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주현 후 제6주 '마음' 나를 넘어 주께로
■ 읽기|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렘 17:5-10
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응송 | 시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서신 | 고전 15:17-20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복음 | 눅 6:20-23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렘 17:6, 8을 각각 묵상하십시오.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힘을 삼은 마음과, 여호와를 의지하며 의뢰하는 삶의 결과는 각각 어떻습니까?
② 눅 6:20을 묵상하십시오. 가난한 사람, 혹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받는 복은 무엇입니까?
③ 고전 15:19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인임에도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인 사람을 향해 사도 바울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마음' 나를 넘어 주께로
오늘은 교회력으로는 주현 후 제6주이고, 24절기 생태력으로는 우수(雨水)를 이틀 앞두고 있습니다. 언 땅이 녹고, 눈석임물이 흘러들어 계곡에 활기가 돌아오는 때입니다. '우수 뒤의 얼음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매듭졌던 것이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표현입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이맘때면 수달은 물고기를 잡아 늘어놓고, 기러기는 봄기운을 피해 추운 곳으로 날아간다고 합니다. 모천으로 회귀하는 어종들이나 철새들은 어쩌면 그렇게 자기 때를 분별하고, 돌아갈 곳을 향해 길을 떠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일 철 모르는 게 사람입니다. 때를 분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어디로 가야 하는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오직 인간만이 자기 실존을 문제 삼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함석헌 선생의 저작집인 '씨알의 소리' 1974년 6월호, 권두언에 '이름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인사말이 있습니다."이름도 모르는, 이름을 알 수도 없는, 알고자 할 필요조차도 없는 씨알 여러분! 하늘의 맑음, 땅이 번듯함 속에 안녕하십니까? 물의 날뜀, 바람의 외침 속에 씩씩하십니까?"
엄혹했던 시기, 모두가 숨죽이고 살 수밖에 없었던 때, 함석헌 선생은 그렇게 독자들의 안부를 묻고 있습니다. 이건 그냥 잘 있느냐는 인사가 아니라, '정신이 살아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인사가 문득문득 그립습니다. 그냥 '잘 있느냐'는 의례적인 안부 인사보다 '씩씩하게 정신이 살아 있느냐'고 물어주는 그런 인사가 그립습니다. 봉건사회의 신분질서가 무너진 지 이미 오래 되었지만, 이제는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사람값을 매기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돈이 모든 가치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다 보니,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지 못하고, 더 많은 수입을 얻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버리고, 처음에 지음 받았던 하나님의 형상은 어디에 잃어버리고, 시들은 나뭇잎으로 수치를 가리느라 분주한 사람들에게, 그냥 '잘 있느냐'는 의례적인 안부 인사보다 '씩씩하게 정신이 살아 있느냐'고 물어주는 그런 인사를 우리 서로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은 우리에게 엄혹했던 시기에도 씩씩하게 정신이 살아있었던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수 뒤의 얼음처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매듭졌던 것들이 풀릴 수가 있었습니다. 먼저 오늘 구약의 말씀은 우리에게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여줍니다. 그는 당대의 사람들을 향해, 한편으로는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며(렘 17:5), 다른 한 편으로는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 17:7)고 그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할 것을 격려합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었습니다.
