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26주 '여호와의 큰 일'을 바라보는 시선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욜 2:21-24
21 땅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일을 행하셨음이로다 22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24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응송 | 시 126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서신 | 딤전 2:1, 2
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복음 | 마 6:25-33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마 6:25, 33을 묵상하십시오. 성도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 이며 구해야 할 참된 가치는 무엇입니까?
② 욜 2:21-27을 묵상하십시오. 요엘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기뻐하며 즐거워할 이유를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③ 딤전 2:1, 2을 묵상하십시오.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은 어떠한 상태 로부터 임하는 것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여호와의 큰 일'을 바라보는 시선
김현승 시인의 '감사하는 마음'에 따르면 '감사하는 마음'은 곧 '아는 마음'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마음이고, 내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마음이고, 어디에 시선 두고 살아야 할지 아는 마음입니다. 오늘 성서일과는 우리 모두에게 바로 그 시선을 열어주는 말씀입니다. 복음서의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마 6:25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이 말씀, 어쩌면 주님의 이 말씀은 지금 당장 굶주리는 사람들, 오늘 염려하지 않으면 내일 한파에 내몰릴 사람들에게 조롱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팔레스티나 민중들의 상황이 얼마나 열악한지 몰라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끼니를 잇기 어렵다는 사실도 알고 계셨고, 가까운 시일 안에 그런 상황이 개선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상황을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것은, 땅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 다니는 이들이 안타까우셨기 때문입니다. 가진 게 없다 해서 믿음까지 빈곤해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염려(念慮)'란 마음이 분열된 상태, 즉 온전함이 무너졌을 때 일어나는 현상인데, 냉정하게 말하면 우리가 이 염려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내가 가로채는 것입니다. 상황이 힘들수록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시선이 더 절실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소중합니다. 주님은 '음식'보다 '목숨'이 더 중요하고, '의복'보다 '몸'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중요하다'는 단어는 '플레이온(πλειόν)'입니다. '○○보다 큰'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이 말씀은 '목숨이 음식보다', '몸이 의복보다' 더 크지 않느냐는 겁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음식은 우리 목숨을 위해 필요한, 그리고 의복은 우리의 몸을 위해 필요한 소모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염려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뭔가 우선순위가 바뀌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면서 '내 목숨이 무엇을 위한 목숨인지', '내 몸이 무엇을 위한 몸인지'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삶이 곤고할수록 우리 시선을 더 큰 세계, 본질적인 세계로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치의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이들은 희망의 불모지인 그곳에서 비인간이 될 것을 강요받았습니다.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마치 짐승처럼 먹을 것 때문에 다투어야 했고, 사소한 편익을 위해 동료를 배신해야 했습니다.이탈리아 출신의 작가인 '프리모 레비'는 그 참혹한 수용소에서 자기를 지켜준 것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한 대목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대는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태어났도다."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 비인간화시키려는 이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 말로 수용소와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이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은 육인 동시에 영이기 때문입니다. 육의 굶주림도 문제이지만 영의 굶주림은 더 큰 문제입니다. "염려하지 말라" 이 말씀은 삶의 지혜가 아닌 복음으로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오직 시선이 예수님께 머물러 있는 성도만이 성부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을 믿고 염려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모르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버지께서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염려합니다.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창조의 신비에로 이끌어 가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마 6:26
새들은 먹이를 축적하지 않습니다. 축적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먹이십니다. 물론 주님의 이 말씀은 게으름에 대한 옹호나 성실한 삶에 대한 비판이 절대 아닙니다. 일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돈을 목적으로' 일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도박을 끊지 못하는 사람의 문제를 습관이나 중독의 차원에서 접근하지 말고, 가치관의 문제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돈에 집착되어 있는 그들의 가치관을 '돈보다 귀한 것'에로 돌릴 수 있다면 지금 돈 때문에 망가지고 있는 자기 영혼이 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귀한 것임을 알면 그들이 돈의 악순환을 끊고 도박장을 떠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정말 세상모르는 순진한 생각인 걸까요? 그런데 보십시오. 어떤 동물도 돈을 목적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그저 창조된 자기 본분을 다할 뿐입니다. 새는 날고, 지저귀고,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습니다. 새는 자기에게 주어진 창조 질서에 충실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새가 먹이를 발견하는 것은 그가 일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기에 먹이를 놓아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새는 새의 일을 했을 뿐입니다. 새가 씨를 뿌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씨를 흩어놓으셨습니다. 소는 밭을 갈고, 말은 짐을 운반하고, 양은 털과 젖을 제공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 노동의 대가로 풀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풀이 돋아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거기에 창조주의 기쁨이 있고, 거기에 피조물의 행복이 있습니다. 그걸 모르거나 무시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쌓아놓기 위한 염려에 골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새 이야기 끝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 마 6:27
이 말씀은 우리의 실존적 한계를 분명히 해 주는 말씀입니다. 염려는 안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염려가 해줄 수 있는 건 사실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주님은 염려에 찌든 우리 시선을 어떻게 해든지 다른 곳으로 이끌려 하십니다.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 마 6:28
