기념하고 있는데, 난민보호라는 국제사회의 책임을 전 세계가 공유하고, 난민의 어려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그것이 '세계 난민의 날' 제정의 목적입니다. 지난해 이맘때쯤 제주도에 예멘 난민 5백 명 정도가 입국했었습니다. 예멘 내전을 피해 모국을 탈출해서 여기저기 떠돌다 제주까지 왔었는데, 이때 사회적으로 격렬한 찬반논쟁이 있었고, 이 논쟁은 찬반집회로 치닫기까지 했습니다. 지난 20일 '세계 난민의 날'을 맞아서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배우 정우성씨가 '내가 본 것을 당신도 볼 수 있다면'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습니다. 2014년부터 매해 해외 난민촌을 찾아 만난 이들의 이야기와 난민 문제에 대한 생각을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그 책에서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난민을 만나며 한 가지 확인한 게 있다면, 그들 누구도 스스로 난민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 원하지도 않던 난민이 되었다" 그런 정우성씨가 지난 20일 CBS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과거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 임시정부도 난민정부였고. 한국전쟁 때 발생한 국내 실향민들도 모두 난민이었고, 그때 UN한국재건기구에서 한국의 재건을 도왔다" 라며, 한때 우리도 난민이었음을 주지시켜주기도 했습니다. 난민을 바라보는 시각차는 지금도 우리들 가슴속에 존재하는 듯한데, 난민들의 범죄율이 높다든지, 난민들로 인해 무슬림국가가 될 것이라든지 등등 무분별한 가짜뉴스들에 마음 선동되지 말고, 우리도 한때 난민이었음을 마음에 기억하며 좀 더 지혜롭고 냉철했으면 좋겠습니다.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도 우리에게 한때 난민이었던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아합왕과 왕비 이세벨의 살해위협을 피해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 길에 오른(왕상 19:3) 엘리야의 모습을 보여주고, 복음서의 말씀에서는 사람들에게서 격리돼 무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는(눅 8:27) 귀신들린 한 사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각각의 말씀을 통해서 이들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심정과 맞닥뜨리게 되는데, 사도 바울은 서신서의 말씀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라고 단언함으로서 우리가 부딪히는 모든 사회적 상황에서 우리들 심정도 주님과 같아야 함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BC 872-850년까지 22년 동안 북 왕국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오므리 왕의 아들 아합 왕 때 있었던 선지자 엘리야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서 저자는 아합 왕에 대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겼다"(왕상 16:30-31)고 평가하고, 그가 범한 죄악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는 그의 아내 이세벨과 함께 바알과 아세라 신을 숭배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아합 왕과 그의 이방인 아내인 이세벨은 당시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를 비롯해 여러 도시에 바알 신전과 아세라 목상을 짓고 백성들에게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바로 이 어두운 시기에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목격되는 엘리야의 모습은 왕과 왕비의 살해의 위협을 받고 도망치는 흡사 난민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왜 그토록 집요하게 엘리야를 죽이려 한 것일까요? 왕상 17:1에 보면 그가 아합 왕을 찾아가서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고 경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이 간결한 예언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명확하게 소개하는데, 아합과 이세벨의 입장에서 엘리야의 이 발언은 바알을 농경의 신으로 믿고 예배하던 자신들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있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로 하여금 그릿 시냇가로 도망가 거기 숨어 지내게 하시고(왕상 17:3), 다시 시돈에 속한 사르밧이란 동네에 가서 한 가난한 과부의 도움을 받게 하십니다.(왕상 17:9-16)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전개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는 수 년 동안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에 살게 하시면서 그릿 시냇물을 마시게 하시고, 또 까마귀들을 통해 먹을 것을 제공해 주시는 돌봄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심지어 사르밧 과부의 도움을 받게 하신 이후로는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왕상 17:14) 그대로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는'(왕상 17:16) 놀라운 은총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또 보내십니다. 이번에는 여호와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 18:21) 라며 백성들에게 결단을 촉구하게 하시고, 450명 바알 선지자와 대결을 벌여 승리한 후에 바알 숭배자들을 기손 강가로 끌고 가서 죽이고 여호와 신앙을 회복시키게 하십니다.(왕상 18:22-40) 그러고 나서 오늘 구약의 말씀이 이어지는데, 역시 상황은 엘리야가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갈멜산 위에서 엘리야와 450명 바알 숭배자들의 대결이 있은 후에 아합 왕이 궁으로 돌아옵니다. 기다리고 있던 이세벨을 보자마자 아합은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바알 선지자를 칼로 죽인 일을 설명해 줍니다.(왕상 19:1)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목격한 아합 왕의 입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진정한 신(神)이심을 이세벨에게 전할 수 있는 극적인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신앙고백을 할 만큼 아직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갈멜산 제단에 불을 내리신 일보다, 엘리야가 바알 제사장들을 죽인 일을 더 부각시켜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상황전개를 보십시오.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 왕상 19:2
엘리야는 또 다시 지긋지긋한 도망자의 길에 오르게 됩니다. 비록 지난 번 그릿 시냇가에 몸을 숨기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가뭄 속에서 시냇물을 마시게 하시고, 까마귀와 과부를 통해 자신을 먹이신 것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도망자의 신분이란 것이 얼마나 피곤한 것입니까? 더구나 갈멜산에서의 영적 승리로 인해 왕으로부터 시작해 온 나라의 백성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을 기대했던 엘리야로서는 그러한 상황전개가 못내 실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가슴이 좁아지고 만 그는, 어느 순간부터 두려움을 느끼고 자기 목숨을 살리는 것에 더 관심을 두는 태도를 취합니다.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 왕상 19:3a
