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주현 후 제1주 나를 새로이 창조하시는 하나님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사 43:1-3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 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응송 | 시 29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서신 | 행 8:14-17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17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복음 | 눅 3:15-17, 21-22
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사 43:1을 묵상하십시오. 이스라엘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이사야 선지자는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② 행 8:14-17을 묵상하십시오.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음에도 그들에게 결핍된 한 가지는 무엇이었습니까?
③ 눅 3:22을 묵상하십시오. 비둘기 같은 형체로 강림하신 성령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 43:1과 함께 묵상하십시오.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나를 새로이 창조하시는 하나님
김기택 시인은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라는 시에서, 아기가 잠을 자는 모습을 매우 인상 깊게 표현했습니다. 예를 들면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 부드럽고 기름진 잠을 한순간도 흘리지 않는다." 라든지, "남김없이 잠을 비운 아기가 아침 햇빛을 받아 환하게 깨어난다." 라든지, "저렇게 달게 자고 나니, 하룻밤에 이 세상 다 살아버리고 다시 태어난 것 같다." 등등의 표현들입니다. 때때로 염려에 겨워 밤잠을 설칠 때가 많은 어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참 많이 부러운 아기의 잠입니다. 우리는 언제 그런 잠을 누려봤던가요? 우리는 언제 그렇게 부드럽고 기름진 잠을 한순간도 흘리지 않고 달게 자 봤던가요? 우리는 언제 그렇게 '남김없이 잠을 비우고' 환하고 행복한 아침 햇빛을 받아봤던가요? 그러면 언제부터 우리는 아잇적의 저 부드럽고 기름졌던 잠을 상실하고, 비워야 할 잠을 말끔히 비워내지 못한 것일까요? 우리는 명암이 극명한 세상을 마치 징검다리를 건너듯 살고 있습니다. 행복을 느끼게 하는 돌다리가 있는가 하면, 불행을 느끼게 하는 돌다리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12월과 1월 사이에 성탄절도 건너고 주현절과 함께 새해도 건너왔는데, 우리가 건너온 성탄절과 주현이 깃든 새해에도 역사적으로 명암은 어김없이 깃들어 있습니다. 분명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10)이었지만, 채 천사들의 찬송이 잦아들기도 전에 베들레헴 지경에서는 아기들의 비명과 부모들의 통곡의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라고 천사들은 노래했지만, 그 밤에 요셉과 마리아는 영광도 평화도 없이 황급히 아기예수를 안고 이집트로 피난을 떠나야 했습니다.(눅 2:14) 자기의 안위를 위해 무고한 아기들을 학살한 헤롯의 시간이 멈춰지지 않는 한, 이 세상은 부드럽고 기름진 잠, 남김없이 비울 수 있는 그 잠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렘 31:15, 마 2:18)는 불행하게도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멈추어진 적이 없습니다. 겨울 찬바람 속에 거리로 나서거나, 굴뚝에 오르거나, 목숨을 끊어서라도 자기들 사정을 호소할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 가장들의 선택도 현재진행형이고, 극심한 고용부진 속에서 점차 희망을 잃어가는 우리 시대 청년들의 우울함도 현재진행형이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도 환하게 웃지 못하고, 남모르는 고통을 속앓이하며 눈물을 흘려야 했던, 빙상 국가대표 선수 이야기도 현재진행형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하는 걸까요?그런데 우리와 같은 물음을 끌어안고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구약의 말씀에서 그들이 처한 현실과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제 2이사야' 선지자의 설교입니다. 지금 제 2이사야 선지자가 처한 상황은 바벨론 포로입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이후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는데, 분단된 후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을 당했고, 남유다는 130년 후인 기원전 587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했습니다. 이때 왕족과 귀족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가족을 잃거나 불구가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무력으로 저항하고 투쟁하다가 잔인하게 제압을 당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때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들은 모든 희망을 상실한 채, 언제까지 이 절망을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지를 하나님께 처절하게 물었을 것입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이들의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 사 43:1a
