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주현 후 제4주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 읽기|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렘 1:4-9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응송 | 시 71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서신 | 고전 13:11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복음 | 눅 4:21-22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 묵상 | meditatio
① 렘 1:7을 묵상하십시오. 스스로를 '아이'로 여기며 자신 없어 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
② 눅 4:22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이 읽어주신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그리고 이유는 무엇입니까?
③ 고전 13:11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에게 있어서 어렸을 때와 장성한 이후의 변화는 어디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까?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설날과 함께 입춘(立春)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봄이 오면 봄을 살아가는 사람을 철든 사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철든 사람이란 '사계의 순환을 아는 사람'이란 뜻이고, 사계의 순환을 모르는 사람은 '철부지(철不 知)'입니다. 사전에는 이 '철'이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힘'이라고 정의되 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적 세계관 안에서는 철들었다는 의미가 좀 다릅 니다. 우리는 오늘 성서일과를 묵상하면서 성경이 말씀하는 '철들었다'는 의미에 대해 새삼 성찰해 보게 됩니다. 구약성경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신에 대해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 라며 하나님께 호소합니 다.(렘 1:6)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아이라는 소리를 하지 말라" (렘1:7a)시며"내가너를누구에게보내든지너는가며,내가네게무엇 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하라"(렘 1:7b)고 당부하십니다. 마치 "나는 아직 철 이 안 났습니다."라는 사람에게 "너는 벌써 철이 났다"고 말해주는 것과 같습니다.우리가여기서알수있는성경이말씀하는철든사람의기준 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서신서에서 사도바울역시철이난것을'말하는것','생각하는것','깨닫는것'의변 화에서 찾고 있습니다.(고전 13:11) 내가 어렸을 때는, 어린 아이처럼 말하 고, 생각하고, 판단하였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읽어주시는 이사야의 말씀 을 들은 후에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눅 4:22) 라며, 예수님의 말씀보다, 그의 집안 내력에 더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나이로는 모두 어른들이었지만, 그러나 영적으로는 철들지 못한 모습입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BC 587년, 바벨 론에 의해 유다가 멸망당한 해, 즉 유다의 격변기입니다. 마치 1910년 조 선후기, 한일합방 직전의 우리나라와 비슷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레미 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임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 렘 1:4
조국의 운명이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기울어 갈 때, 예레미야를 사로잡 은 건 다름 아닌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시작부터 예사롭지가 않습니다.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 렘 1:5
이 말씀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그의 어머니의 뱃속에 만드시기 전 에, 처음부터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를 만드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서 '너를 알았고'라고 쓰인 히브리어 동사 '야다(יךע)'는 '선택했다', '뽑았다' 그런 뜻입니다. 예레미야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선택된 부담을 운명적 으로 끌어안고 태어났습니다. 그 부담스러운 선택 앞에 선 예레미야의 반응을 보십시오.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 렘 1:6
여기에서 예레미야가 자신을 '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나 '말할 줄을 알 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에 나는 아직 영적 소양이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의 이런 고백은 단순한 겸손이 아닙 니다.하나님의말씀을들고선다는것이얼마나두려운건지안다는겁니 다. 모세도 처음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실 때,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출 4:10)라며 당혹스러워 한 바 있습니다. 고후 11:6에서 사도 바울도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라며,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의 부담감 을 솔직하게 토로한 바 있습니다. 심지어 사 6:5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자 기를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결국 이런 반응들은 무얼 말하는겁니까?말씀을잘받아들이는것도잘전하는것도참부담스러 운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복음서의 말씀에서, 고향 나사렛 으로 돌아오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당시 회당예배의 전통대로 성경을 읽어주시는데, 사 61:1 이하의 말씀을 읽어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 하게 하려 하심이라 | 눅 8:18, 19
예수님께서 왜 이 말씀을 읽어주셨을까요?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시고,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시고, 이제부터 공생애로 접어들으시는 예수님께서, "나의 사명은 여기에 있다"고 선포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 누가는, 예수님께서 읽어주신 말씀을 들은 이후, 사람들의 반응 을 이렇게 소개합니다.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 눅 4:22
