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탄 후 제1주 그리스도인이 서 있어야 할 자리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삼상 2:18, 26
18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26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응송 | 시 148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들과 고관들과 땅의 모든 재판관들이며 총각과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서신 | 골 3:12-17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복음 | 눅 2:41-52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삼상 2:18, 26을 묵상하십시오. 어린 사무엘의 삶의 자리는 어디였습 니까? 그리고 그 삶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② 눅 2:49, 52을 묵상하십시오. 소년 예수는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러한 삶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③ 골 3:12-17을 묵상하십시오. 새사람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마땅히 입어야 할 새 옷은 어떠한 것들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그리스도인이 서 있어야 할 자리
지금 우리 모두는 한 해의 끝자락을 밟고 서 있습니다. 시간이 소름처럼 예민하게 온 감각으로 느껴져 오는 시기가 바로 이 순간입니다. 우리만큼이나 시간을 예민하게 느꼈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그의 '기도 시집'을 열면서 이렇게 노래한 바 있습니다.지금 시간이 기울어가며 나를
맑은 금속성 울림으로 가볍게 톡 칩니다.
나의 감각이 바르르 떱니다.
나는 느낍니다, 할 수 있음을
그리하여 나는 조형(造形)의 날을
손에 쥡니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 삼상 2:18
여기에서 사무엘이 입고 있는 '에봇' 즉 '에포드(דופא)'는 제사장의 복식 중에서 가장 겉옷을 뜻하는 것입니다. 당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이러한 흰색의 세마포 에봇을 입고 있었는데, 어린 사무엘이 그러한 복장으로 여호와 앞에서 섬겼다는 말씀은, 그가 어려서부터 매우 경건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결과에 대해 사무엘서 저자는 이렇게 단언합니다.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 삼상 2:26
같은시대에 함께 생활했던 엘리제사장의 두 아들이 타락한 생활로 인해 심판을 받았던 것과 대조적으로,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생활했던 사무엘은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더욱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어렸을 때, 어떤 모습으로, 어떤 자리를 소중히 여기고 생활하셨는지를 알게 해 주는 한 마디 말을 소개해 줍니다. 그것은 눅 2:49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우리는 아직 어리실 때의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그 분이 어떤 자리를 소중히 여기고 계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리신 예수에게 있어 소중한 자리는 '내 아버지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사무엘이 그러했던 것처럼, 성경은 그러한 어린 예수님 삶의 결과를 이렇게 단언해 줍니다.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 눅 2:52
이 이야기 속으로 한 걸음 더 심층적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누가는 예수님이 열두 살 되었을 때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면서 오늘 복음서를 시작합니다.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 눅 2:41, 42
예수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이면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유대인 중 성인 남성들은 일 년에 세 번,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에 예루살렘을 순례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고,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민족적 동일성과 정체성을 재확인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동반 순례를 했다는 사실은 그들 신앙의 신실함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유월절 행사는 7일 동안 계속되었는데, 예수님의 가족은 절기 기간 내내 예루살렘에서 보낸 것 같습니다. 사건은 절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발생했습니다.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 눅 2:43-45
'그 날들' 그러니까 7일간 계속되었던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나고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갈 때였습니다. 누가는 이때 예수님의 모습을 무심한 듯, 그러나 무심하지 않게 소개합니다.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왜 예수님은 부모님이 내려가실 때,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무셨을까요? 열두 살의 총명하신 예수님이 부모님을 잃어버려서 할 수 없이 예루살렘에 머무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때의 예수님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다시 부모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신 말씀으로 미루어, 예수님은 분명히 어떤 뜻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남으셨을 것입니다. 그걸 모른 채, 요셉과 마리아는 하룻길을 간 후에야 아들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워낙이 순례단의 규모가 컸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당연히 어린 예수가 순례단 어디에선가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잘 따라오고 있으리라 여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없어진 것을 비로소 깨달은 부모님은 처음에는 친족들과 아는 자 중에서 찾다가(눅 2:44), 예수님이 찾아지지 않자, 다시 오던 길을 거슬러 가며 찾다보니 어느덧 예루살렘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놀란 가슴을 애써 달래며 아들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흘이나 지난 후에 예수님을 찾게 되는데, 당시 예수님의 모습을 누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 눅 2:46, 47
이때 성전 안에는 이방인의 뜰과 유대인의 뜰, 그리고 안뜰의 동남부 등 세 곳에 회당이 있었다고 탈무드는 전합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어린 예수님이 선생들 중에 앉아계셨다는 것은 성전 안에서 율법을 강론하는 랍비들 사이에 앉아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당시의 저명한 율법학자로는 힐렐(Hillel), 샴마이(Shammai), 가말리엘(Gamaliel), 그리고 요나단(Jonathan), 시므온(Simeon), 니고데모(Nicodemus) 등등을 들 수 있습니다. 누가의 증언에 따르면 어린 예수는 이들 중 누군가와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했는데, 누가는 듣는 자가 다 그의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겼다고 전해줍니다. 외경인 도마복음서에 의하면 이때, 예수님께서 랍비들과 나눈 대화의 주제는 율법과 선지서의 난제(難題)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관한 것들과 천문학, 의학, 물리학, 철학 등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고 합니다.우리는 그들의 이런 놀라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누가가 40절에서 했던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그러나 사흘이 넘게 어린 예수를 찾아 헤맨 요셉과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반가움과 함께 일말의 노여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나간 사흘이 얼마나 힘겨웠던 시간지고, 얼마나 슬프고 불안한 시간이었겠습니까? 그런 부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연덕스럽게 랍비들 사이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어찌 마냥 반갑기만 했겠습니까? 누가는 당시 광경을 이렇게 증언합니다.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 눅 2:48
