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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제6주 참으로 부활 신앙으로 산다는 것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05-26 10:21
조회
1239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신약 | 행 16:9-10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응송 | 시 67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서신 | 계 22:3-5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복음 | 요 14:23-26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14:23, 26을 묵상하십시오.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힘으로 예수님은 무엇과 무엇을 말슴하셨습니까?
② 행 16:9-10을 묵상하십시오. 밤에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 은 바울의 마음의 변화를 누가는 뭐라고 설명했습니까?
③ 계 22:3-5을 묵상하십시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어진 이유를 요한은 뭐라고 소개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먼저 복음서의 말씀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이제부터 당신이 없이 살아가야 할 제자들에게 당부와 격려 그리고 약속을 남기시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요 14:23a) 라시며, 당신께서 부재한 세상에서도 여전히 제자들의 삶의 양식은 '당신 말씀'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의 말씀을 지킬 때, 주님은 두 가지 상급을 약속하십니다. 첫째는,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겠다(요 14:23b)는 것입니다. 문제는 제자들이 말씀을 지키며 살아갈 능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위해 주님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요 14:26) 사도행전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에 순종해서 살아가는 삶'이 어떠한 삶인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것은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생각이 부딪힐 때, 자기 뜻을 접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사도 바울이 자기 뜻과 다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던 당시 자세를 "인정함이러라"(행 16:10) 라는 한 마디로 표현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인정'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궁극적인 깨달음이었고, 그 깨달음은 '성령의 개입'에 의해 가능했습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요한은 천상에 오르지만, 그러나 '성전(聖殿)'을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어린양이 바로 성전이셨기 때문입니다.(계 21:22) 성령의 은총으로 '말씀에 순종한' 자녀는 성전이신 삼위일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 거룩한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13장에서 17장까지 이어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시는 상황을 다루는 '고별설교' 안에 속해 있습니다. 이 고별설교 안에 전제된 주님의 떠나심으로 인해 제자들 안에는 근심과 불안이 무겁게 드리워 있었는데, 오늘 복음서 역시 불안해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제자들의 불안함을 믿음으로 바꾸어주시려는 주님의 모습이 애가 타게 교차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가장 불안하게 생각한 것은 예수님께서 자꾸만 어디론가 간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 앞에 있는 2절에서도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4절에서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인해 마음이 불편했던 도마는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요 14:5)라고 되물었고, 빌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라고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이 마음의 근심을 알고 계신 주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 14:1a)시며 그럴 수 있도록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요 14b:1)고 당부하셨습니다. 도마에게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시며, 다른 어느 길이 아닌 '예수의 길'을 걸으라고 당부하셨고, 빌립에게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요 14:9)이라며 그의 시선이 헤매지 않고 당신께로 향하도록 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심'을 거듭 거듭 말씀하심으로서(요 14:10, 11) 당신과 하나님이 일체임을 분명히 하셨고, 당신께서 하시는 일이 곧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며(요 14:10b-11), 당신을 믿는 자는 그 또한 아버지의 일을 해낼 수 있음도 말씀하셨습니다.(요 14:12) 그러나 여전히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상황이 당황스러웠고, 불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오늘 복음서의 말씀이 이어지는데, 주님께서는 '말씀'과 '보혜사 성령' 이 두 가지를 제자들이 불안을 극복할 키워드로 제시하십니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Evagrius Ponticus)는 '성 잘 내는 사악한 충동'이 순수한 기도에 가장 장애가 된다고 보고, 이 충동과 대적해 싸울 때의 정확한 반론 방법을 '말씀'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싸움의 순간에 기만하는 악령인 우리 적에게 대응할 적합한 말을 쉽게 찾지 못한다. 그 말들은 성경 안에 흩어져 있고, 그것들을 개별화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서 그러한 말들을 뽑았는데, 이는 우리 승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용감한 전사이자 투사로서 전투에서 그것들로 무장하며 용맹스럽게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맞서나가기 위해서다." 그래서 에바그리우스는 사람 안에 똬리 튼 악한 생각들 즉 탐식, 음욕, 탐욕, 슬픔, 분노, 아케디아, 헛된 영광, 교만 등에 맞서기 위해 그 악한 생각들에 맞설 성경말씀을 뽑아 읽고 묵상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존 웨슬리(John Wesley)는 신학자가 아닌 영혼을 돌보는 목회자로 인식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말할 때,' 신학(theology)'이라는 용어보다 '디비니티(divinity)'라는 용어를 더 선호했습니다. '디비니티(divinity)'의 옥스퍼드 사전적 정의는 '하나님처럼 거룩한 이가 된 상태'입니다. '신학(神學)'이 하나님에 대한 이성적 설명에더 주안점을 두고 있다면, '디비니티'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져 가는 인간의 변형 과정에 주된 관심을 두었습니다. 웨슬리가 이 '디비니티'를 이루기 위해 가장 주안점을 기울인 것이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성경은 웨슬리 자신의 거룩함을 이루게 하는 내적 힘이었고, 그래서 그는 성경을 '자신의 목회의 원천'으로 삼았습니다. 웨슬리에게 성경은 전체가 '하나의 몸'처럼 함께 '거룩한 진리'의 길을 드러내며 '모자람이나 넘침이 없는' 완벽한 '하나님의 지혜'를 담고 있는 참으로 고귀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 증거는 주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에바그리우스처럼, 존 웨슬리처럼 말씀을 내 거룩함과 지혜의 원천으로 삼아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을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주님을 향한 사랑도 말씀에 대한 순종도 없는 삶이지 않은가?
