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사순절 제2주 '땅의 길'과 '하늘의 길' 사이에서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창 15:1-7
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응송 | 시 27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서신 | 빌 3:18-4:1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복음 | 눅 13:31-35
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 하라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 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 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눅 13:32, 33을 묵상하십시오. 헤롯의 살해를 피해 떠나라는 바리새인들의 권고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해보십시오.
② 창 15:1-5, 17-18을 묵상하십시오. 아브람이 가졌던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이며 그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무엇입니까?
③ 빌 3:18-20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과 시민권을 하늘에 둔 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땅의 길'과 '하늘의 길' 사이에서
사순절이 시작된 지 꽤 여러 날을 걸어왔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좀 바뀌었는지, 우리의 마음이 좀 바뀌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계절로는 이미 봄이 왔지만, 쉬 물러나지 않으려는 듯 겨울이 꽃샘추위로 사람들의 옷깃을 자꾸만 끌어올리게 하듯이, 우리 마음 역시 어둠과 빛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성(聖)과 속(俗)이 갈등을 빚어내며 쉬 변화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싶습니다. 그렇듯 환영받지 못하는 절기인 이 사순절은 그럼에도 단호하게 "사람은 흙으로부터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기억하시오" 라며 우리 시선의 영점을 다시 하나님께 맞추고, 어둡고 속된 것들과의 싸움에서 결연히 승리할 것을 당부합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우리는 참으로 집요했던 악마의 세 가지 유혹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악마의 유혹이 집요한 만큼 예수님의 응전은 더 빛이 났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눅 4:3) 했을 때, 예수님은 신 8:3의 말씀을 인용해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눅 4:4)고 맞서셨고,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눅 4:7) "이 모든 권위와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눅 4:5, 6) 했을 때, 주님은 "기록된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눅 4:8)고 역시 말씀으로 맞서셨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눅 4:9)며 인간에게 흔한 영웅 심리를 부추겼을 때는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눅 4:12)시며 단호하게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말씀'보다 '카이사르의 검'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세상에서 주님은 번번이 '말씀'으로 '속(俗)의 매력'을 넘어서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유혹들을 이기신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중요하게 들려지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렇듯 우리 역시 '말씀'이 내 마음을 채워 '속(俗)의 유혹을 이기는 삶'을 살아내라는 주님의 당부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이 일제히 우리에게 당부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기생각(창 15:2)을 버리고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들을 것을 요청하십니다.(창 15:3-12, 18)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빌 3:19)에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 3:20)며 '땅'이 아닌 '하늘'을 바라볼 것을 요청합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바리새인 몇으로부터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눅 13:31),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눅 13:33)시며 당신께서 걸으실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십니다. 먼저 복음서의 말씀을 보겠습니다.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 눅 13:31
이들의 충고가 진정성이 담겨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음모를 꾸미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 시대 속에서 헤롯과 예수님을 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극과 극의 꼭짓점에 두 존재가 서 있습니다. '속(俗)'의 꼭짓점에 헤롯이 서 있다면 '성(聖)'의 꼭짓점에 예수님이 서계십니다. 그런데 헤롯이 예수를 죽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예수는 퍽 불편한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눅 3:1에 따르면 이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인 '헤롯 안티파스'인데, 당시 그는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의 분봉왕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예수님의 활동 지역이 이 헤롯 안티파스의 통치지역과 겹쳤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여기를 떠나십시오.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라고 말한 건, 사실은 예수님을 걱정한 권고라기보다는 헤롯이나 헤롯 배후에 있는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예수님께 겁박을 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정치적 야망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헤롯 대왕처럼 자신도 팔레스티나 전역을 다스리는 왕이 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의 호감을 사기 위해 갈릴리 호숫가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당시 로마황제였던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따 '티베리아스'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욕망은 끝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자기의 속된 욕망을 쌓아가는 지배자가 피지배자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들의 현재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것입니다. 