'그가 이 형편을 보고' 라는 설명에서 우리는 '하나님'보다 '형편'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엘리야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 '보고'라는 히브리어 단어 '라아(האר)' 역시 '두려워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볼 때, 그는 하나님보다 형편을 먼저 살핀 까닭에 이내 두려운 심정에 빠져들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건 '형편의 문제'라기 보다는 '내면의 문제'이고 '믿음'의 문제였을 것입니다. 갈멜산에서의 한 번의 승리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었던 내면의 빈곤함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며 도망 길에 오른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로부터 가능한 멀리 피해 남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로 내려갑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의 가장 남쪽에 있는 브엘세바는 엘리야가 몸을 피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그의 영적 갈급함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조상 아브라함이 에셀나무를 심고,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곳이고(창 21:33),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지를 순례할 때, 자주 찾는 곳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암 5:5, 8:14)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 왕상 19:3b
우리는 엘리야의 이 모습을 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그가 혼자 있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절망한 사람들이 보이는 공통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자신의 무너진 믿음을 회복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는 갈멜산에서의 영적 승리를 경험했으면서도 목숨의 위협 앞에서 너무 쉽게 영적으로 무너져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혼자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엘리야가 브엘세바로 갈 때, 그를 돕기 위해 같이 간 사환은 엘리야가 다시 살려 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엘리야는 그 사환을 두고 홀로 광야로 하룻길쯤 더 들어갑니다. 그리고 한 로뎀 나무 아래 앉아 가슴에 맺힌 한 마디를 합니다.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 왕상 19:4b
580년-650년에 시내산 아래 있는 성 까떼리나 수도원의 원장을 지낸 '클리막스'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요한'이 '낙원의 사다리'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어린아이가 더듬으며 하는 단조로운 말도 아버지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그대의 영이 무슨 말을 할까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되도록 긴 말은 삼가라. 세리의 한 마디 말이 하나님의 자비심을 불러일으킨다." 지금 엘리야의 기도가 그런 기도였습니다. 엘리야의 한 마디 기도에서 지금의 그의 심정이 그대로 배어나옵니다. 그렇게 짧지만 눈물이 가득 배인 기도를 마치고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잠이 듭니다.(왕상 19:5) 훗날에 야고보는 엘리야의 이런 모습 때문에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이 모습에서 우리는 공감과 위로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보이신 반응은 천사를 보내 어루만져주시는 것이었습니다.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 왕상 19:5
일어나보니까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먹고 마시고 다시 눕습니다.(왕상 19:6) 천사는 기다려줍니다. 그리고 다시 와서 어루만져줍니다.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 왕상 19:7
이렇게 어루만져 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다독여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낙심한 자리에서 일어나 '네가 갈 길' 즉 '우리가 갈 길'을 모두 걸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길은 어떤 길일까요? '엘리야가 갈 길'은 호렙산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그가 처음에 걸었던 '자기 생명을 위해 도망간 길'과 다른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길이었고, 자신을 다시 만나는 길이었습니다. 엘리야가 힘을 내서 그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 왕상 19:8
엘리야가 마침내 일어나 힘을 내서 호렙산을 향해 갑니다. 그가 걸은 사십 주 사십 야는 그의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자기 발견의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질문이 시작됩니다.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 왕상 19:9
이 하나님의 질문에서 가장 핵심은 '여기(here)'일 것입니다. 하나은 엘리야 자신이 '지금', '여기' 호렙산에 있는 이유를 물으심으로서 엘리야 자신의 영적 상태를 느끼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여기 앉아 계십니까? 우리 모두는 항상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서 있는 모든 때, 모든 장소에서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의 대답에서 그의 내심(內心)이 드러납니다.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과 맺은 계약을 저버리는 것을 보고 만군의 하나님 야훼를 생각하여 가슴에 불이 붙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당신의 제단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이제 예언자라고는 저 하나 남았는데 그들이 저마저 죽이려고 찾고 있습니다 | 왕상 19:10 (공동번역)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 가슴에 불이 붙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제단을 허물어버리고 선지자들을 칼로 죽였는데, 이제는 자신까지 죽이려고 찾고 있습니다. 그의 하나님 의심은 거기에서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침묵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때의 하나님의 처방이 그렇게 감동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왕상 19:11a) 그리고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 왕상 19:11b-12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경험했던 처음 경험대로 당신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모세에게 자신을 드러내실 때처럼 우레와 번개와 바람과 불(출 19:16-19)로 당신을 드러내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세미한 소리'로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정말 우리를 변화시키는 건 지진이나 번개나 불같은 외적으로 보여주는 '하나님의 임재 현상'이 아닙니다. 세미한 소리로 우리 마음을 향해 말씀하시는 이 말씀에 의해서 우리 마음은 돌이켜집니다. 어쩌면 엘리야는 불이나 지진 같은 '현상'이 아닌 귓가에 속삭이듯 들리는 '주님의 세미한 말씀'에 더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가 경외감 속에서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을 때, 여호와께서 다시 엘리야에게 물으십니다.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 왕상 19:13b
