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마지막주 '나의 왕' 예수 그리스도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삼하 23:1-4
1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노라 2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응송 | 시 132
네 자손이 내 언약과 그들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그들의 후손도 영원히 네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도다
서신 | 계 1:4b-6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복음 | 요 18:33-37
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 묵상 | meditatio
① 요 18:37을 묵상하십시오. 세상나라를 지탱하는 싸움과 달리 주님의 나라를 세우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입니까?
② 계 1:5을 묵상하십시오.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 도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③ 삼하 23:2을 묵상하십시오. 여호와의 영이 누구를 통해 말씀하시며, 그의 말씀이 어디에 있다고 다윗은 고백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나의 왕' 예수 그리스도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지난 한 해 동안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따라 걸어온 걸음에 대해 나름의 감회를 가질 수밖에 없겠습니다. 농부가 수고와 땀으로 일군 한 해의 수확에 대해 해질녘 타작마당에서 헤아려보듯이, 지나간 한 해를 그리스도인으로서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얼마나 성숙해졌는지, 설렘과 떨림으로 헤아려보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교회력으로 한해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과,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신앙의 새해'로서의 대림절은 마치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이하듯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다는 점에서 24절기 생태력과도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소설(小雪)이 사흘 지난 이즈음 농부들이 가을걷이를 곡간에 들이고 동시에 다가오는 엄동설한을 대비해 김장을 서두르고, 시래기를 엮어 달고, 겨우내 소먹이로 쓸 볏짚을 모아두듯이, 이 시기의 그리스도인들은 한 해 동안 읽고 묵상해 온 말씀들을 마음 창고에 저장하고, 또 다가오는 신앙의 새해, 대림절을 위해 내적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참 중요합니다. 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일인 오늘을, 교회는 전통적으로 '왕국주일'로 지키고 있기도 합니다. 전례적 교회들은 이 왕국주일을 일컬어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라고 부르는데, 그리스도께서 나의 왕 되심을 고백하며 내 삶의 지향을 예수님께 복종시키라는 것이 이 왕국주일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따라서 교회력의 한 해를 마감하고 한 주 앞으로 다가온 대림절을 바라보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한 번 자신을 꼼꼼하게 '진단(診斷)'하며 정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왕이긴 한지, 내가 나의 왕이 되어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성찰해야만 하겠습니다. 고맙게도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성찰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오늘 구약성경은 여호와의 영이 다윗을 통해 말씀하시기 위해 당신의 말씀을 그의 혀에 두셨을 때(삼하 23:2)의 상황입니다. 이때 다윗은 예수님을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라 고백하며,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다'며 찬미합니다.(삼하 23:3, 4) 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경외하시는 까닭에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자신이 자신의 왕이 되어 살아가는 시대에, 공의로 나를 다스리시는 주님께 내 존재를 맡길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 고백하며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고백합니다.(계 1:5) 요한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왕권은 패배의 상징인 십자가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의 피를 흘리심으로서 진정한 왕이 되셨으며, 그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구원받은 우리를 심지어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계 1:6)
복음서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향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 18:33), "네가 왕이 아니냐"(요 18:37)고 집요하게 묻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요 18:37a) 하시면서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요 18:37b)고 하십니다. 진리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 백성의 도리는 '그 나라 왕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력이 저무는 이 시점에서, 우리 자신을 말씀에 비추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그분 말씀을 들으며 한해를 걸어왔는지? 아니면 실상은 다른 왕을 모시고 내 야망에 겨운 길을 걸어왔는지?" 이런 질문은 늘 고통스럽습니다. 삶이 고백을 따라가지 못하는 내 현실이 이런 질문 때마다 알몸처럼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선포되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감동합니다. 하지만 일상의 자리로 돌아가는 순간, 우리는 이내 다른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실 일상에서의 우리는 주님이 아닌 다른 왕을 섬기는 겁니다. 주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주님이라고, 나의 왕이라고 부르면서 왜 내가 아닌 세상 눈치를 보고 사는 것이며, 왜 항상 네 뜻이나 네 생각이 더 중요한 것이냐?" 왜 그런 걸까요? 주님의 통치 방식이 세상 왕의 통치 방식과 그 성격과 지향에서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는 일체의 강제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왕이라고 고백하지만 사실은 주님이 하나도 두렵지 않은 겁니다. 때때로 세상 임금들의 왕권은 정적이나 백성들의 피를 제물로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왕권은 철저하게 자신의 희생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심지어 때로는 무능해 보이기도 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그 무능함과 나약함 속에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감추어두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왕들과 다르게 불의한 폭력의 희생제물이 되심으로서 진정한 왕이 되셨습니다. 오늘 복음서 안에 있는 예수님과 빌라도의 대화를 심층적으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 요 18: 33, 34
유대의 총독인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서 지금 요한은 '주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복음서들은 한결같이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라는 낯선 존재 앞에서 매우 당혹스러워하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어쩌면 살아오면서 빌라도는 예수님 같은 인물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거룩한 분 앞에 서 있구나!" 하는 이 느낌은 성경에서 주님을 만난 이들의 한결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런 편견도 없이 사람을 대하는 사람, 세속적인 권위 앞에서 주눅 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오만하게 사람을 내려다보지도 않는 사람, 그저 있음 자체로 내 안에 있는 선한 것을 이끌어내는 사람, 예수님은 그러한 분이셨습니다. 권위를 상징하는 빌라도의 화려한 의복은 이 남루한 사나이 앞에서 오히려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겁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 이 질문은 탐문하는 질문입니다. 그는 갈릴리 출신의 이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를 고발하는 이들은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8:30)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가 한 '행악(行惡)'이란 게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 빌라도의 질문에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고 되물으시고,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a) 그리고 재차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b)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이 세상' 혹은 '여기'입니다. '이 세상'은 힘 있는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힘이 곧 정의로 인식되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로마는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렸습니까? 