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대림절 제2주 진리는 광야에서 들려온다
■ 읽기|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말 3:1-4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2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 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4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응송 | 눅 1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서신 | 빌 1:3-11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복음 | 눅 3:1-6
1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3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말 3:3을 묵상하십시오. 언약의 사자가 오셔서 레위 자손들을 위해 할 일은 무엇입니까?
② 눅 3:4b-6을 묵상하십시오. 여호와께서 보내신 사자로서 요한은 이사야 선지자의 책에 의하면 광야에서 뭐라고 외칩니까?
③ 빌 3:6을 묵상하십시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는' 그 사역을 언제까지 이루십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진리는 광야에서 들려온다.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대림절에 해당하는 '애드벤트(Advent)'라는 말은 '오다', '도착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7세기경 라틴어 문헌에 나타난 성탄을 준비하는 시기의 명칭이 '아드벤뚜스 도미니(Adventus Domini' 즉 '주님의 찾아오심'입니다. 본디 이 말은 로마제국에서 황제가 즉위한 후 여러 도시들을 방문할 때, 황제의 방문을 일컬어 '그 분의 방문(His Advent)'이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입니다. 345년의 로마 연대기를 보면 콘스탄티노 황제의 즉위 일을 '아드벤뚜스 디비(Adventus Divi)'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찾아오심'을 '아드벤뚜스 도미니(Adventus Domini'라고 한 것은 매우 상징적이고 의미심장한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로마 황제를 신(神)으로 추앙하던 시대에,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주님이시다. 우리는 오직 그 분만을 기다리는 공동체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들의 이러한 신앙고백은 편안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로마 정부에 의한 모진 탄압을 견디며 그들은 '오직 예수만이 그리스도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들이 모진 탄압을 이겨내고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아드벤뚜스 도미니(Adventus Domini' 즉 '주님의 오심'을 참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어령 교수는 '저 긴 옷고름의 의미'라는 글에서 '춘향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춘향의 '십장가'라고 했습니다. "춘향은 모진 매를 맞는데, 그냥 울고만 있지 않는다. 반항하고 싸우려고 하지도 않는다. 노래를 부른다. 형장이 한 대를 때리면서 "하나요!" 하면, 춘향은 일자를 운으로 하여 노래를 불렀다. "일편단심(一片丹心) 굳은 마음 일부종사(一夫從事) 뜻이오니, 일개 형벌 치옵신들 일 년이 다 못 가서 일각인들 변하리까?" 형장이 계속해서 때리면서 "둘이요!" 하면, 춘향은 "이부절(二夫節)을 아옵는데, 불경이부(不更二夫) 이내 마음이 매 맞고 죽어도 이 도령은 못 잊겠소."라고 노래했습니다. 춘향이 열 대를 맞으면서 맞을 때마다 계속하여 매 맞는 숫자를 운으로 하여 노래를 부른 것이 '십장가'입니다. 변학도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춘향이 그리 매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십장가를 부를 수 있던 건 이몽룡이 다시 찾아올 거라 믿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오늘 복음서가 자리한 역사적 정황은 AD 27년경입니다. 이때 유다인들은 주권을 상실하고, 로마에 의해 영토마저 네 지역으로 분할된 상황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로마의 식민통치와 관료들의 부패, 유대교 지도자들의 탈선으로 희망을 잃었고, 사회는 정치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갈등과 대립이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복음서에서 누가는 세 장면을 차례로 보여주며 당시 역사 속에서 어떻게 희망이 시작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장면인 1절과 2절에서는 당시 역사의 중심에 섰던 인물들의 이름이 열거되는데, 우리는 그들의 면면을 보면서 당시 시대가 얼마나 어두웠을 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 황제 디베료,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 갈릴리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 이두래 분봉왕 헤롯 빌립과 아빌레네의 분봉왕 루사니아, 그리고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등등 당시 역사의 주역이었던 인물들을 거론하던 누가는 2절 말미에 들어서면서부터 스가랴의 아들로서 광야의 선지자인 세례자 요한을 소개합니다. 이건 매우 의도적인 배치로 여겨집니다. 당시 세계의 주류였던 로마 황제 디베료나 총독 본디오 빌라도나 유다의 왕들인 헤롯 일파와 세례자 요한은 삶의 자리도, 삶의 지향도 현저하게 다른 가운데, 첨예한 대립의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둘째 장면은 3절 말씀인데, 여기에서는 세례 요한이 선포한 말씀이 소개됩니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 눅 3:3 공동번역
그리고 셋째 장면인 4-6절에서 누가는 세례 요한의 사역을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하는 이사야의 예언과 연결시킵니다. 결국 누가가 보여주는 당시의 장면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메시지는 이런 것들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진리는 권력과 부유함이며, 반면 그리스도의 진리는 이러한 세상의 진리와 대립한다. 세상의 진리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도시를 배경으로 해서 펼쳐지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진리는 빈들로부터 시작되고 있으며, 권력과 부유함과 대립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진리에 의해 세상이 추구하는 진리가 근본부터 뒤흔들리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해 이렇게 선언합니다.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 눅 3:5
