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사순절 제4주 '지금', '여기'에서 경험되는 하나님 마음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수 5:9
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응송 | 시 32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서신 | 고후 5:17-19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 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복음 | 눅 15:1-3, 11b-32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 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 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 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 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 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눅 15:24을 묵상하십시오. 지금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스스로 품꾼을 자처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② 수 5:9을 묵상하십시오. 히브리들이 요단강을 건너 할례를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③ 고후 5:18-20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 기 위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반드시 필요한 건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지금', '여기'에서 경험되는 하나님 마음
교회 역사상 가장 탁월한 신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20세기의 신학자 칼 바르트가 1941년 6월25일, 스위스 부벤도르프에서 자신의 둘째 아들인 '로베르트 마티아스 바르트'의 장례식에서 했던 설교가 소개된 책을 보았습니다. 그는 아들 마티아즈가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고전 13:12절을 본문으로 설교를 했는데,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라는 말씀에서 우러난 그 설교에는 '지금'과 '그때'의 변증법적 이해가 슬픔의 절정 가운데서도 잘 드러나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운데 그분과 함께 '지금'과 '그때'가 교차하는 접경지역에 서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경계선에 서서 믿음과 사랑, 소망을 가지도록 하시려는 그분의 은혜입니다. 이 접경은 빛이 어둠 위를 비추는 곳, 죽음의 목전에서도 생명으로 인해 기뻐 날뛸 수 있는 곳, 죄인이지만 의롭다 칭함을 받는 곳, 포로로 잡혀있지만 자유로운 곳, 길이 보이지 않는데도 오히려 소망을 품게 되는 곳, 의심 중에도 확신을 얻게 되는 곳, 비통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곳, 바로 그런 곳입니다. 지금 우리 아들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나 그 아이의 생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 있습니다. 마티아스는 변함이 없는 동시에 완전히 다르게 변화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과 죽음, 죽음과 생명 양쪽 모두에 대해 말씀하셨기에 우리는 마티아스를 기억하며 그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이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 지금, 우리 역시 칼 바르트의 고백처럼 어떤 접경에 서 있습니다. 저 오랜 옛날 출애굽 시기의 히브리 노예들이 속박에서 자유로 넘어가는 파스카의 접경에 서 있었듯이, 주님께서 베푸신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파스카의 접경에 서 있었듯이, '지금' 사순절을 통과해 '그때'로서의 부활을 향해 가는 파스카 여정에서의 한 접경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 즈음에 오늘 성서일과는 일제히 파스카의 신비가 결코 낯설거나 모호한 '그때'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경험되는 따뜻하고 선명한 현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40년 동안 낯설었던 광야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을 맞이하는 하나님의 속 깊은 사랑이 은연중에 드러나고, 복음서에서는 낯선 타향살이 끝에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속 깊은 사랑이 장면 가득 애틋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모든 자녀들을 향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라며 벅찬 가슴으로 축하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 눅 15:1-3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로 왔을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린 것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잃었다가 되찾은 양의 비유, 잃었다가 되찾은 은전의 비유, 잃었다가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느니라"는 전 4:12의 말씀처럼 주님은 이 세 비유를 통해 쉽게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4세기에 활동했던 서방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인 암브로시우스는 누가복음 해설에서, 잃어버린 것을 찾아나서는 아버지와 목자와 여인은 각각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 '교회'라고 주해를 했습니다. 그대의 죄를 대신 지신 그리스도는 그대를 메고 가시며, 교회는 찾아 나서고, 아버지는 받아들이신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메고 오고, 어머니는 찾고, 아버지는 옷을 입히시는 이 세 겹의 사랑은 서로를 보완하며 구원을 완성시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그 세 겹의 사랑 중에서 돌아온 아들을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비유입니다.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 눅 15:11-12
주님은 '어떤 사람과 두 아들'이라는 상황설정을 통해 '바리새인-세리와 죄인-예수'라는 해묵은 세 관계를 보여주십니다. 당시 사회에서 이 세 관계는 어느 하나도 자신의 입장을 양보하거나 뒤로 물러설 수 없는 확고한 자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이 관계를 볼 수 있을 때, 오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흔히 오늘 비유를 '돌아온 탕자의 비유'라고 말하지만 이 세 관계를 염두에 두고 다시 비유를 들여다보면, 비유의 방점이 집 나간 둘째 아들이 아니라 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싫어했던 맏아들에게 찍혀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비유의 동기가 우선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세리와 죄인들 들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반가이 영접하신 주님을 보고 수군거렸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세리와 죄인들이 본 세계를 그들이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세계란 바로 아버지의 세계입니다. 차디 찬 자신들의 세계에 갇혀 아버지의 따뜻한 세계를 보지 못한 사람들 그들이 바리새인이고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리와 죄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죄가 사무칠수록 그들은 떠나온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며 다시 돌아가기를 열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탈선을 결코 미화할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들이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고 돌아왔다는 사실만큼은 높이 사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유산을 달라 했을 때, 아버지가 취한 행동을 매우 간명하게 표현해 줍니다.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 눅 15:12b