그것은 네 단어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신화, 전쟁, 승리, 평화'입니다. 그들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뿐 아니라 황제까지도 신으로 숭상했습니다. 황제에게는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구원자', 그리고 '주'라는 호칭이 부여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지칭할 때 쓰는 모든 단어가 사실은 황제들에게 적용되었던 단어였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통해 자기들의 세력을 확장했고, 로마의 힘에 압도된 다른 나라들이 반란조차 꿈꿀 수 없게 된 상황을 가리켜서 평화라고 했습니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소수 특권층만의 평화였습니다. 그들의 행복은 다른 이들에게는 고통이었고 굴욕이었습니다. 로마는 점령한 지역에 로마의 문화를 이식시켰습니다. 그 통로가 된 것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로마가 제국의 여러 도시들을 연결시키기 위해 만든 '비아 이그나티아(via Egnatia)' 즉 도로와 항구였습니다. 로마는 그 길이 연결된 도시의 입구마다 제국의 위용과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문을 세웠습니다. 또 로마는 제국의 신화를 확장하기 위해 신전들을 세웠고, 신들과 황제의 신상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또 도시마다 원형극장을 세우고 크고 화려한 목욕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그 시설을 이용하는 이들은 마치 자신이 로마의 일등 시민이 된 것 같은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이런 흔적들은 지금도 지중해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이 세상'이란 이렇게 힘의 논리로 지배되는 세상이었습니다.그런데 주님은 '내 나라'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나라는 '그런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빌라도에게 그의 세상과 질적으로 전혀 다른 세상을 보여주십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오직 사랑으로만 이루어지는 세상입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어쩌면 그것이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요 18:35)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기도 했습니다. 주님은 힘 있는 자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왕이 아니라, 병든 사람, 귀신 들린 사람,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지신 어지신 왕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왕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온 산과 들을 뛰어다니는 사랑의 왕입니다. 그 왕은 오랜 방황 끝에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향해 맨발로 달려 나가는 아버지 같은 왕이십니다. 그 왕은 지배하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왕이고, 백성을 위해 스스로 희생당하는 왕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마음에 드십니까? 사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보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통치자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 질서와 똑같은 힘의 질서를 만들어 냈고, 세상 정치와 똑같이 종교권력을 탐해왔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머리에서 가시 면류관을 벗겨내고 대신 금으로 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수많은 교회와 성직자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 머리의 관을 금으로 교체했습니다. 교회는 화려해지기 시작했고 귀족들을 위한 교회로 탈바꿈 했습니다. 교회의 지향이 세상과 똑같아지면 사람들은 교회에서 금을 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내 나라는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로 이루어지는 나라이고, 내 나라는 지배가 아닌 섬김으로, 총이 아닌 십자가로 다스려지는 나라이고, 옳은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나라이고, 땅의 가치가 아닌 하늘의 가치로 채워져 가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빌라도는 여전히 집요하게 "네가 왕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 요 18:37
예수님께서는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라"시면서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첨예하게 드러나는 차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빌라도가 집요하게 권력에 대해 묻는데, 예수님은 진리에 대해서만 말씀하십니다. 빌라도의 관심이 권력에 있다면 예수님의 관심은 오로지 진리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또 다른 이름은 '진리에 속한 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빌라도의 반응입니다.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요 18:38
이 반응은 냉소적인 반응입니다. '진리가 나에게 무슨 이익을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이익에만 눈이 먼 천박한 소인배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진리는 관심 밖의 세계였습니다. 이 세상이 그렇습니다. 세상은 어떤 말에 귀를 기울입니까? 당장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말입니다. 만약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요?" 하고 물은 후에, 주님의 말씀을 경청했더라면 이후로 그의 삶은 퍽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은 후에 더 이상 대화를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온통 정치적인 이해득실에 마음이 가 있어서 주님의 대답에 귀 기울일 여유가 없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혹시 그 관심사에 치여 주님의 말씀을 들을 여유가 없고, 진리를 성찰한 마음의 여백조차 없이 허겁지겁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빌라도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요 8:31, 32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리 가운데 거할 때 비로소 세상의 어지러운 '환영(幻影)'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요한은 말씀합니다.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 계 1:5a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셨다고 사도 요한이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 계 1:5b-6
요한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왕권은 사랑과 희생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세상의 왕권이 치열한 정쟁(政爭)으로 쟁취된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왕권은 십자가의 희생으로 완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이렇게 촉구합니다.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희생으로 이루어 주신 사랑이 모든 사회 구조 속에 스며들 수 있도록 신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 사랑과 희생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께서 감당하시던 사랑과 희생 사역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기셨으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랑과 희생으로 이 사역을 감당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사회 구조 속에 스며들 수 있도록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일에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일찍이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 삼하 23:1b-5
우리 고백이 다윗 같기를 원합니다. "나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영이 나를 통해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 혀에 담겨 있어서 사람을 대할 때 공의(公義)로 대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듯 사람을 경외하는, 그리하여 돋는 해의 아침 빛 같은 삶, 땅에서 돋아나는 아기 풀처럼 신선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진정으로 주님이 내 왕이시라면, 우리는 그런 고백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 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세상의 권력과 가치들이 나의 왕이 되어있지 않은가?
② 나의 왕이신 그리스도처럼 사랑과 희생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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