② 말씀과 보혜사 성령의 은총 안에서 주님 뜻을 이루고 있는가?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신약 | 행 16:9-10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응송 | 시 67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서신 | 계 22:3-5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복음 | 요 14:23-26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14:23, 26을 묵상하십시오.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힘으로 예수님은 무엇과 무엇을 말슴하셨습니까?
② 행 16:9-10을 묵상하십시오. 밤에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 은 바울의 마음의 변화를 누가는 뭐라고 설명했습니까?
③ 계 22:3-5을 묵상하십시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어진 이유를 요한은 뭐라고 소개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참으로 부활 신앙으로 산다는 것
오늘은 부활절 여섯 번째 주일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은 '주님 승천주일'을 한 주 앞둔 오늘 '부활절 제6주'를 '부활절'과 똑같이 지내왔었습니다. 그 이유는 부활절 기간의 여섯 주일을 모두 부활주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실제 동방교회 전통에서는 부활절 기간만이 아닌, 모든 주일을 부활 기념일로 여겨 '작은 부활절'로 지키고 있기도 합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는 '주님 승천주일'을 한 주 앞두고, 부활절 신앙의 절정적인 메시지를 듣게 되는데, 오늘 성서일과는 일제히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참으로 부활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씀합니다.먼저 복음서의 말씀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이제부터 당신이 없이 살아가야 할 제자들에게 당부와 격려 그리고 약속을 남기시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요 14:23a) 라시며, 당신께서 부재한 세상에서도 여전히 제자들의 삶의 양식은 '당신 말씀'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의 말씀을 지킬 때, 주님은 두 가지 상급을 약속하십니다. 첫째는,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겠다(요 14:23b)는 것입니다. 문제는 제자들이 말씀을 지키며 살아갈 능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위해 주님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요 14:26) 사도행전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에 순종해서 살아가는 삶'이 어떠한 삶인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것은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생각이 부딪힐 때, 자기 뜻을 접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사도 바울이 자기 뜻과 다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던 당시 자세를 "인정함이러라"(행 16:10) 라는 한 마디로 표현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인정'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궁극적인 깨달음이었고, 그 깨달음은 '성령의 개입'에 의해 가능했습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요한은 천상에 오르지만, 그러나 '성전(聖殿)'을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어린양이 바로 성전이셨기 때문입니다.(계 21:22) 성령의 은총으로 '말씀에 순종한' 자녀는 성전이신 삼위일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 거룩한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13장에서 17장까지 이어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시는 상황을 다루는 '고별설교' 안에 속해 있습니다. 이 고별설교 안에 전제된 주님의 떠나심으로 인해 제자들 안에는 근심과 불안이 무겁게 드리워 있었는데, 오늘 복음서 역시 불안해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제자들의 불안함을 믿음으로 바꾸어주시려는 주님의 모습이 애가 타게 교차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가장 불안하게 생각한 것은 예수님께서 자꾸만 어디론가 간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 앞에 있는 2절에서도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4절에서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인해 마음이 불편했던 도마는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요 14:5)라고 되물었고, 빌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라고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이 마음의 근심을 알고 계신 주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 14:1a)시며 그럴 수 있도록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요 14b:1)고 당부하셨습니다. 도마에게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시며, 다른 어느 길이 아닌 '예수의 길'을 걸으라고 당부하셨고, 빌립에게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요 14:9)이라며 그의 시선이 헤매지 않고 당신께로 향하도록 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심'을 거듭 거듭 말씀하심으로서(요 14:10, 11) 당신과 하나님이 일체임을 분명히 하셨고, 당신께서 하시는 일이 곧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며(요 14:10b-11), 당신을 믿는 자는 그 또한 아버지의 일을 해낼 수 있음도 말씀하셨습니다.(요 14:12) 그러나 여전히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상황이 당황스러웠고, 불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오늘 복음서의 말씀이 이어지는데, 주님께서는 '말씀'과 '보혜사 성령' 이 두 가지를 제자들이 불안을 극복할 키워드로 제시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 요 14:23-24
