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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3주 "듣는" 신앙에서 "보는" 신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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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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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7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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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1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욥 42:3-6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 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응송 | 시 34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서신 | 히 7:23-27
23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27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복음 | 막 10:46-52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 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 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10:51을 묵상하십시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께 맹인은 뭐라고 대답합니까?
② 욥 42:5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을 보게 하고 욥 자신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긴 질문 끝에 욥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③ 히 7:25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향한 성경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묵상 나눔
우리는 오늘 복음서의 말씀이 있기 전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이 나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신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주님의 수난 예고 전후에 제자들의 영적 상태를 암시하는 사건들을 의도 적으로 배치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 직전에 나오는 벳새다의 맹 인 이야기(막 8:22-26)는 어쩌면 아직도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 하는 제자들의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 앞에는 귀신 들린 소년을 앞에 두고 쩔쩔매는 제자들의 모습(막 9:14-29)이 나옵니다. 그리고세번째수난예고가있은후에지난주복음서의말씀이이어지 는데,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나아와,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를 때, 자기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하는 이 야기가 나옵니다. 각각 달라 보이는 이야기들이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모 두 제자들이 잘못 이해한 '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왜 제자들은 길이신 예수님을 잘못 이해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자신들의 무지함과 생각의 어 두움을 인정하지 않은 채, 무지함과 어두움 속에서 주님을 이해했기 때문 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 마가는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얼 의미 하는지를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통해 들려줍니다. 그는 길에 앉 아 있다가 우연히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의 처음 모습은 막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는 눈으로 예수님을 확인한 것이 아니라 웅성거리는 소리로 그 분의 오심을 느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견시관(見視觀)'이란 말이 있습니다. '볼 견(見)', '볼 시(視)', '볼 관 (觀)'이세가지는모두보는것이지만보는차원,수준이다릅니다.볼 견(見)은 견해(見解)를 갖고 보는 것입니다. 볼 시(視)는 시각(時角)을 갖 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견해(見解)와 시각(時角)을 가지고 보는 바로 거 기에서 다툼이 생깁니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보이는 면도 각각 다르거 니와, 거기에 욕망까지 더해지면 사람이란 이내 견해와 시각 속에 갇혀버 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통찰력을 가지고 본질을 보는 '관(觀)'이 중요합 니다. 이 '관(觀)'은 욕망에서 벗어난 시선이요, 하나님을 향해 눈 뜬 시선 입니다. 바디매오가 눈을 뜨는 과정을 보면 바로 시선의 진보가 보입니다. 그의 시선은 '견(見)'을 넘어, '시(視)'를 넘어 마침내 '관(觀)'에 도달한 것 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보이는 세상'을 즐기려 달려가지 않고, 예수 님을 따라나서는 사람이 됩니다. 이 바디배오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에 있어 '견(見)'과 '시(視)'를 넘어 '관(觀)'에 도달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진정한 시선을 갖지 못하면, 비록눈을뜨고있다해도우리는어두움에지배될수밖에없습니다.우리 시선은필경보이는것들에종속되고말것입니다.복음의진실안에서사 람의 중심을 보지 못하고, 세속의 편견으로 사람의 외모만 볼지도 모릅니 다. 창조의 진실 안에서 자연을 바라보지 못하고, 투기의 탐욕으로 땅을 바라볼지도모릅니다.마음이빛을잃어어두우면설사눈을뜨고본다 해도 그저 표면으로 보이는 세상에 종속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무례하게 구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며 말씀 하신 것입니다.