나 주가 말한다. 나 주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오히려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 렘 17:5 표준 새 번역
'마음'은 우리 존재의 가장 심층적인 곳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멀리하게 하는 것도 '마음'이고, 주님을 의지하고 의뢰하도록 하는 것도 '마음'입니다. 구약시대의 심리학에서도 인간의 마음은 생각과 행동의 원천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시인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라고 기도했고,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 5:3) 라고 말씀하셨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마 5:8)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막의 교부들도 이 '마음'을 사로잡아 동요시키는 것들이 하늘의 별만큼이나 무수하고 다양하다고 보고 '마음'과 '생각'과의 싸움을 영성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받아들였습니다.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는 마음으로 스며드는 악한 생각을 치유하기 위해,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여덟 가지 악한 생각의 증상과 치료법을 소개하는데, 처음 소개한 책이 '안티레티코스(Antirrhetikos)'입니다. 그가 정리한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여덟 가지 악한 생각은 '탐식, 음욕, 탐욕, 슬픔, 분노, 아케디아, 헛된 영광, 교만'이고, 그가 '안티레티코스(Antirrhetikos)'에서 제시하는 여덟 가지 악한 생각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성경말씀들을 반복해서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는 "악한 생각과의 싸움의 순간에, 기만하는 악령인 우리 적에게 대응할 적합한 말을 신속히 찾지 못하는데, 그 말들은 성경 안에 흩어져 있다"고 말하면서, 각각 나열한 여덟 가지 악한 생각에 따라 '담화'와 함께 '성경말씀'을 제시해 줍니다. 그러면서 그는 '성경에서 출발하는 기도'를 당부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영과 진리로 바치는 참된 기도 혹은 영적 기도가 있다. 기도는 어떤 중개 없이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만남이다. 기도는 하나의 '상태'로서 정신은 기도 중에 자기 자신을 보고 이 기도의 거울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
이렇듯 마음을 깨끗하게 하려는 노력은 구약시대의 사람들부터 사막의 교부들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기만 했고,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도 이 노력은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습니다. 참 생명의 가치는 자기를 넘어설 때 빛이 납니다. 자기를 넘어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되어 살아갈 때, 우리는 그때부터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구약성경은 종종 두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복된 길이고, 하나는 저주의 길입니다. 오늘 말씀도 5-6절과 7-8절이 서로 대조되면서 저주를 받을 사람과 복을 받을 사람을 진술합니다. 예레미야에 따르면 저주를 받을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특징이 있는데, 주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사람을 더 의지하며,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예레미야의 경고를 듣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들이 믿고 의지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인 동맹이나 스스로의 힘을 신뢰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섰다는 것입니다. 유력자를 따르거나, 유력한 집단에 속함으로 자기의 욕구를 충족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정현종 선생은 '우상화는 죽음이니'라는 시에서 우리 시대에 만연한 그런 현실들을 통탄합니다.
우상화는 죽음이니
우상화하지 말라
위대하신 누구이든
우상화 법석 속에서는
우상도 시체요
우상화하는 사람들도 시체이니 ...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 렘 17:6
여기 '간조한 곳'이란 히브리어로 '하레림(םיררח)'인데, '용암 밭', '암석사막'을 뜻하고, 그 어떤 작물을 심어도 불탈 정도로 불볕으로 인해 바싹 메마른 땅입니다. '건건한 땅'이란 '에레츠 멜레하(החלמ ץרא)' 즉 염분으로 인해 생물이 살 수 없는 땅입니다. 주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사람을 더 의지하며,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런 심판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유력자를 따르거나, 유력한 집단에 속해 자기의 욕구를 충족하려고 했던 결과는 그토록 참혹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반대의 사람들을 보여줍니다.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 렘 17:7
이 사람은 5절에 언급된 사람과 대조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사람을 믿지 않고 여호와를 믿습니다. 육신의 힘이 아닌 여호와의 힘을 의지합니다. 그랬더니 그 결과도 대조적이었습니다.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은 '사막의 떨기나무'로 비유되었습니다. 이 '사막의 떨기나무'는 8절에서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으로 비유된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차이가 있습니다. 떨기나무는 가뜩이나 사막에 심겨졌는데, 뿌리마저 깊이 내리지 못해 죽고 맙니다. 그러나 '물가에 심어진 나무'는 뿌리마저 강변까지 깊이 내려서 무더위가 닥쳐와도 잎이 언제나 푸르고, 가뭄이 심해도 언제나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자신의 경험이었습니다. 렘 15:18에 의하면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마치 '흐르다가도 마르고, 마르다가도 흐르는 여름철의 시냇물' 같으신 분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그가 자신의 힘을 의존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메마른 시냇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여호와를 의지하며 의뢰할 때는 하나님은 그에게 풍성한 시냇물 같았습니다. 