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대림절 제3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습 3:14-19
14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15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16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18 내가 절기로 말미암아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리니 그들은 네게 속한 자라 그들에게 지워진 짐이 치욕이 되었느니라 19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 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응송 | 사 12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서신 | 빌 4:4-7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복음 | 눅 3:7-14
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 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0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14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습 3:16을 묵상하십시오. 이스라엘이 두려워하지 말고 손을 늘어뜨리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② 빌 4:4, 5을 묵상하십시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③ 눅 3:10-14을 묵상하십시오.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서 세례 요한이 열거하는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대림절이 깊어지며 촛불이 한 개씩 더 밝혀지고 밝아지는 것을 보면서, 오실 주님을 고대하는 우리의 기다림 또한 간절해져 갑니다. 대림절기마다 우리가 부르는 입당송 찬송가 104장 '곧 오소서 임마누엘'은 13세기경부터 라틴어 제목 '오소서, 오소서 임마누엘(Veni, Veni Emmanuel)'로 크리스마스 이전 12월 17일부터 23일까지 8일 동안 저녁기도에서 불린 가장 장엄한 대림절 찬송 중 하나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열렬히 갈망하는 마음이 이 찬송가사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 일부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오 오소서, 오 오소서, 임마누엘이여,
하나님의 독생자 나타나실 때까지
여기 외로이 유배 중에 슬퍼하고 있는
포로 이스라엘의 속전(贖錢)이시여
오 오소서, 이새의 막대기시여
당신의 자녀들을 사탄의 횡포에서 놓임 받게 하소서
지옥의 깊은 곳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무덤의 승리를 안겨 주옵소서.
오 오소서, 돋는 해이신 당신이여
오셔서 여기 당신의 강림으로 우리 마음에 용기를 주소서
밤의 어둔 구름을 흩으시고
죽음의 검은 그림자들 패주케 하소서.
오 오소서, 다윗의 열쇠이신 당신이여
오셔서 우리의 하늘 본향을 넓게 여소서
하늘로 인도하는 길을 안전케 하시고
비탄으로 가는 길을 닫아 주소서
오 오소서, 힘의 주이신 당신이여
옛날 시내산 언덕에서
구름 속에서 위엄과 두려움으로 당신의 족속들에게
율법을 주신 주여, 오시옵소서.
오 이스라엘아! 기뻐하라, 기뻐하라 임마누엘이 내게 오시리라.
이 대림절의 찬송은 왜 이토록 간절한 기다림으로 가득할까요? 그것은 대림절 찬송가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외로이 유배 중에 슬퍼하는 사람들과, 사탄의 횡포에 괴로워하는 사람들과,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영혼을 뒤덮어 비탄에 잠긴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본 복음서의 상황,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황제나 총독이나 왕이 역사의 주역이 되어 진리(眞理)를 역리(逆理)로 바꾸어버린, 그런 시대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의 말씀은 화려한 도시가 아닌 빈들에서, 당대의 주역들이 아닌 빈들의 사람에게 들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빈들의 사람 세례 요한'만이 말씀이 임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들려오는 자리에 서서 메시아의 오실 길을 예비하던 사람, '요한' 희망은 바로 그에게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희망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입니까? 빈들의 사람에게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임하는 자리를 소중히 여기고, 말씀을 가슴에 새겨듣는 사람 말입니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만이 그런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구약의 말씀에서 바로 그런 사람, 스바냐 선지자를 봅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왕족출신으로서 예루살렘의 정치적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지금 예루살렘을 항해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라며 그 성읍에 내릴 화(禍)를 선언합니다(습 3:1). 그는 지금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그의 눈에 비친 귀족들은 짐승과 다름없었습니다. 관료들은 사자들처럼 으르렁거리고, 재판장들은 저녁 무렵 늑대들처럼 백성을 뜯어먹고(습 3:3),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했으며,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했습니다.(습 3:4) 하나님은 그들을 벌하기로 작정하셨고, 스바냐를 통해 경고하셨습니다.(습 3:8) 그러나 스바냐 선지자는 그 기막힌 현실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심판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불의한 귀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역설적이게도 회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의 구원에로 이어집니다. 그는 우상숭배에 떨어지지 않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남겨 두셨다고 예언합니다. 이른바 '남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악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어두운 시대에도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세상 어둠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은 항상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대개 다수에 의해 어리석은 사람으로 몰리지만 그러나 '그 날이 임하면' 현실은 항상 역전되었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바로 그런 사람들, '남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말씀입니다.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 습 3:14
언뜻 스바냐 선지자의 이 예언은 동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 어둡고 불의한 시대를 살면서 기뻐하며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까? 스바냐는 노래하고 기뻐해야 할 이유로서 '그 날과 그 때'를 언급합니다. 무엇보다 스바냐 선지자는 16절 이하에서 '그 날'에 대해, 그리고 19절 이하에서 '그 때'에 일어날 일에 대해 설명합니다. 먼저 '그 날'에 대한 설명입니다.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 습 3:16
여기서 말하는 '그 날'은 어떤 날입니까? 15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는 그 날'입니다. 바로 그 분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습 3:17)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바라보실 때,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시는지를 스바냐 선지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 습 3:17
하나님께서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신다니, 참으로 놀랍고도 따뜻한 표현입니다. 영화 '사도'에서 영조는 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겨 "네 존재 자체가 역모야!" 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존재에 대한 마음에 따라 이렇게 표현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들, 성소를 더럽히고도 수치를 알지 못하던 사람들(습 3:4, 5)을 향해서는 가차 없이 화(禍)와 심판을 선포하시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향해서는 그토록 "너로 말미암아 기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날이 임했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떤 무리에 속해 있을까요? 쫓겨난 사람들 가운데 있을까요? 회개한 사람들 가운데 있을까요? 아니면 남은 자들 가운데 있을까요? 만약 우리가 전심으로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가 소수의 남은 자 가운데 속해 있을 수만 있다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로부터 "너로 말미암아 기쁘다"는 찬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자녀의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를 바라보며 기뻐하는 엄마와 아빠의 시선,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렇듯이 나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시며 기쁨을 이기지 못해 하시는 하나님의 시선에서 우리의 행복은 익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 행복을 주시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시겠다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이 대림절에, 주님을 그토록 고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스바냐 선지자는 '그 때'에 일어날 일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 습 3:19