억압과 착취를 당하해도 그걸 숙명으로 받아들일 때, 지배자는 그만큼 안전하게 권력을 쌓을 수 있습니다.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숙명의 사슬에 매여 현재를 포기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일깨워 그들이 그렇게 살면 안 되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따라서 자기의 지배구조를 든든히 해야 할 헤롯으로서는 예수는 제거되어야 했습니다. 더구나 헤롯은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결혼했다가 그것을 비판하던 세례요한을 참수한 장본인입니다. 헤롯이 세례 요한을 죽인 사건은 마 14:1-12과 막 6:14-29에 자세히 나옵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 사이에는 예수님에 대해 세례 요한, 혹은 엘리야, 혹은 선지자 중 하나가 환생했다는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눅 9:9절에서 헤롯의 당혹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 세례 요한은 당대의 의인이자 선지자였고, 시대의 양심을 깨우는 광야의 소리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루살렘과 유대의 많은 사람들이 요단강에 와서 그에게서 세례를 받은 것이고, 예수님도 그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 아닙니까? 그런 요한의 목을 벤 헤롯의 입장에서 요한이 환생했다는 소문은 무서웠을 것입니다. 그러니 헤롯의 입장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수를 죽이던지 자기 영토 밖으로 내보내려고 애를 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 눅 13:32
예수님께서 헤롯을 '여우'라고 부르십니다. 여우는 교활하고 간교한 자를 상징하는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우는 비단 헤롯만이 아닌, 헤롯을 전면에 내세워 예수님을 겁박해 갈릴리 밖으로 쫓아내고 싶어 하는 모든 세력을 포함한 말씀일 것입니다. 이쯤에서 오늘 서신서의 말씀을 묵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 빌 3:18
여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을 사도 바울은 19절에서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평가를 내렸는데, 공동번역에선 '세상일에만 마음을 쓰는 자'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최후는 멸망'(빌 3:19a)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네 뱃속을 하나님으로 삼고'(빌 3:19b 공동번역) '자기네 수치를 자랑으로 삼으며'(빌 3:19b 공동번역) 살아갑니다. 참담한 인생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오늘 복음서의 말씀대로라면 헤롯 안티파스 같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자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강자에게 아부하며, 자기 백성은 착취하고, 권력유지에 위협이 되면 사람을 보내 겁박하는 그는 천상소인배입니다. 그는 말씀보다 빵을 선택해 살아가는 사람이고, 자기 권력을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천 번이라도 절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불행한 인생입니다.
그러면 그런 헤롯에게 겁박을 받은 주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주님은 "가서 저 여우에게 전하라"시며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2-33) 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길을 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전한 말은 비단 위협만은 아니었습니다. 실제 헤롯은 자기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세례 요한을 목을 베어 죽인 사람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그는 예수님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분명했습니다. 진리와 대척점에 서있는 헤롯의 길도 분명하고, 진리이신 주님의 길도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자세히 보면 헤롯과 주님의 관점이 다릅니다.
주님은 '시간'을 말씀하십니다. '오늘과 내일 그리고 제 삼일'에 방점을 두셨습니다. 반면에 헤롯은 '공간'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갈릴리라는 '공간' 밖으로 쫓아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지구상에 사는 생명체 중에서 시간을 의식하고 사는 존재는 사람 밖에 없다고 합니다. 대체로 동물들은 공간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자기 영역을 표시하고, 그 공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자기 영역에 민감하다는 점에서 헤롯과 같은 삶은 '지극히 동물적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눈에 보이는 영역에나 집착하는 헤롯적인 삶을 살기보다는, 오늘과 내일 그리고 모레로 흘러가는 시간들을 의미 있게 채워가는 예수적 삶을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이라는 현재에 충실하며 '내일'이라는 삶의 과정 또한 존중하며 '제 삼일'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자기 삶의 궁극적 목표를 내다보고 길을 걸으십니다. 메시아로서의 주님의 목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대속제물로서의 죽음, 그 일을 위해 당신은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고, 그 사명을 완수할 곳은 예루살렘이라는 겁니다. 헤롯의 길이 다른 이를 희생시켜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길이라면, 예수의 길은 자기를 희생함으로 다른 이를 살리는 길입니다. 예수의 존재가 헤롯에게 위협이 된 것처럼, 헤롯의 존재는 예수에게 위협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일, 곧 생명을 온전케 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바로 그 일을 위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걸어야 할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그런 길 말입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 빌 3:20-4:1
헤롯과 같은 '자기중심적 인간'과 달리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자신의 중심을 땅이 아닌 하늘에 둡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과 종말적 완성에 믿음을 두고, 미래에 완성될 자기 인간상을 소망하면서 시선을 땅이 아닌 하늘에 두고 살아갑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하늘에 소망을 둔 미래적 전망으로 인해 현재의 삶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시기에 가장 신앙적이어야 할 예루살렘 사람들이 가장 불 신앙적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며 탄식하십니다.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 눅 13:34