(요 9:41)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눈을 가졌다고 해 서이눈으로보는것이참으로보는것이아니라는사실말입니다.우리는육신의눈을뜨기이전에먼저내면의눈을뜰수있어야합니다.그때 비로소 그 무엇에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시선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 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크리스 천의 자유에 관하여' 두 가지 명제를 이야기 했습니다. "첫째, 크리스천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이며, 주님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 지 않는다. 둘째, 크리스천은 전적으로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 에게 종속되어 있다. 기독교인은 아무에게도 속해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 속해있으며, 동시에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속해 있다." 주님을 향 한진정한시선을가진사람만이주님외의그어느것에게도종속되지 않고,오히려주님을내안에모신밝음으로자연과사람을대할수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개혁은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의 개혁' 즉 '시선의 회개' 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성경의 욥을 생각해 봅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했던 사람 입니다. 흠이 없이 정직했고,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 었습니다. 재산도 많았고, 자식들도 많았습니다. 영적으로도 육적으로도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지나치게 완벽했던 그의 현실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진정한 시선에 방해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그의 삶 이어느날처참하게무너졌습니다.예기치않은때,예기치않은불행이 그를덮쳤습니다.처음불행이닥쳐왔을때,과연그는흠이없이하나님 을 경외하는 신앙인 그대로였습니다. 사탄이 그의 소유물과 자녀들을 쳤을 때, 그는 슬픈 중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 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 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 다"(욥 1:21) 누가 감히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탄이 두 번째로,그의몸을쳐서온몸이종기로뒤덮이자,욥은차라리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며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했습니다.(욥 3:1) 훗날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하셨던 말씀을 그만 스스로 자신을 향해 내뱉고 만 것입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가 가능한가'를 물은 비 평가가 있었습니다. 그렇듯이 욥이 겪은 비극은 점차 그의 마음에서 시와 찬미를 빼앗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어느 지점부터 서서히 마음이 어두 워지고, 그 때부터 하나님을 보는 시선도 어두워집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지혜를볼수없었고,하나님의선하심또한볼수없었습니다.그는그 어두움 속에서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다"(욥 23:2) 라며, '계시 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욥 23:8)을 향해불편한 기색을 드러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욥 38:2, 3), "내가땅의기초를놓을때에네가어디있었느냐누가그것의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욥 38:4, 5)"바다가그모태에서터져나올때에문으로그것을가둔자가누구냐"(욥 38:8) 라시며 폭풍 가운데서 질문을 던지십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집 요하고풍부했으며,이질문을성찰하면서욥은점차자기존재가자연안 에서 순환되는 존재임을 깨달아갑니다. 해가 아침에 떴다가 밤이면 지듯 이, 별이 밤이면 떴다가 아침에 지듯이, 사자도 암사슴도 까마귀도 그리고 자기 자신도 창조질서의 조화로움 안에서 존재하는 것임을, 뿐만 아니라 그조화와질서안에서하나님은자기를붙잡고있는손을놓지않으시면 서,그가비탄에잠겨있던모든순간을함께동일한비탄에잠겨계셨음 을 알아갑니다. 마침내 욥이 무엇이라 고백했습니까? "보소서 나는 비천하 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 40:4) 길고 길었던 질문의 터널 끝에서 욥은 역설적으로 자기가 지금까지 본것,지금까지말한것에대해근본적으로재고하게됩니다.즉그에게 서도 '시선의 회개'가 새로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보 았던 욥이 표현한 불편한 마음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 38:4) 그런데 오늘 욥이 이렇게 말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 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것입니다.
■ 실천 | Praxio
1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세상에 종속되어 살고 있지 않은가?
2 신앙의 눈을 뜨고 말씀을 깨닫는 신앙인으로 살고 있는가?
■ 읽기|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욥 42:3-6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 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응송 | 시 34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서신 | 히 7:23-27
23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27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복음 | 막 10:46-52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 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 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10:51을 묵상하십시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께 맹인은 뭐라고 대답합니까?
