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부활절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신약 | 행 10:34-43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37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 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2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43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응송 | 시 118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서신 | 고전 15:19-26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 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복음 | 눅 24:1-12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눅 24:6, 7을 묵상하십시오. 천사의 안내를 받아 여자들이 기억해야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② 고전 15:20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은 궁극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위한 부활이었습니까?
③ 행 10:43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힘입어 받게 되는 죄 사함은 마침내 우리를 어디에 이르게 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리스도의 죽음과 소생이라는 부활절 신비는 그리스도교 역사의 정 중앙에 놓여 있습니다. 고난주간을 지나며 다소 지친 성도들에게 부활절의 신비는 생명의 축제를 선포하고 마치 봄을 맞은 사람들이 꽃에 환호하듯 무덤에서 피어난 생명에 환호하게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껏 보아온 복음서의 흐름 안에서 가장 통쾌한 승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목자를 쳐서 그 양떼인 제자들을 흩어지게 했기에(슥 13:7, 막 14:27), 이제 예수의 영광은 끝이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죽음에 한편으로는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덤으로 가서 무덤을 막은 돌을 인봉하고, 경비병을 세워 무덤을 단단히 지키게 했습니다.(마 27:66) 그러나 예수의 승리는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 예수를 묻은 바로 그 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들의 부질없는 야욕을 뒤집어 놓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가 되었으며, 오늘 서신서에서의 바울의 표현을 빌자면 '모든 잠든 이들의 첫 열매'(고전 15:20)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분의 구원사역의 절정이고 결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서일과를 통해 이 부활사건의 증인들을 만납니다. 복음서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부지중에 '빈 무덤의 첫 목격자요 증인'이 되고,(요 20:1, 2) 사도행전에서 사도 베드로는 한 걸음 발전해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행 10:39)며 담담한 어조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합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더 한 걸음 나아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라고 선언하며 그의 부활을 기점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각각 자기 차례대로"(고전 15:23) 부활에 이르게 될 것임을 증언합니다.(고전 15:23, 24) 먼저 복음서의 말씀을 보겠습니다.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 눅 24:1-3
주님의 부활 이야기는 언제나 읽는 이들에게 떨칠 수 없는 긴장감을 갖게 합니다. '오심과 떠나심', '친밀감과 거리감' 그리고 '임재와 부재(不在)' 사이의 긴장입니다. 우리는 그 긴장감 속에서 무덤을 찾아간 여자들을 같은 긴장감 속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는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시간이 '안식 후 첫날 새벽'이라고 증언합니다. 간결하게 기록하는 것을 선호하는 누가의 특성상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마가의 증언에 의하면 이 여자들은 안식일이 저무는 토요일 밤에 '예수께 바르기 위해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막 16:1),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막 16:2) 그 무덤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무덤은 마태의 증언에 의하면, '돌로 막고 인봉까지 한 후 병사들에게 지키게 한 곳'(마 27:66)이고, 마가의 증언에 의하면 '돌로 막아놓은 곳'(막 15:46)입니다.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이 때 여자들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막 16:3) 하며 걱정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런 언급은 없이, 여자들이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눅 24:2) 라며 당시 그들이 목격한 것을 역시 간결하게 전해줍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간결한 기록 안에서 주목할 만한 차이 하나를 드러내줍니다. 그것은 여자들이 '본 것'과 '보지 못한 것'입니다. 여자들이 본 것은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입니다. 반면에 여자들이 보지 못한 것은 '예수님의 시체'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차이는 의미상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 자체가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누가가 이러한 진술을 통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예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누가가 오늘 말씀 바로 전에 언급했듯이 "여자들이 무덤까지 따라가서 예수의 시체를 어떻게 모시는지 눈여겨 보아두었던 것"(눅 23:55)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면, '예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더 극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 눅 24:4
여자들은 근심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누가는 '근심하는 여자들'과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을 오버랩 시킵니다. '찬란한 옷을 입었다'는 말은 천사들과 하늘에 사는 존재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상징적인 어법입니다. 그러니까 '근심하는 여인들'과 대비되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의 등장은, 땅의 근심을 끊어내는 하늘의 사건이 지금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여자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있을 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 눅 24:5
이것은 누가의 독특한 문구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맞으며 이마에 재를 바르고 창 3:19절의 말씀에 따라 고백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흙으로부터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지난 사순절의 여정을 다 보내고, 오늘 부활절 아침을 맞아 우리가 듣는 말씀은 놀라운 반전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흙으로부터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허무하게 끝마쳐지는 인생인 줄 알았는데, 이 부활절 아침에 주님은 천사를 통해 감격적인 반전의 메시지를 선사합니다. 천사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 눅 24:6a
상황이 어찌 된 것인지 파악할 수는 없지만, 지금 여자들의 귓가를 울리는 분명한 말씀은 '살아있다', '살아나셨다'는 말씀입니다. 죽음의 자리인 무덤 안에서 여자들에게 살아있음의 메시지가 들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 눅 24:6b-7