"들의 백합화를 보라!" 정말 아름다운 표현이고, 우리 시선의 방향을 수정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의 '봄'은 '견(見)'이나 '시(視)'가 아닌 '관(觀)'입니다. 현상너머의 세계를 꿰뚫어 성찰하는 그런 시선으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돌봄으로 짜인 세계를 보는 눈을 뜨면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염려가 허구임이 드러납니다. 주님은 백합화를 보라시면서 옷감을 만드는 두 작업을 예로 드시는데, 하나는 남자들의 일인 '수고'이고, 하나는 여자들의 일인 '길쌈'입니다. '길쌈'이란 옷감을 짜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수고'와 '길쌈'은 의복을 얻기 위한 남자와 여자 즉 인간의 총체적인 노력입니다. 주님께서 왜 백합을 보라실까요? 백합은 새들 만큼의 노력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쁘게 입히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백합 이야기의 끝에서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말씀을 꺼내십니다.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 마 6:29
열왕기상 10장을 읽다 보면 솔로몬의 시대가 얼마나 화려하고 풍요로웠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방에서 교역을 위해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대표적인 게 스바 여왕의 방문입니다. 아라비아 반도 끝에서부터 찾아와 솔로몬을 만난 후, 그는 솔로몬의 지혜에 놀라고, 신하들이 입은 옷과 식탁에 차려놓은 음식과 집기의 화려함에 또 놀랐습니다. 솔로몬은 수백 개의 방패에 금을 입혀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부각시켰습니다. 또 상아로 큰 보좌를 만들고, 거기에다 잘 정련된 금을 입혔습니다. 여섯 계단 위에 놓인 그의 보좌는 일곱 번째 계단이 됨으로써 세계의 완성자라는 의미를 강화했습니다. 한마디로 솔로몬 시대는 황금시대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예수님은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의 영광이 이 꽃만큼은 아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반전이 눈부십니다. 이 통쾌함이 기쁩니다. 솔로몬의 인위적인 영광을 탐하는 세상을 거슬러 주님은 들꽃 하나에 스며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살짝 들추어 보여주십니다. 혹시 이 감사의 계절에 우리가 감사를 잃고 있다면, 그것은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에 욕심이 과하거나 새나 들꽃보다 믿음이 작아 그런지도 모릅니다. 제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그렇습니다.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 마 6:30
'오늘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 얼마나 찰나의 존재입니까? 그러나 잠시 후 사라질 그 들풀을 위해 하나님은 예쁜 옷을 짓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노력을 아는 성도는 결코 '염려라는 이름의 불신앙'에 자기를 던져줄 수 없는 것입니다. 염려의 정체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결여입니다. 주님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염려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전형적인 인물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 마 6:32
여기에서 이방인들이란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없기 때문에 오로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세계를 못 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세계'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에의 중독' 그것의 다른 이름이 바로 염려와 근심입니다.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러면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마 6:33
방송인 김제동에 따르면 '나침반 바늘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방향을 제대로 가리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 즉 제 소명을 다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런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 즉 제 소명을 다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 말입니다. 우리가 안간힘을 쓰며 지켜야 할 고결한 가치를 구약성경에서 요엘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땅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음이로다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 욜 2:21-24
무엇보다 우선으로 신자들이 구하고 지켜야 할 고결한 가치는 신앙의 시선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큰 일'을 바라보는 시선, 그 분이 돋아나게 하시는 새싹과, 그 분이 열매 맺게 하시는 열매, 그 분이 내리시는 이른 비와, 그 분이 내리시는 늦은 비를 보아낼 수 있는 시선 말입니다. 그 시선에서 우러난 감사만이 진짜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바울의 편지를 봅니다.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 딤전 2:1-5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새로운 차원의 삶을 소개합니다. 그것은 바로 고요함과 평안함입니다. 고요함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시선입니다. 그리고 평안함은 그 믿음의 시선의 결과입니다. 그러고 보면 추수감사절은 하나님의 신비를 고요히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새를 먹이고 들풀을 입히시듯 나를 돌보시는 것에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여호와의 큰 일'을 바라보는 시선, 올해의 추수감사절은, 바로 그 믿음의 시선을 회복하고 평안함과 감사함으로 주님을 찬미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 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세상 것들에 집착된 마음이 염려로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② 하나님 하신 큰일을 바라보며 새로운 가치관에 눈 떴는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41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6주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
KOR | 2024.11.17 |
41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5주 나를 넘어 하나님께로
|
KOR | 2024.11.10 |
410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4주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
KOR | 2024.11.02 |
409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3주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
KOR | 2024.10.26 |
408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2주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
KOR | 2024.10.19 |
407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1주 하나님만이 오직 최선이시다
|
KOR | 2024.10.12 |
406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0주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KOR | 2024.10.05 |
405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8주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
|
KOR | 2024.09.21 |
404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7주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
KOR | 2024.09.14 |
403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
KOR | 2024.09.07 |
40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
KOR | 2024.09.01 |
40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
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