성 암브로시우스는 '누가복음 해설'에서 아버지의 이러한 결정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주권에 속한 것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속 깊은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유산을 나누어줄 때도 인자했을 뿐 아니라 둘째아들이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왔을 때도 여전히 인자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유산을 받아 타국에 간 둘째 아들의 첫 독립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주님은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처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 눅 15:13-16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둘째 아들은 유산을 모아가지고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납니다. 주님은 그가 거기서 '허랑방탕' 했다고 말씀합니다. 이 '허랑방탕'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형인 맏아들의 해석에 따르면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것'(눅 15:30)이었습니다. 어쩌면 아버지도 둘째 아들이 그럴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유산을 나누어 줌으로서 둘째 아들의 실패할 자유를 가로막지 않습니다. 어쩌면 아버지는 아들이 실패한 이후에 진정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배우기를 원했을 지도 모릅니다. 실제 먼 나라에 가서 실패를 경험한 아들은 내 것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난 후에 비로소 자신이 헛것에 속아 살아왔음을 깨닫습니다.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 눅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 말씀은 "자신에게 돌아오다"란 뜻입니다. 돼지나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 주린 배를 채우던 그는, 비로소 자신의 진짜모습을 보고 회개하기에 이릅니다. 먹을 것조차 없는 품꾼이 된 후에야 그는 아버지의 집에 있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과 '아버지의 인자하심의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합니까?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 눅 15:18-20a
여기에서 탕자의 고백은 중요합니다. 그는 아버지께만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 가치관과도 어긋났음을 안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둘째 아들의 이 깨달음입니다. 마침내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품꾼 신분으로 돌아갈 작정을 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면을 보십시오.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 눅 15:20
아버지가 아들에게 달려가는 이 모습은 당시의 관습에 어긋나는 모습입니다. 고대근동에서는 성인이 달음박질 할 때, 그의 모든 위엄을 잃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인간의 관습과 문화를 초월합니다. 세리와 죄인을 영접하신 주님 모습이 당시의 인간의 관습과 문화를 초월했듯이 말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받아줌으로서 그의 변화를 완성시켜줍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이 사랑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맞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자기 동생이 돌아왔을 때, 맞아들은 아버지의 기쁨을 함께 공감해주지 못합니다. 그가 '노(怒)해서'(눅 15:28)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 눅 15:29-30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이 말에서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가지고 있던 분노가 묻어납니다. 그들은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다고 스스로 자부했지만, 그러나 예수님 비유에서 나타나는 그들은 전혀 아버지의 마음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세계'에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들 세계'를 구축하는 데 더 공을 들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의 아버지였습니다. 세리와 죄인을 품에 안는 것이 바리새인들을 배척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눅 15:31) 이 말씀도 진심이고,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 15:31) 이 말씀도 진심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박대하지 않고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에 공감하고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자녀의 모습입니다. 오늘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자마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할례를 행할 것'을 명령하십니다.(수 5:2)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를 행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례가 끝나고 각각 자기 진중에서 낫기를 기다릴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의미 깊은 말씀을 하십니다.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 수 5:9
애굽의 수치란, 우선은 애굽에서 노예였던 과거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못지않은 수치가 출애굽 이후에도 여전히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에 골몰했고, 원망과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애굽에서의 노예살이도 그들에게 수치였지만, 광야에서 그들이 보인 모습은 더 큰 수치였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수치를 그칠 날이 왔습니다. 그들이 할례를 받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그들을 끌어안아주셨고, 그 때 그들의 수치가 떠나갔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셨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수치가 떠나가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 보면 반복해서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화목'이라는 단어입니다.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 고후 5:18-20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것은 우리를 당신과 화목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대신해 우리에게 간청합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사순절은 아버지께 돌아가는 계절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 화해하는 계절입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우리를 안아주시고, 모든 수치가 떠나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 상태를 사도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a)이라고 표현하고,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b)라고 선언했습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아들의 죽음에서 그 희망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한 아버지의 품이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 선명할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습니다. 사순절이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 지금, 우리 역시 칼 바르트처럼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 때'의 부활을 보며 낯설지만 믿음이 동기가 된 길을 걸을 때, 주님은 품을 벌려 우리를 안으실 것입니다. 그러한 행복이 가득한 사순절 길을 걸으시길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아버지 마음에 공감하지 못한 채 내 세계를 살고 있지 않은가?
② 아버지의 인자하심에 희망을 두고 전심으로 돌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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