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사순절 제6주 학자들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사 50:4-9
4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9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응송 | 시 31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서신 | 빌 2:5-11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복음 | 눅 23:32-37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 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 어다 하고 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사 50:4-5, 8절을 묵상하십시오. 고난 받는 종이 모욕을 겪으면서도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무엇입니까?
② 눅 23:34을 묵상하십시오. 인간의 야만적인 폭력과 모욕을 겪으시는 중에도 예수님의 시선은 어디에 있습니까?
③ 빌 2:6-11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학자들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수난을 떨리는 마음으로 예감하는 종려주일을 맞이했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걸어온 사순절 여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라는 정점을 향해 올라가는 길이었다면, 그 여정 속에서 오늘 맞이한 종려주일은 그 정상 가까이에서 맞닥뜨린 가파른 지점의 시작이라 하겠습니다. 이 가파른 지점을 전통적으로 교회는 고난주간이라 부르는데, 헨리 나우웬에 따르면 이 고난주간은 '영적 여정 속에 있는 또 다른 여정'입니다. 이 고난주간에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피조물들의 거센 공격입니다. 구약성경은 자기의 동족들에게 온 몸을 내어맡긴 채 채찍과 뺨을 맞고 수염을 뽑히며 침 뱉음을 당하는 하나님의 종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복음서의 말씀은 무죄하신 그리스도를 거슬러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꾸미는 비정한 음모의 현장을 보여줍니다. 갑자기 화면이 느려지면서 마치 화면 가득 충격적인 영상이 돌아가듯이 고난주간을 맞이하는 오늘의 성서일과는 고난당하는 종의 모습을 느린 화면처럼 천천히 그리고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을 보십시오.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 사 50:4
이 말씀은 '고난 받는 종의 노래'입니다. 이사야서에는 비슷한 유형의 '종의 노래'가 42장, 49장, 50장, 그리고 52-53장까지 네 개가 있는데, 오늘 말씀은 그 중 세 번째 '고난 받는 종의 노래'입니다. 여기에서 고난 받는 종은 '나'라는 일인칭 형식을 빌어서 자기에게 주어진 종의 사명을 세 가지로 노래합니다. 첫째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이고, 둘째는, 아침마다 깨어서 말씀을 이해하는 일이고, 셋째는 여호와의 도움을 받아 박해를 이겨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 사명을 감당해 내기에는 당시 시대가 너무 완고하고 사나웠습니다.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 사 50:6
여기에 종이 당하는 고난의 현장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등을 때리고, 뺨을 때리며, 수염을 뽑고 침을 뱉습니다. 수치와 모욕감을 느끼게 해서 사람의 인격을 살해하는 잔인한 행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이 이런 모욕을 당한 건 자기의 잘못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직무로 인해 이런 고난을 당합니다. 이사야의 직무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위로하고, 아침마다 깨어 말씀을 묵상하고 깨달은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4절에 의하면 그는 여호와께로부터 '학자들의 혀'를 받았습니다. '학자'를 히브리어로 '림무드(דומל)'라고 하는데, 스승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배우는 '제자'를 뜻합니다. 이 '학자'는 탁상공론식 지식이 아니라 삶의 시련을 겪으면서 습득된 체험적 지식을 가진 자입니다. 따라서 이 '학자의 혀'를 지닌 자는 개인적인 지식욕을 만족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한 복판에서 삶의 시련을 온 몸으로 겪어내며 습득된 말씀을 세상에 선포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명을 받아 실천한 사람이 왜 그런 모욕과 수치를 당해야 했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듣기 싫었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싫어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야 했던 것이 '말씀을 선포하는 것에서 자기 존재의 근거와 이유를 찾았던' 선지자들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자기에게 다가온 고난을 거부하지 않고 자신을 완전히 맡겼습니다. 때리는 이에게 등을 맡기고, 수염을 뽑는 이에게 뺨을 맡기고, 침 뱉는 이 앞에서 얼굴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런 삶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사야 선지자가 모욕과 수치를 이겨내고 선지자로서 자기 길을 다 갈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말씀을 '듣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학자'를 뜻하는 '림무드(דומל)'는 말하는 혀 못지않게 듣는 귀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전하는 것'보다 우선인 것입니다. 그 사실은 다음 절에서도 잘 드러납니다.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 사 50:5
이 말씀은 앞에 있는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라는 말씀을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결국 이사야는 이 고백을 통해서 자신의 귀를 열고 깨우쳐 주시는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침마다 이사야의 귀를 열어 귀를 깨우쳐 말씀을 알아듣게 하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모욕과 수치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그는 아침마다 하나님께로부터 공급을 받았습니다.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 사 50: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그렇습니다. 이사야의 힘은 언제나 주 여호와의 도우심에 의존되어 있었습니다. 선을 위해 싸우다가 고난을 당하는 이들의 처지를 헤아리고 계신 하나님 말씀을 아침마다 경청했기에 그는 모진 수치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아무런 표정의 동요 없이 이겨내었고, 수치를 수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 '말씀묵상과 기도' 즉 수련입니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에 따르면, 영성생활은 '프락티케(praktike)'와 '그노스티케(gnostike)' 즉 '수련'과 '깨달음'의 과정으로 이루어지는데, 프락티케 즉 영성 수련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프락티코스(Praktikos)'라고 합니다. 성도는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프락티코스(Praktikos)' 즉 영성 수련을 통해 말씀과 기도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어지는 그의 고백을 보십시오.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 사 50:8-9a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이사야는 늘 이렇게 일상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오실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무엇입니까?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는 가운데, 그 분의 품성을 닮아가는 가운데, 내가 닮아가는 주님의 성품으로 인해 나의 의로움이 완성되는 여정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런 여정을 통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의 운명을 이겨내고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자기 삶으로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선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는 자기의 적대자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 사 50:9b