마리아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예수를 나무라듯 한 말입니다. 당연히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되돌아온 어린 예수의 대답은 더욱 더 뜻밖의 반응이었습니다.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 눅 2:49
어린 예수의 이런 반응은 육신의 부모의 입장에서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조금 심층적으로 이 대답을 분석해 보면, 어머니가 말하는 '네 아버지'와 예수님이 말하는 '내 아버지'가 다릅니다. 어머니는 '육신의 아버지'를 두고 말하는데, 예수님은 '하늘의 아버지'를 두고 대답합니다. 여러분은 이 불협화음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누가는 이때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섭섭했을까요? 양아버지일지라도 요셉은 분명히 예수의 아버지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 사실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기 존재의 더 깊은 뿌리를 가리켜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이것은 예수님께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된 생명입니다. 나의 근본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을 때만, 비로소 우리 삶은 하늘을 향한 순례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일생을 통해 일깨우려 한 것은 우리 삶은 먹고 마시고 입는 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육신은 밥을 먹어야 살지만 사람은 뜻을 먹어야 삽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내 아버지의 집'이란 어쩌면 단순히 성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전체를 말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뜻에 서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라고 말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생활했던 사무엘과 '내 아버지의 집'에서 말씀을 나누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신 예수님은 그 지향에 있어 일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지나간 한 해 동안 여러분이 마땅히 여기고 서있었던 자리는 어디였습니까? 우리는 과연 어떠한 옷을 입고, 어떠한 자리를 내가 서 있어야 할 마땅한 내 삶의 자리로 여기며 살아온 것일까요? 매년 연말이 되면 교수신문이 설문조사를 통해 그 해의 사자성어를 정하곤 했는데, 올해는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는 뜻의 '임중도원(任重道遠)'을 골랐습니다. 논어 '태백(泰伯)' 편에 실린 고사성어인데, 교수신문은 이 사자성어를 추천한 이유를 "한반도 평화 구상과 여러 국내 정책이 뜻대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아직 해결해야 할 난제가 많이 남아 있는데, 굳센 의지로 잘 해결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라고 설명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숙원인 평화의 숙제는 엄중한데, 갈 길은 멀고 넘어야 할 산 또한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토록 먼 길을 극복하고, 숱한 난제들을 극복하고 우리 한반도에 평화를 일구어낼 수 있겠습니까? 자기 설 자리를 바로 알고 서서 주어진 시간들을 평화를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마땅히 서있어야 할 자리는 어떠한 자리이겠습니까? 주님은 산상수훈인 마 5:9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서있어야 할 자리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리'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 5:9 공동번역) 어떤 사람이 이런 자리에 설 수 있을까요? 어린 사무엘처럼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 어린 예수님처럼 '내 아버지 뜻 위에 있는 것'을 마땅히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누가의 증언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 눅 2:51
어린 예수는 이후로 완전히 부모를 떠나 다른 세계로 가지 않았습니다. 소년 예수는 다시 육신의 부모를 따라 고향으로 내려가 아들의 도리를 다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증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와 '이 땅에서의 삶'이 결코 동떨어진 세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오늘과 내일이 따로 있지 않고, 여기와 거기, 나와 남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즉 현재의 삶과 하늘의 삶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내 아버지 집과 '요셉의 아들'로서의 내 아버지 집이 따로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모든 순간이 영원에 잇대어져 있습니다. 영원에 잇대어져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하찮은 일도 하찮은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아무 일도 허투루 하지 않고, 어떤 사람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모든 사람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있는 것을 마땅히 여기시면서도, 다시 나사렛에 내려와 육신의 아버지께 순종하여 받드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 있어 마땅한 삶이었다면, 신자의 마땅한 삶은 바로 '예수님 같아진 삶'입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어린 아들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살았듯이 우리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새해를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골 3:10b)라고 소개하며,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 삶을 가르쳐줍니다.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 골 3:12-15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서, 사랑, 평강, 감사" 어떤 사람이 이러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살아 있게 하십시오. 온갖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고하십시오. 감사한 마음으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여러분의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십시오 | 골 3:16 표준 새 번역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심장에 살아있는 사람, 그리스도의 지혜가 내 심장에 살아있는 사람,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시와 찬미로 내 영혼에 넘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만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한 해의 시간이 기울어가며 맑은 금속성 울림으로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감각을, 톡 치고 있지 않습니까? 예민하게 소름이 돋듯 예민하게 감각이 깨어나길 바랍니다.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다시 마음을 곧추 잡아 서시길 바랍니다. 어린 사무엘처럼 '여호와 앞에서' 어린 예수님처럼 '내 아버지 뜻 위에' 여러분의 새해가 마땅히 세워지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말씀을 떠난 나의 자리를 마땅히 여기고 있지 않는가?
②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을 마땅히 여기고 있는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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