천사들의 증언을 주목해서 다시 보십시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눅 24:5),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눅 24:6a) 그러고 나서 천사들은 여자들을 향해 '기억하라'고 당부합니다. '무얼' 기억하라는 것입니까? '말씀'을 기억하라는 겁니다. 갈릴리에 계실 때 너희들에게 하신 말씀,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어가 십자가에 처형되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그 '말씀'을 기억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 눅 24:8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상황들 속에서 말씀을 기억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슬픔 가운데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의 가슴에 다시 뜨거움을 회복시켜 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말씀이었습니다. 여자들은 비로소 말씀을 기억해 냅니다. 마 28:13에 따르면 예수를 죽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그 추종자들에 의해 날조된 사건이라고 소문을 퍼뜨립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런 음해에 대한 치밀한 반론을 '말씀에 대한 기억'에서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말씀 위에 서야만 하는 명백한 이유입니다. 마침내 여자들은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립니다.(눅 24:9) 그런데 여자들의 말을 전해들은 사도들의 반응을 보십시오.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 눅 24:11, 12
사도들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하도 뜻밖이어서 '부질없는 소리로 여겨 믿지 않았다'는 겁니다. 다만 베드로만이 무덤으로 달려가 현장을 들여다봅니다. 그러나 현장을 들여다 본 베드로 역시 놀라게만 여겼을 뿐, 나머지 제자들과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십니까? 증언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떤 논리로 이 부활사건을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증언하실 수 있겠습니까? 사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사람들에게 그 어떤 '논리로서' 납득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목격한 대로, 그리고 말씀에 의존해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활의 의미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이긴 생명입니다. 무덤에서 천사는 여자들에게 '살아있는 자'를 왜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물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음 앞에 정직하게 서야 합니다. 부활은 관념이 아닙니다. 부활은 아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관념도 아편도 아니려면 우리 모두는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있는 자' 가운데서 찾아지는 이름이어야 합니다. 그 유일한 증거는 성경 말씀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 고전 20-22
베드로 역시 사도행전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 행 10:39-43
사도 바울도, 사도 베드로도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내 삶의 결말을 '죽음'으로 여기고 살던 비극적인 사람들이, 한 사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 즉 '죄 사함과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즉 생명이 죽음을 이긴 사건이 벌어졌는데, 우리 모두는 그 부활의 계승자라는 겁니다.그리스도의 부활
프레스코, 14세기
호라성당, 콘스탄티토플
그리스도의 부활
서울 성니콜라스대성당의 남측 벽면 프레스코,
소조스 야누디스, 1995년
1995년 그리스인 성화작가 소조스 야누디스가 그의 동료들과 함께 그 프레스코화를 모방해서 서울 성니콜라스 대성당 내벽에 벽화로 제작했는데, 호라 수도원의 원 작품보다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주님은 삼중의 빛의 영광에 둘러싸여 계십니다. 주님은 죽음을 이기신 분, 지옥의 왕국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신 분으로 몸 전체가 서계십니다. 주님의 팔과 다리에는 십자가 수난으로 얻은 상처가 그대로 드러나는데,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은 환상의 인물이 아닌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묻히신 분과 동일하신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두 발 아래로는 부서진 문들, 열쇠와 못, 쇠사슬과 금속 물품들이 나뒹굽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께서 지옥문과 사슬을 부수고 지옥에 붙잡혀 있던 이들을 해방시키셨음을 상징합니다. 이 사실을 내다본 시인은 시 107:16에서 "그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벽화 아래쪽 양편에 놓여있는 두 개의 무덤에는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있습니다. 아담은 긴 백발과 수염을 하고 있고, 하와는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오랜 세월 동안 자유를 갈망하며 기다려온 주님께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무한한 인간 사랑과 자애로 손을 내미시어 아담과 하와를 무덤에서 꺼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덤에서 나올 때, 아담과 하와가 그리스도의 손을 잡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주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손목을 잡아 끌어올리시고 계신 겁니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영적 상상력이지만, 중요한 건 그 상상이 성경 말씀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벧전 3:19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고 말씀한 바 있고, 벧전 4:6에서는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러한 성화를 통해 작가가 고백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 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손목을 잡아 끌어올려주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오른 쪽에는 세례자 요한이 손으로 예수를 가리키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요단강가에서 예수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으로 가리킨 것을 나타냅니다.
하와의 손목을 잡아 끌어올리시는 주님 손등에는 못 자국이 선명합니다.호라 수도원의 작품 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그리스도의 부활' 작품들이 '사람의 손목을 잡고 계신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1312년에 그려진 바토페디 수도원의 프레스코화도, 11세기 그리스 루카스 수도원에 그려진 모자이크도, 1546년 크레테의 테오파니스 스타브로니키타 수도원에 그려진 작품에도, 사람의 손목을 잡고 끌어올리시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주님의 부활 이후로 죽음은 더 이상 공포가 아닙니다. 죽음은 우리를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으로 옮겨지는 과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중에서 부활하신 것은 죽음에서 죽음을 멸하시고, 죽어서 묻힌 자들의 손목을 잡고 끌어올리셔서 살리신 사건입니다. 따라서 오늘 천사가 여자들에게 한 물음은 바로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입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 눅 24:5
어떤 게 우리의 현실입니까? 죽음입니까? 부활입니까? 주님을 향해 믿음의 손을 내미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손목을 잡아주실 것입니다. 죽은 자로 무덤에 내려가지 마시고, 산 자로 부활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내 인생의 끝은 죽음이라고 여기고 살아가는가?
②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노래하며 살아가는가?
주님의 부활
프레스코/ 1312년, 바토페디 수도원
아토스, 그리스
그리스도의 부활
모자이크, 11세기 루카스 수도원
보이오티아, 그리스
주님의 부활
1546년, 크레테의 테오파니스
스타브로니키타 수도원
아토스,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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