이 말씀에서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기준을 '당신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에서 찾으십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이 문장을 직역하면 "사람이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 나를 사랑하면"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행위가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사랑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면,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 말씀을 지킵니다. 반대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주님의 말씀 역시 지키지 않습니다.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Evagrius Ponticus)는 '성 잘 내는 사악한 충동'이 순수한 기도에 가장 장애가 된다고 보고, 이 충동과 대적해 싸울 때의 정확한 반론 방법을 '말씀'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싸움의 순간에 기만하는 악령인 우리 적에게 대응할 적합한 말을 쉽게 찾지 못한다. 그 말들은 성경 안에 흩어져 있고, 그것들을 개별화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서 그러한 말들을 뽑았는데, 이는 우리 승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용감한 전사이자 투사로서 전투에서 그것들로 무장하며 용맹스럽게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맞서나가기 위해서다." 그래서 에바그리우스는 사람 안에 똬리 튼 악한 생각들 즉 탐식, 음욕, 탐욕, 슬픔, 분노, 아케디아, 헛된 영광, 교만 등에 맞서기 위해 그 악한 생각들에 맞설 성경말씀을 뽑아 읽고 묵상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존 웨슬리(John Wesley)는 신학자가 아닌 영혼을 돌보는 목회자로 인식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말할 때,' 신학(theology)'이라는 용어보다 '디비니티(divinity)'라는 용어를 더 선호했습니다. '디비니티(divinity)'의 옥스퍼드 사전적 정의는 '하나님처럼 거룩한 이가 된 상태'입니다. '신학(神學)'이 하나님에 대한 이성적 설명에더 주안점을 두고 있다면, '디비니티'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져 가는 인간의 변형 과정에 주된 관심을 두었습니다. 웨슬리가 이 '디비니티'를 이루기 위해 가장 주안점을 기울인 것이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성경은 웨슬리 자신의 거룩함을 이루게 하는 내적 힘이었고, 그래서 그는 성경을 '자신의 목회의 원천'으로 삼았습니다. 웨슬리에게 성경은 전체가 '하나의 몸'처럼 함께 '거룩한 진리'의 길을 드러내며 '모자람이나 넘침이 없는' 완벽한 '하나님의 지혜'를 담고 있는 참으로 고귀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 증거는 주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에바그리우스처럼, 존 웨슬리처럼 말씀을 내 거룩함과 지혜의 원천으로 삼아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을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그리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내 아버지와 나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 | 요 14:23b 표준새번역
이때 비로소 하나님과 나와의 신령한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이 불안을 극복할 수 있도록 제시하신 또 하나의 키워드는 '보혜사 성령'입니다.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 요 14:25-26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은 분명, 제자들의 주님 사랑을 보여주는 외적 표증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께서 제자들과 계속 함께 계실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라는 말씀이 그러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제 곧 제자들 곁을 떠나실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후로는 제자들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주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는데, 어떻게 주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당신이 떠나신 자리를 보혜사 성령께서 채우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은 여기서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에 앞서 16-18절에서도 보혜사 성령에 대해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주님께서 떠나심으로 부재하신 자리를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께서 채우신다는 것, 이것은 신약성경의 가장 위대한 약속입니다. 성령께서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그들에게로 와 주님의 빈자리를 채워주심으로서 제자들은 더 이상 슬픔에 싸여있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분의 역할은 막연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을 위해 변호해 주실 뿐만 아니라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그 사실을 주님은 오늘 말씀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십니다.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여기에서 드러나는 성령의 사역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가르치시는 사역'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깊은 마음까지 통달하고 계심으로 내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생각나게 하는 사역'입니다. 복음서 전체를 볼 때 제자들은 주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해조차 잘하지 못한 제자들이 주님 말씀을 기억하고 있을 리 없습니다. 주님 말씀을 이해도 기억도 못한 제자들이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주님 말씀을 전하거나 가르칠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문제 때문에 성령께서는 반드시 강림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분께서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나게 하리라"의 희랍어 '휘포밈네스코(ὑπομιμνῄσκω)'는 어떤 사람에게 어떤 사실을 기억나게 한다는 의미이지만, 오늘 말씀에서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사용이 되었습니다. 