② 욥 42:5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을 보게 하고 욥 자신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긴 질문 끝에 욥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③ 히 7:25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향한 성경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묵상 나눔
'듣는' 신앙에서 '보는' 신앙으로
'산티아고 가는 길, 느긋하게 걸어라'에서 저자인 '조이스 럽'은 '엘 부 르고 라네로'의 대피소 벽에 걸려있는 글귀를 소개해줍니다. "순례자여, 당 신이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곧 길이다. 당신의 발걸음, 그것이 카 미노다." 카미노는 스페인어로 '길'이라는 뜻입니다. 순례자가 된다는 것은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길이 되는 여정'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생각해 보면 그 말이 딱 맞는 것이, 예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4:6) 예수님은 공생이 이후 줄곧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유랑(流浪)을 하셨습니다. 북쪽 갈릴리 호 수부터 시작해서 남쪽 예루살렘까지 대략 150킬로미터의 거리가 예수님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께서 그 길을 걸으셨다기보다는 예수 님께서 '길'로서 당신의 여정을 다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걷는다는 의미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 리에게는 두 가지 질문이 가능해집니다. 하나는, 과연 예수님의 열 두 제 자는 길이신 예수님을 잘 따라 걸었을까?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렇다면 우리는 길이신 예수님을 잘 따라 걷고 있을까 입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잠시 유보하고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지금 주님은 그 갈 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입니다. 예수님의 이 여정은 죽음을 향해 가는 여정인데, 예수님은 이 여정을 피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사 실 예수님의 마음을 답답하게 한 것은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 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고,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 렘 길을 걸으면서도 그러나 정작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걷지 못하고 자기 욕망을 따라 걷고 있는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길은 예수님이 아니었습 니다. 그들은 욕망이라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우리는 오늘 복음서의 말씀이 있기 전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이 나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신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주님의 수난 예고 전후에 제자들의 영적 상태를 암시하는 사건들을 의도 적으로 배치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 직전에 나오는 벳새다의 맹 인 이야기(막 8:22-26)는 어쩌면 아직도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 하는 제자들의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 앞에는 귀신 들린 소년을 앞에 두고 쩔쩔매는 제자들의 모습(막 9:14-29)이 나옵니다. 그리고세번째수난예고가있은후에지난주복음서의말씀이이어지 는데,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나아와,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를 때, 자기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하는 이 야기가 나옵니다. 각각 달라 보이는 이야기들이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모 두 제자들이 잘못 이해한 '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왜 제자들은 길이신 예수님을 잘못 이해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자신들의 무지함과 생각의 어 두움을 인정하지 않은 채, 무지함과 어두움 속에서 주님을 이해했기 때문 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 마가는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얼 의미 하는지를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통해 들려줍니다. 그는 길에 앉 아 있다가 우연히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의 처음 모습은 막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는 눈으로 예수님을 확인한 것이 아니라 웅성거리는 소리로 그 분의 오심을 느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막 10:47
잠잠하라는 주변의 충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며 더욱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막 10:48) 병자가 이토록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 다윗의 자손 칭호를 사용하면서 주님께 부 르짖은 것에는 그만한 전승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솔로몬 전승은 다윗의 자손으로 불리는 메시아가 지혜와 가르치는 권위 뿐 아니 라 귀신들에 대한 지배권도 갖추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솔로몬의 유훈서 20장 1절에는 한 남자가 왕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솔로몬 왕 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요세푸스의 고대사에 의하면 한 여인이 하닷 왕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오, 주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 서." 바디매오는 이러한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예수님께 자비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저 출신지를 따라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던 것에 비해(막 10:47), 바디매오는 정확하게 구약 성경의 예언을 따라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호칭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는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런 예수 님을 향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메시아 앞에서 사람이 취해야 할 가장 정확한 태도를 맹인인 그가 보여준 것입니 다.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막 10:49) 그러자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막 10:50) 그리고 그와 예수님 사이에 짧은 대화가 이어집니다.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 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 막 10:51, 52