평화의 도성에 평화가 없고, 가장 거룩해야 할 그 곳이 가장 속된 곳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성전체제에 대해 예수님은 슬퍼하셨습니다. 그곳은 종교 권력자들의 탐욕과 오만이 지배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했던 선지자들은 모두들 죽임을 당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추한 것이 타락한 종교입니다. 신앙의 내용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을 때, 종교는 사람들을 생명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 눅 13:35
그들이 그렇게 사랑하고 지키고 싶어 한 곳,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원하지 않은 결과는 참혹하고도 참혹했습니다. 생명을 잃어버린 종교는 본능적으로 폭력과 손을 잡게 마련입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힘써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오히려 예수를 없애려고 꾸미는 음모를 보십시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자기들 영역인 예루살렘도 지키지 못하고, 자기들 권력인 성직도 지켜내지 못합니다. 헤롯은 정치인이라서 짐승처럼 살았지만,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은 성직자이면서 짐승처럼 살고 말았습니다.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구약성경은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에게 아들이 없었다는 것이고, 하나는 정착할 땅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아브람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결핍이었습니다. 그런 아브람에게 어느 날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 창15:1
그런데 성경을 보면 아브람이 이 말씀에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거기엔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브람에게 자식을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창 13:16) 하셨는데, 그러나 이 약속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아브람이 자기 속내를 드러냅니다.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 창 15:2
우리는 아브람의 이 말에서 그가 이미 자기 길을 정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릴 수 없어 자기 생각대로 상속자를 결정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밤하늘의 별을 세게 하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고 다시 한 번 약속해 주십니다. 아브람의 고민을 모를 바 아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려는 아브람의 생각에 조바심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우리 역시 현실 속에서 얼마나 많이 아브람과 똑같은 결정을 내리는지 모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누가 뭐라 해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여정에 있어서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방해물은 나 자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더 신뢰하는 이유는 '타락한 본성' 때문입니다. 이 지긋지긋하고 뿌리 깊은 본성을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구약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 창 15:6
물론 이 사건 이후에도 아브람의 믿음은 좀처럼 안정되지 못하고 흔들립니다. 믿음으로 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수행'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헤롯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그러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빌 3:18),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빌 3:19) 라며, '그들의 최후는 멸망'이라고 단언합니다. 아브람처럼 믿음의 길을 떠났지만,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를 때, 그 생각의 다름으로 인해 고민하며 미처 길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다행히 하나님은 아브람을 설득하시고 그의 조그만 믿음조차 의롭게 여겨주십니다. 예수님처럼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라며 흔들림 없이 믿음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그러한 사람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라며, 그러므로 "주 안에 서라"(빌 4:1)라며 권면합니다. 여전히 어둠과 빛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성(聖)과 속(俗)이 갈등을 빚어내는 이 때, 부디 이 사순절을 걸어가는 동안, 흙으로부터 와 흙으로 돌아갈 내 존재를 기억하며 우리 시선의 영점을 다시 하나님께 맞추고, 어둡고 속된 것들과의 싸움에서 결연히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땅에 집착해 살아감으로서 멸망의 길을 걷고 있지 않은가?
② 오늘과 내일과 모레라는 시간을 하늘을 향해 걷고 있는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413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
KOR | 2024.11.25 |
41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6주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
KOR | 2024.11.17 |
41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5주 나를 넘어 하나님께로
|
KOR | 2024.11.10 |
410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4주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
KOR | 2024.11.02 |
409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3주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
KOR | 2024.10.26 |
408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2주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
KOR | 2024.10.19 |
407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1주 하나님만이 오직 최선이시다
|
KOR | 2024.10.12 |
406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0주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KOR | 2024.10.05 |
405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8주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
|
KOR | 2024.09.21 |
404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7주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
KOR | 2024.09.14 |
403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
KOR | 2024.09.07 |
40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
KOR | 2024.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