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주현 후 제5주 하나님과 '만난' 사람들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사 6:1-8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 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 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 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바 핀 숯 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 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 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응송 | 시 138
내가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 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서신 | 고전 15:3-8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 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 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복음 | 눅 5:1-11
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 에 서서 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 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 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 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 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 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 람을 취하리라 하시니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눅 5:8을 묵상하십시오. 시몬이 온통 두려움과 경외감에 차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② 사 6:1-5을 묵상하십시오. 이사야가 자기 입술의 죄와 내면의 죄를 보게 된 시점은 어느 때였습니까?
③ 사 6:8과 눅 5:10b, 고전 15:3-10을 묵상하십시오. 이사야와 시몬, 그리고 바울이 하나님께 소명을 얻은 시점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묵상 나눔
하나님과 '만난' 사람들
겟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수사였던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은 스스로를 '말과 행동으로 세상에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는데, 실제로 그의 초기 생애는 '상실', '외로움', '부재'라는 20세기 삶의 현상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윤리적 철학적으로 1930년대의 격렬한 불안의 바다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는 어느 때부터, 자신의 자아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겟세마네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수도자가 된 그는 세상과 자신에 대해 새로이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새로이 인식한 '세상'은 거만하고 경박한 가면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그 문명사회에서 발전시킨 거짓 자아가 아닌, 아직 탐구되지 않은 인간의 참 자아를 찾아 나섭니다. 그는 자신의 영성 일기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죄 중에 태어났다는 말은 내가 거짓 자아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뜻이다. 나는 가면을 쓰고 태어났다. 나는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고 따라서 예정된 나 자신을 부정하는 누군가로 존재한 모순의 표징 안에서 태어났다. 첫 순간부터 나는 내가 아닌 어떤 존재였기에, 나는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였다.(NS 33-34)"그의 이 고백 안에는, '모든 죄는 자기중심적 욕망 속에만 존재하는 거짓 자아가 삶의 근본실재라고 가정할 때 출발한다'는 판단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 안에 실재하는 거짓 자아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고발합니다. 만일 자신이 이 거짓 자아를 자신의 참된 정체성으로 여긴다면, 그리고 자신의 거짓 자아를 자신의 참된 얼굴로 생각한다면, 자신은 자신의 진실을 더럽히면서까지 날조하며, 그것을 보호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갖는 자신에 대한 견해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숭배'로 왜곡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날조된 서로의 위대성을 모방하려고 노력합니다. 토마스 머튼에 따르면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열이고, 이 분열 속에 사는 사람은 인격체가 아니고 '개체'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토마트 머튼은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의 영성일기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영혼을 지닌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자체의 질서로 완성에 이를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능력을 무한히 넘어서는 질서 안에서 인간을 완성할 수 있다. 하나님의 무상의 은총인 우리의 본성은, 또 다른 무상의 은총인 생명의 은총으로 완성되고 향상된다." 사실 이러한 신앙적 성찰은 토마스 머튼 한 사람 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철학자이자 시인이고 영성가인 '마크 네포'는 "아주 순수한 상태로 태어난 인간은 평화가 흐르는 은총의 내밀한 지점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가장 먼저 만나게 된다"면서, 예수는 그것을 '사랑의 중심'이라고 했다고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이 내면의 지점을 안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에 의해 내가 어디 있는지를 아는 것'과 '그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은 일생을 두고 계속 이루어져야 할 어려운 과제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존재는 끊임없이 비본질적인 것을 침식시키고, 본질적인 것을 향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바로 이 지점, 즉 거짓 자아와 참 자아의 갈등, 비 본질과 본질의 갈등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갈등을 통해 거짓 자아와 비 본질을 떨치고 나의 가장 내밀한 부분에 자리한 은총의 지점을 향해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성서일과는 우리보다 먼저 그러한 갈등을 겪어낸 사람들을 만나게 해줍니다. 구약의 말씀에서는 이사야 선지자이고, 서신서의 말씀에서는 바울 사도이고, 복음서의 말씀에서는 시몬이라는 어부입니다. 그 중에 복음서의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 눅 5:1-2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 서서 정박된 배들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때 마침 어부들이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습니다. 이때 어부들은 속으로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후의 상황들을 조합해 보면, 지금 이들은 밤새 그물질을 했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이들은 뭔가 모를 패배감에 쌓여 있을 수도 있었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그러했기 때문에 "내일 많이 잡으면 되지 뭐!" 하며 현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오늘 말씀은 이러한 외적 조건을 매개로 시몬의 내면을 일깨우시는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그 중의 한 배에 오르십니다. 그 배는 시몬의 배였습니다.(눅 5:3)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배를 육지로부터 조금 떼어 놓으라" 하시고, 그 배에 앉으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 눅 5:4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신 명령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깊은 데로 가라'는 것이고, 하나는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염두에 두고 지켜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희랍어 원문에서 첫 번째 명령은, 단수형 동사로 되어 있어서 시몬 한 사람에게만 주신 명령이고, 두 번째 명령은, 복수형 동사로 되어 있어서 시몬과 함께 배 안에 있던 모든 어부들에게 주신 명령이라는 사실입니다.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 배가 시몬의 배였기 때문일 것이지만, '그물들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모두에게 말씀하신 것은, 비단 시몬만이 아닌, 배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말씀에로 초청하고 계시는 겁니다. 희랍어 원문으로 보면, 그 날 배 안의 모든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시몬 한 사람만이 예수님 말씀에 반응했다는 사실입니다.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 눅 5:5