그리고 주님의 선언이 떨어집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 10:52a) 그리고 마가는 이후의 상황을 담담하게 소개합니다. "그 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막 10:52b) 이 사건은 맹인에게 세 가지의 치유가 동시에 일어났음을 보여줍니다. 먼저 그는 예수님께 믿 음을인정받습니다.그리고그믿음의대가로눈을뜨게됩니다.뿐만아 니라한걸음더나아가예수님을따르는사람이됩니다.그는예수님이 누구신지를알았을뿐만아니라,그따름으로인해역사의주체로우뚝섭 니다. 본회퍼 목사에 따르면 신앙이란, 나의 의도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품에 자신을 던지는 모험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먼저 눈을 뜨는 과정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을 배워야 합니다. 자기의 영적 실존이 불쌍하다는 사 실을아는사람은구원의현실앞에서이렇게절박할수밖에없습니다.오 늘이마가복음의이야기를통해서우리가봐야할것은무엇일까요?바 디매오의 내면이 믿음에 의해 밝아졌을 때, 그 내적 밝음으로 인해 외적 밝음이 가능했다는 사실입니다.'견시관(見視觀)'이란 말이 있습니다. '볼 견(見)', '볼 시(視)', '볼 관 (觀)'이세가지는모두보는것이지만보는차원,수준이다릅니다.볼 견(見)은 견해(見解)를 갖고 보는 것입니다. 볼 시(視)는 시각(時角)을 갖 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견해(見解)와 시각(時角)을 가지고 보는 바로 거 기에서 다툼이 생깁니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보이는 면도 각각 다르거 니와, 거기에 욕망까지 더해지면 사람이란 이내 견해와 시각 속에 갇혀버 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통찰력을 가지고 본질을 보는 '관(觀)'이 중요합 니다. 이 '관(觀)'은 욕망에서 벗어난 시선이요, 하나님을 향해 눈 뜬 시선 입니다. 바디매오가 눈을 뜨는 과정을 보면 바로 시선의 진보가 보입니다. 그의 시선은 '견(見)'을 넘어, '시(視)'를 넘어 마침내 '관(觀)'에 도달한 것 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보이는 세상'을 즐기려 달려가지 않고, 예수 님을 따라나서는 사람이 됩니다. 이 바디배오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에 있어 '견(見)'과 '시(視)'를 넘어 '관(觀)'에 도달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진정한 시선을 갖지 못하면, 비록눈을뜨고있다해도우리는어두움에지배될수밖에없습니다.우리 시선은필경보이는것들에종속되고말것입니다.복음의진실안에서사 람의 중심을 보지 못하고, 세속의 편견으로 사람의 외모만 볼지도 모릅니 다. 창조의 진실 안에서 자연을 바라보지 못하고, 투기의 탐욕으로 땅을 바라볼지도모릅니다.마음이빛을잃어어두우면설사눈을뜨고본다 해도 그저 표면으로 보이는 세상에 종속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무례하게 구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며 말씀 하신 것입니다.(요 9:41)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눈을 가졌다고 해 서이눈으로보는것이참으로보는것이아니라는사실말입니다.우리는육신의눈을뜨기이전에먼저내면의눈을뜰수있어야합니다.그때 비로소 그 무엇에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시선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 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크리스 천의 자유에 관하여' 두 가지 명제를 이야기 했습니다. "첫째, 크리스천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이며, 주님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 지 않는다. 둘째, 크리스천은 전적으로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 에게 종속되어 있다. 기독교인은 아무에게도 속해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 속해있으며, 동시에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속해 있다." 주님을 향 한진정한시선을가진사람만이주님외의그어느것에게도종속되지 않고,오히려주님을내안에모신밝음으로자연과사람을대할수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개혁은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의 개혁' 즉 '시선의 회개' 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성경의 욥을 생각해 봅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했던 사람 입니다. 흠이 없이 정직했고,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 었습니다. 재산도 많았고, 자식들도 많았습니다. 영적으로도 육적으로도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지나치게 완벽했던 그의 현실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진정한 시선에 방해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그의 삶 이어느날처참하게무너졌습니다.예기치않은때,예기치않은불행이 그를덮쳤습니다.처음불행이닥쳐왔을때,과연그는흠이없이하나님 을 경외하는 신앙인 그대로였습니다. 사탄이 그의 소유물과 자녀들을 쳤을 때, 그는 슬픈 중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 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 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 다"(욥 1:21) 누가 감히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탄이 두 번째로,그의몸을쳐서온몸이종기로뒤덮이자,욥은차라리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며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했습니다.(욥 3:1) 훗날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하셨던 말씀을 그만 스스로 자신을 향해 내뱉고 만 것입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가 가능한가'를 물은 비 평가가 있었습니다. 