여기에 거론되는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도 바로 여기 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에 바벨론은 천하무적의 제국입니다. 때때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바벨론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그 때'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바벨론 제국의 위세가 여전히 기세등등하고, 그 위세가 도무지 꺾일 것 같지 않던 시대에 스바냐 선지자는 이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 선포를 사람들은 어떤 심정으로 들었을까요? 아마도 대개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읽으셨습니까? 이 말씀이 현실적으로 다가오셨습니까? 그래서 이 말씀을 붙들고 현실을 넘어설 수 있겠습니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스바냐가 거론한 사람들의 운명을 훗날 예수님께서도 똑같이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가 바로 저는 자, 쫓겨난 자, 수욕 받는 자였습니다. 그 사실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고전 1:2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날', '그 때'에 이 상황을 정확하게 반전시키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이 진리에 희망을 두고, 그 반전을 현실로 여기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 빌 4:4
이 말씀에 동의하실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그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기쁨은 철저하게 '주 안에서'라는 조건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의 이 말씀은 앞에 있는 1절의 말씀을 이해해야만 비로소 이해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 빌 4:1
바울은 우리에게 '주 안에 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원문에서 이 말씀을 찾아보면, 아주 중요한 단어가 우리말 번역에서 빠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원문에는 '스테케테(στήκετε)'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굳게 서라', '진실하게 서라' 그런 뜻입니다.주 안에 '굳게 서는 것', '진실하게 서는 것' 그것만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그러면 주 안에 굳게 서고 진실하게 서는 것,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대신 다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 빌 4:5
여기서 관용은 헬라어로 '토 에피에이케스(τὸ ὲπιεικὲς)'입니다. 손해를 보거나 역경을 당해도 동요하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는 '영적인 인내'를 가리킵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 관용을 교회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보았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말씀은, 관용을 교회의 정체성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사람들의 결정적인 특징이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우리가 관용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기독교신앙 자체를 모르고 있거나, 세상 삶에 길들여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면서 동시에 세상의 삶에 길들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긴장관계, 또는 변증법적인 관계입니다.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오면 당연히 세상 삶에 길들여지지 않을 것이고, 세상 삶에 길들여지지 않아야만 비로소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말씀에 따르면 관용은 주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믿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관용을 말하면서 바로 이어서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라고 덧붙인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그대로 연결되고 있습니까?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이 말씀에서 '주(主)'는 헬라어 '퀴리오스(κύριος)'의 번역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 당시에 이 퀴리오스라는 단어는 로마 신민이 황제를 가리킬 때만 사용하였는데, 여기에서의 퀴리오스는 생사여탈권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는 이 단어를 예수님께 붙였습니다. 나의 생사여탈권을 가지신 분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라는 고백인데,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은 내 생사여탈권을 가지신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는 고백입니다.오늘 우리는 예배 때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라고 사도신경을 입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고백을 할 때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는 주님 앞에서 겸허하게 옷깃을 여미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은 오늘 복음서에서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라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눅 3:9)와 연결됩니다. 여기에서 세례 요한은 '이미'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 눅 3:9
좀 더 긴박감을 더해주는 표현입니다.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 라고 외쳤을 뿐 아니라,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이미' 심판이 시작되었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면 당시의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이 경고를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였을까요? 그들은 긴박성 안에서 이 경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애절한 심정이 되어 요한에게 물었습니다.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 눅 3:10
그들의 이 긴박하고 애절한 물음은 대림절을 지나며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물음입니다. 이 물음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한 의지가 강하게 배어나는 물음들이었습니다. 이 물음에 대한 요한의 대답은 간명합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눅 3:11) 요한이 세리에게 한 대답도 간명합니다.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눅 3:13) 군인들에게 한 대답도 간명합니다.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눅 3:14) 왜 그래야 합니까? 주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습니다.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질 것입니다.(눅 3:9) 그래서 우리는 지금 회개해야 하고, 지금 새로운 행동을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 의복을 나누어야 하고, 지금 음식을 나누어야 하고, 지금 불의한 일을 중단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보고 반색하시면서 "내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길 수 없단다."라고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행복한 대림절을 보내고 가슴 설렌 성탄절을 맞이하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세상의 중심에 서려는 욕망에 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② 주님의 날을 고대하며 '하나님의 기쁨'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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