다른 번역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읽어주셨을 때, "모 든 사람이 감탄하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워했다"는 것입니다. 감탄할 만큼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엔 어떻 게 해야 합니까? 그 말씀을 굳게 붙잡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 다. 그런데 누가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의 반응이 그렇지가 않습니 다. 그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눅 4:22b) 그들은 오히려 예수의 혈통을 문제 삼으면서 적대적인 태도로 돌 변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이 부분에서 왜 사람들이 끝까지 칭찬을 이어가 지 못하고 적대적으로 돌변했는지 이야기해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께서 전하신 말씀에 대한 부담감이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렙다의 과부와 나아만 장군의 예를 들어 말씀을 받아 들이지 못하는 자기들을 책망하시자, 사람들은 예수를 낭떠러지에서 밀어 죽이려고까지 합니다.(눅 4:24-29) 말씀을 들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오늘 구약의 말 씀에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부담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을 심지어 당시 민감 한 정치적 상황 안에서 받았습니다. 사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해야 할 말 씀은 당시 유다인들 뿐 아니라 왕이나 귀족들도 듣고 싶지 않아하는 내용 들이었습니다. "북쪽 강대국들의 군대가 쳐들어올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 의 심판이니 저항하지 말고 받아들여라"(렘 1:11-15) 그렇게 전해야 합니 다. 누가 이런 말을 듣고 싶어 하겠습니까? 실제로 예레미야가 이 말씀을 전했을 때, 고향 아나돗 사람들은 예레미야에게 계속해서 예언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정말 가능하다면 말씀도 선지자의 소명도 다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심정에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 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 렘 1:7
첫째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이어지는 말씀에서 우리는 희미하게나마 이유를 추측 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 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 는 것은 예레미야가 한가롭게 "나는 아이입니다" 라며 거절해서는 안 될 만 큼 상황이 매우 절박했다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그 다음 말씀을 보십시오.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 렘 1:8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가 이 말을 들고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이 얼마 나 두려운 일인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향한 소명을 거두지 않으셨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보내든지 가야 했고, 무엇을 명하던지 말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레미야는 점점 자기 안에 있는 아이를 극복하고 철든 어른 이 되어갈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해야 할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명령하신 말씀들'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손을 내밀어 예레미야의 입에 대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 렘 1:9
이 말씀은 신 18:18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 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하나님께서 모 세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선지자의 사명은 하나님께서 자기 입에 두신 말 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지자들의 말씀은 바로 여호와의 그 말씀 자체라는 뜻입니다. 이제 예레미야는 결단해야 했습니다. 여전히 그 가 처한 상황은 녹록치 않습니다. 그를 비판하는 소리도 험악하기만 합니 다. 왕과 관료들도 자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냐 선지자는 자기와 완전히 다 른 예언을 합니다. 하나냐는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치시고 유다 민족을 곧 해방시킬 것이라며 거짓으로 유다민족을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유다 민족이 완전히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갈 것이라고 예언했습 니다. 사람들이 누구의 말에 더 솔깃해했을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더 이상 고민하지도 주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입에 두신 말씀을 흔들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합니다. 그는 더 이 상 아이가 아닌 것입니다. 그는 비로소 성숙한 어른이 되었고, 민족을 바 로 세우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고집하며, 언어생활 대부분이 말씀에서 비켜 선 어른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들려온말씀을 받아들이고 전하는 가운데 영적으로 성숙한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 까?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 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 고전 13:11
사도 바울에게도 아이 같던 시절은 있었습니다. 그 아이 같은 시절이라 는 것이 정말 나이가 어렸던 시절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확신이 지나쳐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핍박자요 포행자인 사울이었을 당시를 말 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어렸을 때, 그 때의 특 징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았고, 깨 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았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았다." 어린 아이의 지식은 자기중심적이고, 주관적이고, 감각적입니다. 반면에 장성한 사람은 비교적 사색적이고, 객관적이고, 실제적인 지식을 추구합니다. 따 라서 어린 아이의 언어와 감정과 생각에서 벗어나 사려 깊고 반듯한 어른 으로 성숙해 가야 하는 것은 육체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버렸노라' 라고 표현한 단어는 헬라어로 '쓸모 없게 만든다'라는 의미입니다. 어린 아이의 말과 생각과 행동은 시간의 흐 름에 따라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쓸모없는 말이고 생각이 고 행동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삶속에서 완전히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응송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 | 시 71:8
그의 고백 하나하나마다에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성숙한 사람이었는지 를 읽을 수 있습니다.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공의만 전하겠나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 시 71:15-17
여기 종일토록 시인의 입에 가득한 것, 그래서 언어마다 우러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종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고, 종일 주의 공의를 전하는 것이고, 종일 주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고,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는 것 입니다. 그의 시선이 이미 자신에게서 떠나 오로지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영적 나이는 몇 살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결 단했습니다.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말씀이 우리를철들게합니다.말씀을잘듣고,잘받아들일뿐아니라,잘표현 하고전하며살아가는가운데,우리모두어린아이의행동은잦아들고철 든 성도로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것입니다.
■ 실천 | Praxio
1.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이 아이 같은가?
2.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고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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