이 동일한 질문은 엘리야에게 무엇을 묻고 계신 걸까요? 하나님은 단지 위로로만 엘리야를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궁극적인 질문 앞에 세우심으로서, 그가 자기가 '지금', '여기' 있는 이유를 성찰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지금 우리를 바라보시는 심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감정이나 다독이는 위로나 격려로 우리를 대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은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영적 감수성으로 보게 해서, 드러난 현상에 반응하며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며 살아가는 존재로 세우시려는 의지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떠밀려온 난민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대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과 같은 심정을 가져야만 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그러셨듯이 그들에게도 세미한 음성으로 물으실 것입니다. 그 물으심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들의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예비하심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가셨을 때,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를 보셨습니다. 그는 '그 도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난민과 다름없는 처지에 놓여있었습니다. 누가는 그 사람이 놓여있던 처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 눅 8:27
누가 그 사람에게 말 한 번 걸어주었겠습니까? 누가 그 사람을 이웃으로 생각해주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물어주십니다.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 즉 | 눅 8:30
불행하게도 그는 자기 이름을 '군대'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이미 자기를 잃은 채 귀신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그리고 단언컨대 이건 남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채 세상이 강요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우리 이름을 불러주셨기에, 우리는 그나마 주님께로 와서 그 분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처럼 말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름을 불러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 갈 3:27
우리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입니다. 그런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름없이 살고 만다면 무엇으로 우리 믿음을 주님께 보여드릴 것입니까? '믿음이 오기 전에는'(갈 3:23)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온 후로는'(갈 3:25) 아무렇게 살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낙심한 엘리야를 어루만지시듯, 세미한 음성으로 그의 마음에 말씀해주시듯, 귀신에게 정복되어 무덤에서 살아가는 사람,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그 한 존재의 이름을 예수님께서 물어주시듯, 우리는 내 곁에 온 사람을 어루만지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함께 나누고, 함께 서로의 이름을 사랑스럽게 불러주며 따뜻하고 향기로운 삶을 가꾸어가야 할 것입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형제를 내 마음으로부터 격리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② 형제의 이름을 불러주며 마음을 헤아려 주고 있는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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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6주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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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1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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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5주 나를 넘어 하나님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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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11.10 |
410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4주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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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11.02 |
409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3주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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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10.26 |
408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2주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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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10.19 |
407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1주 하나님만이 오직 최선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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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10.12 |
406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0주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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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10.05 |
405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8주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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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21 |
404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7주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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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14 |
403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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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7 |
40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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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1 |
40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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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