그리스도의 진리는 세상 진리와 추호도 절충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급진적으로 세상 진리에 도전하고, 마침내 복음에 입각한 대안적 가치를 실현해나갑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다른 것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펼쳐지는 복음에 입각한 대안적 진리를 믿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좀 더 심층적으로 보겠습니다.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 눅 3:1-2a
누가는 먼저 당시 지중해 연안을 장악하고 있던 시대의 중심인물들을 소개합니다. 디베료는 통일로마제국의 2대 황제로서 측근 정치를 펼치며 로마를 다스렸지만 끝내 반역이 두려워 많은 사람을 처형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로마가 유대 땅에 파견한 총독으로서 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 총독으로 재임했는데, 유대교와 유대문화를 멸시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분봉왕(tetrarch) 헤롯 안티파스는 당시 갈릴리를 다스리던 왕입니다. 그는 분봉왕의 지위에 만족하지 못하고, 선친인 헤롯대왕의 영토를 전부 다스리기 위해 갈릴리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고 당시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티베리우스' 즉 '디베랴'로 바꿉니다. 그는 도시건설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갈릴리와 베뢰아의 농민들을 수탈했습니다. 그의 동생 헤롯 빌립은 갈릴리의 북부와 동쪽 지역인 이두래와 드라고닛을 다스렸고, 루사니아는 안티레바논 산맥 너머의 땅, 그러니까 갈릴리에서 아주 먼 땅을 다스렸습니다. 누가는 이렇게 정치적 지형도를 제시한 후에 두 사람의 대제사장, 즉 안나스와 가야바를 언급함으로 당시 종교적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로마가 임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보다 황제의 뜻을 어기는 걸 더 두려워했습니다. 이렇게 정치도 종교도 민중들에게 희망이 되지 못하던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를 일컬어 유대의 암흑기라고 합니다. 지난 400년 동안 그렇게 이 땅은 참된 선지자 한 사람 없는, 그러다 보니 들려오는 말씀도 없는 어두운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어두움이 끝나는 순간을 딱 한 마디로 표현합니다.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 눅 3:2b
간결하지만 기막힌 말씀입니다. 어둡고 답답했던 400년의 암흑을 걷어내는 하나님 말씀이 드디어 빈들에서 요한에게 들려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불현듯 들려온 것이 아닙니다. 일찍이 말라기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말씀입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이 바로 그 예언이고, 이 예언을 끝으로 이스라엘은 암흑의 시대로 돌입합니다.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 말 3:1
이 말씀은 당시 사회에 팽배해 있던 백성들의 회의(懷疑)와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말 2:17)고 묻는 백성들의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어떻게 오늘 복음서의 말씀과 연결되는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말라기 선지자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400년 후에 두 분의 사자를 보내십니다. 먼저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말 3:1a) 이 말씀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할 '세례자 요한'에 관한 예언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말 3:1b) 라는 말씀에서의 '언약의 사자'는 그 후에 오실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 말 3:2
'언약의 사자가 임하시는 날'을 누구도 당할 수 없고, '그가 임하시는 때'에는 아무도 설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암 5:18을 상기시킵니다.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언약의 사자가 임하시는 날'은 구원의 날이 아니고 심판의 날입니다.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은 그날이 불순물을 걸러내는 날임을 설명해줍니다. 그 날에는 누가 당하겠으며, 누가 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다행인 것은 '언약의 사자'가 임하기 전에 그의 길을 준비할 '세례 요한'을 먼저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먼저 와서 할 역할이 무엇입니까?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 말 3:3
'레위 자손'이란 구약시대에 백성을 대신해서 제사를 드려주던 사람들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구약 전통 안에서 설명하는 것인데, 오늘 우리 식으로 이해하면 바로 저와 여러분 즉 '예배자들'입니다. 요한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해서 공의로운 제물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 그대로 400년간의 침묵을 깨고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했다는 것이 오늘 복음서에서 누가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 눅 3:3