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마치 여호와께서 이사야의 적대자들을 파멸시키고 이사야 선지자를 지켜주신다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이사야에게 수치와 모욕을 준 적대자들은 역사 속에서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역사 속에서 보아온 것이고, 오늘날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럼에도 이사야가 자기 적대자들을 가리켜 옷처럼 해어진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옷처럼 해어지고 좀에 먹힙니다. 아무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적대자들을 향한 이사야의 경고는 그들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더더욱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에 집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가까이 계실 뿐만 아니라 아침마다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깨우쳐주셨기 때문에, 옷처럼 해지거나 좀에 먹히는 일반적인 운명에서, 심지어 등과 뺨에 모진 폭력을 당하고 침 뱉음의 수치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그는 당시 사람들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삶을 이해하고, 그 삶을 살아냈습니다. 그는 적대자들에게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충실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바로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길입니다. 복음서의 말씀을 보십시오.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 눅 23: 32-33
인간의 야만적인 폭력과 모욕을 겪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유다의 배신으로 체포당하신 후부터 주님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죽기까지 함께 하겠다던 제자들은 다 달아났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그를 환영하던 군중들은 어느새 폭력과 음모의 하수인으로 몰락했습니다. 군인들은 그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조롱하고 모욕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고통의 시간을 홀로 견뎌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순간 예수님의 기도를 들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 귀를 의심했을 것입니다.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 눅 23:34
인간의 폭력성과 야수성이 처절하게 드러나 버린 현장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도 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운명으로 닥친 십자가의 죽음을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묘사해 준 그대로의 태도였습니다. 죄가 없는 자가 십자가에 처형당한다는 것은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그대로 내어줍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이사야 선지자도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 공통점 때문에 예수님도 이사야를 그렇게 좋아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랬기 때문에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처음 펼쳐서 읽어주신 성경 말씀이 사 61:1 말씀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빌 2:9-11
주님은 죽음에 이르도록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최선이었고, 그의 낮춤은 하나님의 높임을 거쳐 우리의 영원한 파스카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수난과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능욕을 받았습니다. 십자가는 고독의 끝자락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소외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자리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폭력과 미움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기력합니다. 작은 모욕에도 상처받고, 누군가 내게 작은 손해라도 입히면 곧장 사랑의 시선을 거두어 버립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영성수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국인 성화작가인 '서미경 따띠안나'가 2004년에 그린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이란 제목의 성화가 있습니다. '조성암 암브로시우스' 정교회 한국대교구 대주교에 따르면 이 작품은 여섯 가지 주요 특징을 지닙니다. "성화의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는 중심주제는 보는 이의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이동하는 '나귀에' 앉으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평온한 얼굴에는 수난 중에 겪게 될 모든 것들에 대한 슬픔이 배여 있습니다. 무거운 짐을 질 수 없는 어린 나귀는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는 속에는 통옷을 입고, 그 위에 겉옷을 두르고 계십니다. 그의 머리는 십자가가 새겨진 후광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오른 손으로는 강복하시고, 왼손으로는 말씀이 적힌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뒤로는 베드로를 위시해 제자의 무리가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향해 몸을 돌리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얼굴을 쳐다보며 마치 말을 걸 듯 손을 들어 올리고 있습니다. 오른편에는 높고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예루살렘이 보입니다. 성 안에는 솔로몬의 성전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문 앞에는 유대인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든 채 예수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흔드는 것은 높은 사람을 환영하는 유대인의 관습이었습니다.아이들도 함께 그리스도의 입성을 경축하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한 아이는 예루살렘 도성과 암벽 사이에 있는 종려나무 위에 기어 올라가 가지를 꺾어 아래로 던집니다. 나머지 아이들은 옷을 벗어 길에 깔아놓고 그리스도께서 그 위로 지나가게 하십니다. 다른 한 아이는 나뭇가지 하나를 어린 나귀에게 먹이는 귀여운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성화에 나타난 아이들의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들은 성화 작가의 상상물이 아닙니다. 첫째, 아이들의 자발적이고 순수한 행동은 주님의 예루살렘 개선입성에 기쁨의 분위기를 더해줍니다. 둘째, 아이들은 주님을 맞이하는데 참여함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아이들에 대한 큰 사랑에 보답합니다. 셋째, 아이들은 주님이 성전에 들어가셔서 그곳을 '강도의 소굴'(마 21:13)로 만든 상인들을 내쫓으실 때, 밖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마 21:14)라며 환호했던 아이들을 연상케 합니다. 넷째, 그리스도께서 격노한 바리새인들에게 답변하시면서 인용한 시편 구절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시 8:2) 하신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의 등장은 계산 없이 진실하게 주님을 맞이한 아이들과 겉으로만 관습에 따라 주님을 맞이한 유대인들의 모습을 대비시킵니다. 유대인들은 정치권력을 가진 왕 메시아를 기대했고, 그런 메시아가 오면 이스라엘의 적들을 벌하시고, 유대왕국의 영광을 회복시켜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에 유대인들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처럼 주님을 맞이하자고 노래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성화는 자발적인 수난을 향해 나아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주님과 함께 부활하길 원한다면, 주님과 함께 길을 가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야 함을 신자들에게 가르쳐줍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과 함께 길을 가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내 가까이 계심을 알고 그 하나님께 영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처럼 계산 없이 진실하게 주님을 맞이하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이사야처럼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아침마다 하나님께 말씀을 공급받는 사람입니다.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 사 50:4
이 '알아들음'이 마침내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참여하고 주님과 함께 부활에 도달하게 할 것입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말씀에의 경청이 없어 무기력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②말씀과 기도로 이어지는 수련을 통해 세상을 이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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