즉 보혜사 성령께서는 단순히 잊어버린 제자들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해 망각상태에 있던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력 있게 이해하도록 하심과 동시에 더욱 분명하게 기억하도록 돕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해 제자들은 생명 넘치는 말씀을 소유할 수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오류 없이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오늘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시리아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3차에 걸쳐 전도여행을 감당했습니다. 1차 전도여행은 바나바와 함께 잘 마쳤습니다. 그런데 2차 전도여행을 떠나려 할 때 문제가 생기고 맙니다. 마가 요한의 처리 문제였습니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갈라섰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각각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그것이 2차 전도여행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어려운 상황이 발생합니다.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 행 16:6
그래서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역으로 갔습니다. 무시아 앞에서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지만, 누가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 행 16:7
하나님의 뜻일 거라는 확신을 갖고서 시작한 일이 성령에 의해 훼방을 받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런 갈등 속에서 그가 당도한 곳이 바로 '드로아 항구'였습니다. '드로아'는 소아시아 대륙의 맨 끝에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바울은 이 육지의 끝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우리는 바울의 이 모습을 성찰하면서 아무리 좋은 동기로 시작한 일일지라도 그러나 때때로는 그 일이 하나님의 뜻과 무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는 더베로 또 루스드라로 여러 성을 돌며 자기 계획대로 빡빡한 일정을 소화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는 사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일 중심적인 사람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자기중심적인 열심히 인해 얼마 전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기도 했었습니다. 그가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2차 전도여행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기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앉아 성령의 현존하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이 간과되었을 때 심지어 바울조차 예수의 영에 의해 가로막히는 것을 봅니다. 존 웨슬리는 '경건의 외양'만 갖춘 집단이 아닌 '경건의 능력'을 갖춘 믿음의 공동체가 되려면 '말씀'과 함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 '영(靈, spirit)'을 꽉 붙들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오늘날 영국감리교회에서 사용되는 '예배서(The Methodist Worship Book)'에는 여러 종류의 성찬식이 언급되어 있는데, 모든 성찬식 가운데 '성령의 임재'에 대한 항목에 빠지지 않고 언급되어 있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당신의 영을 부으소서. 그럼으로써 이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옵나이다." 웨슬리에 의해 만들어진 이 '성령의 임재'에 대한 기도문은 "교회의 모든 은총의 수단들, 즉 성경적 진리(doctrine)에 기반을 둔 설교나 성례전 등은 반드시 성령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웨슬리의 입장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 성령님의 사역은 우리와 이웃 가운데서 매일매일 새롭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갈 4:6을 보십시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 어떤 완고한 마음도 성령님이 그 마음 가운데 찾아오시면 굳게 닫았던 마음을 열게 됩니다. 이 성령님의 존재를 우리가 이해한다면 우리는 성령님께 비로소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그 순종을 봅니다. 성령님과 바울 사이의 갈등 그 인격적인 부딪침이 어떻게 전개됩니까? 앞이 보이질 않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 막다른 항구 드로아에 서 있던 바울이 환상을 하나 보게 됩니다.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 행 16:9
우리는 이 환상 앞에서의 바울의 처신을 주목해야 됩니다. 바울은 이 때 비로소 성령님의 생각을 알게 됩니다. 성령님의 생각은 바울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바울은 소아시아를 생각했지만 성령님은 유럽을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바울의 변화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일러라 | 행16:10
보혜사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계획을 포기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바울은 얼마나 신실한 사도입니까? 우리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이성을 비우고 성령님의 생각에 마음을 맡길 때, 우리는 비로소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연대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 마침내 우리 안에 이루어질 황홀한 세계를 사도 요한은 이렇게 그려줍니다.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 계 22:3b-5
일찍이 이 이상을 맛보았던 시인은 시 67:1, 2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시 67:1, 2)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 말씀'을 지킴으로,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오심으로, 요한이 펼쳐 보이는 이 황홀하고도 아름다운 나라가 여러분의 마음 안에, 그리고 여러분의 삶 속에 화사하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주님을 향한 사랑도 말씀에 대한 순종도 없는 삶이지 않은가?
② 말씀과 보혜사 성령의 은총 안에서 주님 뜻을 이루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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