요한에 의해 회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후로 의로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언약의 사자'가 임했을 때, 당당하게 서서 '심판을 축제로' 바꿀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에 관한 예언은 말라기 선지자만 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는 4절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가 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규정한 것을 소개합니다. 이 말씀 역시 참 중요합니다. 요한은 주로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광야는 문명과는 거리가 먼 곳입니다. 광야는 권력과도 거리가 먼 곳입니다. 흙과 돌과 먼지, 하늘, 구름, 야생화와 들짐승이 연상되는 지역이 광야입니다. 사람이 살만한 곳이 못됩니다. 누가 그런 곳으로 가겠습니까? 기독교 역사 속에서는 사막의 교부들이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로 들어가기 위해 사막이나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들은 백척간두의 상황에서 영혼의 소리를 듣고, 그 '들은 소리'에 반응하며 일상을 살아냈습니다. 누가는 그렇게 살았던 세례 요한에 대해 오늘 복음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 눅 3:4
이 말씀은 누가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인 사 40:3-5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세례 요한보다 6백년쯤 전인 기원전 6세기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비참할 때, 이사야 선지자는 신탁을 받았습니다. 그 신탁의 내용은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것이었고(사 40:1), 위로의 근거는 '노역의 때가 끝났다(사 40:2)'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포로로 70년의 세월을 보낸 유대인들이 다시 조국으로 돌아가는 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광야와 사막을 통과해야 했고, 골짜기와 산을 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사막에 길을 내야 했습니다. 그래야 다 함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준비를 마치면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볼" 것이었습니다(사 40:5). 그런데 5백여 년 전에 선포된 이사야의 예언이 지금의 세례 요한과 무슨 상관이 있었을까요?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사야가 처한 상황과 지금 세례 요한이 처한 상황은 다릅니다. 더 이상 광야와 사막에 길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왜 이사야의 예언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전하는 것일까요? 그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광야와 사막에 실제적인 길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오실 예수님을 위한 길을 내는 것으로 요한은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이 하실 일을 미리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무엇인지 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 눅 3:5
당시의 세계는 '로마 제국의 질서' 즉 힘의 논리에 의해 작동되고 있었습니다. 힘이 있는 사람은 높은 자리에 서고, 힘없는 사람은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황제로부터 시작해서 저 아래 노예까지 위계질서가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모두가 높은 자리로 올라서기 위해 애를 쓰지만 그러나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질서가 마음에 드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골짜기 끝까지 내려간 사람에게 이런 세상은 지옥이나 다름없습니다. 누가가 세례 요한을 보며 이사야 선지자의 이 외침을 떠올린 이유는, 자기가 살던 시대가 바벨론 포로 시대와 다를 것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눅 3:1에 기록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며 그 시대가 어떠한 시대였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황제와 총독과 왕, 그리고 타락한 종교꾼들이 불의한 질서를 만들고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보는 이상(理想)은 이런 겁니다. 슬픔의 골짜기는 메워지고, 교만함의 산들은 낮아지고, 굽은 것 즉 속이는 것은 곧아지고, 험한 길 즉 악한 것은 평탄해 질 것이다. 바로 그 사실을 누가는 이렇게 선언합니다.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 눅 3:6
누가를 비롯해 초기 기독교는 이사야 선지자의 이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이상도 주님과 같아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대림절 영성은 주님이 통치하실 그런 세계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대림(待臨)하며 내가 변화될 때, 그 때 모든 육체는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바울은 기도합니다.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 빌 1:3-5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삶" 이것이 바로 주님과 이상을 맞추어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우리에게 있을 때, 비로소 우리 사회에서 슬픔의 골짜기가 메워지고, 교만함의 산들이 낮아지고, 속이는 것이 곧아지고, 악한 것은 평탄해 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단언합니다.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 빌 1:6
대림절이란, 이미 내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계속 당신의 일을 하시도록 우리를 그 분을 향해 개방해 놓는 계절입니다. 황제나 총독이나 왕이 이상인 시대에, 우리는 빈들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임하는 자리에 설 수 있어야 하고, 말씀 안에서 이상을 꿈꿀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만이 그렇게 살아낼 수 있습니다. 춘양이가 십장가를 부르며, 기다림 속에서 여인의 절개를 지켜내듯, 우리는 성가를 부르며, 기다림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절개를 지켜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다가오는 성탄절이 참된 축제의 날이요,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 또한 '서서' 주님을 모시는 행복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세상의 질서에 편승하여 힘의 논리로 살려 하지 않는가?
② 광야의 진리를 따라 '하나님의 구원의 때'를 대망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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