중요한 건 마음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계심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말씀에서 마침내 이렇게 말씀합니다.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 렘 17:9, 10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임을 볼 때, 그 마음이 부패했다는 건 참 슬픈 진단이지만, 나의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니 변명조차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으로 표현된 히브리어 '레브(בל)는 그대로 '마음'을 뜻하고, '폐부'로 표현된 히브리어 '킬르야(הילכ)'는 '콩팥'을 뜻하는데, 옛 사막의 수도자들은 이 콩팥에 인간의 의지, 양심, 감정이 머문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장은 생각과 지성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여드리고 싶어 하는 것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애써 숨기고 싶어 하는 속내까지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은 겉치장을 살피지만, 하나님은 속내를 살피십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 주님, 내 자신을 살피기 싫어서 이때까지 내 등 뒤에 놓아두었던 나를 당신은 잡아떼어 내 얼굴 앞에 갖다 세워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내가 얼마나 보기 흉하고, 비뚤어지고, 더럽고, 얽었고, 종기투성이인지 보게 하셨습니다." 어찌 보면, 나의 마음과 폐부를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거스틴처럼 고백하며 인정할 수 있는 것도 용기입니다. 내 마음의 흉하고, 비뚤어지고, 더러운 그대로 하나님께 보여드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 눅 6:20-22
이 말씀은 마 5:3-12에 있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누가가 본 시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마태는 '가난한 자' 앞에 '심령'을 덧붙여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마 5:3)고 예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누가는 그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전해줍니다. 두 복음서간의 표현의 차이에 대해 이런저런 해석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두 복음서의 표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 해도 의미의 큰 변화는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이든, 마음이 가난한 자이든 성경은 모두를 향해 "복이 있다"고 선언해 줍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가난이 예수의 관심이 되고, 그 관심이 하늘의 복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실제 가난함이란 경제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이미 그 자체로 하나님을 향해 절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해 절실한 마음을 받아주십니다. 하나님을 향해 절실한 마음만이 하나님께 정직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절실한 마음이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 고전 15:19, 20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인 인생', 그보다 더 불쌍한 인생이 어디 있을까요? 그는 천국을 모르기 때문에 다만 이 세상을 바랄 것이고, 그는 부활을 모르기 때문에 다만 이 육체를 바랄 것입니다. 그처럼 조바심 나고, 불행한 인생이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천국이 가까워 오고, 부활이 가까이 와야 행복할 수 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죽음이 내게 다가오고, 그 죽음 이후는 정처 없는 인생이라면, 태어날 때부터 비극인 인생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이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주목해서 보면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인 인생'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신앙인의 이름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그는 세상에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그 마음을 온통 공허함에 내어준 채, 사람이 나의 힘이 되어 주려니 해서, 사람을 우상으로 삼고, 육신의 재물과 권력으로 힘을 삼기 위해 정치적인 동맹이나 맺으려 애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응송에서 시인은 고백합니다.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 시 1:1-4
대동강 얼음도 녹는다는 우수 절기를 이틀 앞에 두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정신은 살아났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깨어났습니까? '우수 뒤의 얼음같이' 겨우내 얼었던 마음이 기지개를 켜고, 그 마음이 '나를 넘어 주께로' 향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 방법은 성경말씀들을 반복해 묵상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나를 넘어 주께로' 향하게 도와주는 말씀들은 성경 안에 흩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출발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영과 진리로 바치는 '참된 기도' 혹은 '영적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만남이고, 하나님과 마음으로 나누는 대화입니다. 그렇게 나를 넘어 하나님 마음과 접속되어 살아감으로, 주님의 행복과 평강이 여러분 마음에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내힘을 삼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②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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