이 말씀이 맛소라 본문에서는 '웨아타(התצו)' 즉 "그러나 이제는"으로 시작됩니다. 이 말씀은 바로 앞장 끝 부분에 있는 그들이 처한 상황으로부터의 탈출을 예감하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이때 이들은 우상숭배에 몰두하고 있었고(사 42:17), 말씀을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사 42:18) 그리고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그들은 도둑맞고, 탈취를 당하며, 굴속에 잡히고, 옥에 갇혔습니다. 노략을 당하되 구할 자가 없고, 탈취를 당하되 되돌려 주라 말할 자가 없었습니다.(사 42:22) 그래서 절망이 깊을 수밖에 없었는데, 오늘 말씀은 바로 그때 들려온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야곱아', '이스라엘아' 하시며 그들을 부르시는데, '야곱'과 '이스라엘'이라는 이 한 쌍의 호칭은 언약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각별하신 사랑을 애틋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어지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입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1, 2장을 연상시켜주는 것으로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여호와는 '그들을 지으신' 창조자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절망으로부터의 탈출이, 바로 이 사실을 알고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기본적으로 이런 창조 신앙에 토대하고 있고, 신약도 구약의 창조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의 첫 마디가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창조 신앙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메시지의 중심이 무엇일까요? 성경적 창조신앙은 '남유다가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대개의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겪으며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사람들이 의심하기 시작했을 때, 바로 그 때 창조 신앙이 꽃을 피웠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바벨론 제국의 권위에 주눅 들어 있었고, 그들로부터 벗어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포기와 회한과 절망에 찌들려 있었습니다. 바로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창조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를 비롯한 동시대의 선지자들은 제국의 왕들이 아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선포하며,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바벨론 제국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부단히 설득했습니다.오늘 말씀 1절과 5절에 보면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창조 신앙이 어떻게 두려움을 몰아내는지를 알려면, 먼저 두려움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직시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파괴시키는 대상을 두려워합니다. 그것은 국가 권력일 수도 있고, 재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현실들에 속아서 두려워하지 않도록 우리를 창조 신앙에로 이끌어 갑니다. 창조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의 신비 안에 자신의 영혼을 자리매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놀라움' 그 놀라움을 음미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시 139:16에서 그 생명의 신비에 놀란 시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로 이 생명의 신비와 하나님의 창조를 말함으로써 이스라엘이 더 이상 바벨론 제국을 두려하지 않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창조주이신 그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을 걸어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신다'는 이 표현은 이사야의 메시지의 '현실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막연하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 즉 '지금', '내 곁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 사 43:1b
여기에서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와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라는 이 두 동사는 완료형입니다. 소위 '예언적 완료형으로서',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선포한 것입니다. 더욱이 이 말씀에는 '너' 그리고 '나'라는 인칭대명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영적 무지와 무감각에 빠져있을 지라도 말씀하는 '나'를 '너'는 잊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사야 선지자는 마치 버림받은 것처럼 낙심해 버린 바벨론 시대의 유대인들을 향해서, 우리들은 여전히 '사랑 받는 너'이고,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시는 나'임을 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난이 길어지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의 긴장감이 사라지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이 길어지면서 그들의 창조 신앙도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창조하신 분인지,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신 분인지, 그들의 의심이 하염없이 깊어만 갈 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그들에게 말씀하심으로서 흔들리지도 의심하지도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을 구원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새 창조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 사 43:2, 3a
지금 낙심하고 계십니까? 지금 이 말씀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현실적인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서에 보면 마치 바벨론 포로기의 사람들이 포로생활에 서서히 지쳐가듯이, 서서히 기다림에 지쳐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 눅 3:15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당시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게 합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그 지난한 기다림에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지난 400년 동안의 기다림은 그들에게 고통스럽고 어두운 시간들이었습니다. 이 어둡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그들은 '유다의 암흑기'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던 중 광야에서 세례를 주는 요한을 보면서 그들은 메시아를 향한 기대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로 인해 분별력을 상실해버린 일종의 '오인(誤認)'일 뿐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레위 지파 사람이었고, 메시아적 특징도 보이지 않았고, 다윗의 자손도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이들의 잘못된 이해를 수정해주며, 동시에 예수를 참된 메시아로 소개합니다.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 눅 3:16, 17