그렇듯이 욥이 겪은 비극은 점차 그의 마음에서 시와 찬미를 빼앗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어느 지점부터 서서히 마음이 어두 워지고, 그 때부터 하나님을 보는 시선도 어두워집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지혜를볼수없었고,하나님의선하심또한볼수없었습니다.그는그 어두움 속에서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다"(욥 23:2) 라며, '계시 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욥 23:8)을 향해불편한 기색을 드러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욥 38:2, 3), "내가땅의기초를놓을때에네가어디있었느냐누가그것의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욥 38:4, 5)"바다가그모태에서터져나올때에문으로그것을가둔자가누구냐"(욥 38:8) 라시며 폭풍 가운데서 질문을 던지십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집 요하고풍부했으며,이질문을성찰하면서욥은점차자기존재가자연안 에서 순환되는 존재임을 깨달아갑니다. 해가 아침에 떴다가 밤이면 지듯 이, 별이 밤이면 떴다가 아침에 지듯이, 사자도 암사슴도 까마귀도 그리고 자기 자신도 창조질서의 조화로움 안에서 존재하는 것임을, 뿐만 아니라 그조화와질서안에서하나님은자기를붙잡고있는손을놓지않으시면 서,그가비탄에잠겨있던모든순간을함께동일한비탄에잠겨계셨음 을 알아갑니다. 마침내 욥이 무엇이라 고백했습니까? "보소서 나는 비천하 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 40:4) 길고 길었던 질문의 터널 끝에서 욥은 역설적으로 자기가 지금까지 본것,지금까지말한것에대해근본적으로재고하게됩니다.즉그에게 서도 '시선의 회개'가 새로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보 았던 욥이 표현한 불편한 마음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 38:4) 그런데 오늘 욥이 이렇게 말합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 욥 42:3a
사실 이건 질문이 아닙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 냐" 하신 하나님의 물음에 대한 자기고백 즉 자신의 무지함에 대한 인정입 니다. 지금껏 자신에 취해 살아온 욥입니다. 그는 사람 뿐 아니라 하나님 도 인정하시는 흠이 없이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누리는 풍성한 재산들과 종들과 자녀들은 그 흠 없 는 정직과 신앙의 보상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고난에 대해 내심 이해도 동의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의외로 어둡고 무지한 자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대해 무지했고,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어두움 속 에 있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 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 욥 42:3b
자기는 확신 속에서 많은 말을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 속에서 그 많은 말들이 하나같이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헤아리지 못한 상태에서 했던 말들임을 비로소 압니다. 그가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요? 마침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 욥 42:5, 6
우리는 여기에서 분명히 욥이, 새로운 무엇에 눈을 떴음을 느낄 수 있 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은 그에게 막연한 실체가 아니었습니다. 무엇 보다도 하나님이 그에게 더 이상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을 '눈으로 뵙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의 시선이 마침내 '견 (見)'을 넘어, '시(視)'를 넘어 '관(觀)'에까지 도달한 것입니다. 마침내 영의 눈을뜬것입니다.맹인바디매오가진정으로보는자가되었듯이,그역 시 진정으로 보는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1738년 5월 24일, 성공회의 젊 은 신부였던 존 웨슬리가 모라비안 교도들의 집회소에서 비로소 이 눈을 떴습니다. 그것은 아주 작은 변화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지만, 듣는 신앙에 서보는신앙으로넘어가는과정에서그는마침내하나님을사랑한그시 선으로형제들도볼수있게되었습니다.이것이하나님을참으로보고믿 는 사람만이 마침내 도달할 수 있는 참된 자기개혁입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고백합니다.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 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히 7:23-25
구약시대의 제사장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죽었지만 예수님은 영원히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기를 힘입어 하나 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씀 합니다. 세상에는 이 주님을 귀로 들은 이들이 제법 많습니다. 하지만 예 수님을 눈으로 보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지한 말로 이치 를 가리며,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정작 삶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을 눈으로 보 게 된 욥의 변화가 무엇이었습니까? 자기와 논쟁을 벌이며 마음을 괴롭게 했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욥 42:10)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 에 알던 이웃들과 오랜만에 함께 음식을 나눕니다.(욥 42:11) 지금 주님을 참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만이 그렇게 형제와 이웃과의 관계에도 너그 러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바디매오처럼 '견(見)'을 넘어, '시(視)' 를 넘어 마침내 '관(觀)'에 도달한 믿음으로 주님을 따라 나서고, 욥처럼 듣기만 했던 신앙에서 이제는 참된 시선으로 보는 신앙이 되어, 길이신 예 수 그리스도를 따라 마음 좋고, 손 좋고, 발 좋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 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 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것입니다.
■ 실천 | Praxio
1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세상에 종속되어 살고 있지 않은가?
2 신앙의 눈을 뜨고 말씀을 깨닫는 신앙인으로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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