항상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어떤 사람도 소외시키지 않고 공평하게 들려오지만,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각각 다릅니다. 그 말씀을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말씀을 자신과 무관하게 여겨서 흘려보내고 마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여 순종하는 사람도 자신이고, 말씀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사람도 자기 자신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계십니까? 전자일까요? 후자일까요? 김현승 시인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라고 인식하고, 그 불완전함이 '고독'을 불러왔다고 인식했습니다. 따라서 고독을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과정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식' 혹은 '긍정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한 김현승 시인의 고백이 잘 드러난 시가 바로 '불완전'이라는 시입니다. 그 중의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더욱 분명히 듣기 위하여 / 우리는 눈을 감아야 했고 / 더욱 또렷이 보기 위하여 / 우리는 우리의 숨을 죽인다." 인간은 '더욱 분명히 듣기 위하여' 또 다른 감각인 눈을 감아야 하는 존재이며, '더욱 또렷이 보기 위하여' 우리의 숨을 죽여야 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후로 그는 눈을 감고 살았고, 숨을 죽이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는 말씀을 더 많이 듣고 싶었고, 더 또렷하게 보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반대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을 향한 눈을 크게 뜨고 있어서 주님의 말씀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고, 욕망의 숨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주님의 뜻을 보지 못하는 것 아닌지 말입니다. 배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말씀을 들었지만 오직 시몬만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아마도 시몬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동안 아침 햇살처럼 조용조용 들려오던 주님의 말씀을 눈을 감고 듣고, 숨을 죽이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내심 감동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을 반박 한 번 없이 따를 수가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론을 잘 알고 있습니다.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 눅 5:6-7
어떻게 이런 놀라운 결과가 가능했습니까? 그것은 이 게세사렛 호수에서 어부로서 잔뼈가 굵은 시몬의 고기잡이 경험이나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시몬이 '말씀대로'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이것은 그의 경험의 세계이고, 지식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시몬은 그것들을 극복했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그는 경험도 지식도 아닌 말씀의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껏 어부로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눅 5:8
시몬이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린 것'과, 예수님을 향해 '주여(kyrie)'라고 부른 것에서, 그가 지금 누구를 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불완전한 실존(實存)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은 이 경외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오늘 나의 신앙의 태도가 방자하다면, 그것은 주님을 진정으로 만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시몬을 찾아오신 목적입니다. 목적이 없는 만남은 한낱 사교에 불과할 따름입니다.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 눅 5:10b
주님이 시몬을 찾아오신 목적은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음에도 잡은 것이 없었던 게네사렛 호수는, 구원은 주지 못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만 안겨준 할례와 율법의 바다를 상징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에프렘 타티아누스'라든지, '토리노의 막시무스'라든지,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등이 그런 취지로 주석을 하거나 설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주님은 시몬을 불러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심으로서, 그에게 생명을 살리는 사역을 감당케 하시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시몬보다 더 웅장하고 섬세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험합니다.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 사 6:1-3
지금 이사야는 아무도 없는 성전에서 홀로 존망의 기로에 선 조국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당시 상류층은 술독에 빠져 지냈고(사 5:11), 여인들은 수입명품에 정신을 팔고 있었습니다.(사 3:16-23) 선지자들은 거짓을 가르치고 있었고(사 9:17), 백성들의 황폐함은 가시나무와 찔레로 상징되었습니다.(사 10:17)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것이 오늘 구약의 말씀입니다. 그 때의 그 두렵고 떨리고 신비하며 압도적인 광경은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표현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국 이 한 번의 경험이 시몬과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생애를 가르는 분기점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세워진 이사야에게 나타난 현상은 자기 내면의 죄에 대해 자각하는 것이었습니다.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 사 6:5
이것은 그저 하는 상투적인 고백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는 입술의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입술이 더러운 가운데 사는 궁중 예언자로서 거짓된 말과 죄가 되는 말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그러던 그가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그를 가장 두렵게 한 것은 바로 입술의 죄였습니다. 그는 저절로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자신이 망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시몬과 이사야의 공통적인 경험과 공통적인 반응이 무엇입니까?시몬은 주님을 깨달은 순간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고백합니다. 이사야는 주님을 보게 된 순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인을 자처하면서도 좀처럼 변하지 않고, 성화되지 않는 그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거룩 앞에 스스로를 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생활의 관성으로 오늘을 살려 하고, 거짓 자아의 관성으로 행세나 하려는 것에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를 보십시오. 온통 경외감에 휩싸여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줄줄 고백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제단의 불로 이사야의 죄를 태워주시고, 그를 의롭게 하십니다.(사 6:6-7)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 사 6:8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임한 소명을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 고전 15:3-8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꾸만 당신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게바에게 먼저 보이십니다. 그 다음 열두 제자에게 보이십니다. 그리고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메섹에서 바울에게 보이십니다. 이들 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산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주님과의 진정어린 만남을 경험한 이들은 눈물 속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아냈습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그렇듯 '하나님과의 정직한 대면'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 시몬처럼, 이사야처럼, 바울처럼, 경외감 가득 주님을 만나서, 나의 거짓된 자아가 철저하게 무너져 내리고, 무상으로 베풀어 주신 모든 은총에 감사하며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소명에 겸손히 화답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종교적 타성 속에서 예수님과 거리를 느끼며 살고 있지 않은가?
② 하나님 앞에 선 경외감이 나를 거룩한 소명으로 이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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