요한복음 1:20에서는 세례 요한이 자신이 메시아가 아님을 강하게 부인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오늘 말씀에서는 자신의 사역과 메시아의 사역을 비교해 보여줌으로서, 메시아의 탁월성을 분명히 부각시켜줍니다. 여기에서 그가 전하는 말씀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신다. 둘째,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 것이다. 여기에서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는 성자 예수님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가 요한보다 더 능력이 많다는 것은, 요한은 물로서 '회개의 세례'만을 베풀었지만,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푼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말씀보다 더 희망을 주는 말씀은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뉴스를 기다리십니까? 남과 북이 평화적으로 통일되었다는 뉴스를 기다리십니까? 저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뉴스를 손꼽아 기다려왔습니다.우리나라 경제가 회복되고 젊은이들의 취업문이 활짝 열렸다는 뉴스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가 손꼽아 기다리는 뉴스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뉴스를 뛰어넘어 현실적인 희망을 가져다주는 기쁜 뉴스가 여기 있습니다.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신다"는 뉴스와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 것이다"라는 뉴스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선포가 희망을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나의 그리스도인 됨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을 읽다 보면 주목할 만한 장면이 하나 나옵니다.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 행 8:14-17
이 말씀은 스데반의 헬라인 동료인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 중에 있었던 일화입니다. 빌립의 설교를 통해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그곳에 파견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보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이 세례를 받기는 받았는데 아직 그들 중 아무에게도 성령이 내리시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안수했더니 그들이 성령을 받더라는 것입니다. 물로 시작한 세례는 성령을 받음으로써만 완성되는 것입니다. 왜 성령으로 받는 세례가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거기에서 비로소 우리 희망이 완성되고 진짜 사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 놀라운 장면이 하나 소개됩니다.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 눅 3:21, 22
왜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심에도 굳이 세례를 받으신 걸까요? 아마도 그것은 당시 사람들의 가슴을 옭죄던 절망과 그들의 희망에 공감하는 마음의 이끌림이었을 것이고,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하나님의 뜻 안으로 인도하려는 세례 요한의 노력에 대한 연대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성령은 비둘기같이 주님 위에 임하셨고, 하나님의 기쁨은 말씀이 되어 들려왔습니다. 마치 창조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이 장면은 우리가 정말 바라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향해서도 하늘이 열리길 소망합니다.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여러분 위에 임하시고, 여러분을 향해 말씀이 들려오길 소망합니다. 그러면 새 창조가 시작됩니다. 그러면 새 행복이 시작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새로이 창조하셔야만 비로소 우리는 단잠을 잘 수 있습니다. 나희덕 시인은 '귀뚜라미'라는 시에서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 지하도 콘크리트 벽 좁은 틈에서 / 숨 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다 /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 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라며, 울음이 터져 나오는 극한 상황에서 귀뚜라미의 타전 소리가 자신에게 노래가 되었음을 고백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귀뚜라미의 타전 소리가 아닌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여러분 위로 내리십니다. 그 성령님의 은총 안에서, 그리고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새로이 창조된 나'가 되면, 그 때부터 우리는 갓 창조된 아기처럼 부드럽고 기름진 잠을 자게 되고, 남김없이 잠을 비우고 일어나 두려움 없는 아침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부디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새로이 창조하셔서, 매일매일 여러분의 아침이 행복하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세속적인 기대와 염려 속에서 영혼이 지쳐가고 있지 않은가?
② 성령께서 새 창조하신 나로서 영적 행복을 체험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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