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22주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욥 38:1-7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6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응송 | 시 104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 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서신 | 히 5:7-10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복음 | 막 10:35-45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욥 38:2을 묵상하십시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란 어 떤 사람에게 쓰는 말이겠습니까?
② 막 10:35-41을 묵상하십시오. 제자들 가운데 드러나는 '무지한 말' 과 '어두운 생각'은 어떤 것들입니까?
③ 히 5:7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이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 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을 때, 들으심을 얻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김수영이란 시인이 쓴 '어느 날 古宮을 나오면서'라는 시에 보면, 그는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며, 자신의 작고 옹졸해진 모습에 실망스러워 합니다.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王宮)의 음탕 대신에 / 오십(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 옹졸하게 분개하고 /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 옹졸하게 욕을 하고 / 한 번 정정당당하게 /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 월남(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 이십(二十)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 가로놓여 있다 / (중략) /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 정말 얼마큼 적으냐......"이 글은 김수영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우리 모습인것이, 우리 모습이 그의 용렬함에 투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지평을 하늘로 확대해 주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를 염려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옹졸함은, 주님을 따라 시선을 하나님의 나라로 넓히기보다는 작아질 대로 작아진 시선으로 땅에 매여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말은 무지해지고 생각은 어두워진 것이 아닌가, 옹졸한 나의 전통이 그렇게 굳어지는가 싶습니다. 그러한 우리의 조바심이 무리도 아닌 것이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우리가 염려하는 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서일과만 해도 그렇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욥은, 자신에게 임한 고난을 납득할 수 없어 항변하다가 하나님께로부터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욥 38:2)라는 꾸중을 듣습니다. 우리가 욥이 당한 고난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기 생각과 말을 지켜냈어야 했었나 봅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청탁하려고 찾아온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막10:38 공동번역)고 물으십니다. 제자들 무리 중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야심으로 인해 생각도 말도 어두워지고 무지해진 제자들의 모습에 대한 주님의 꾸중 섞인 질문입니다. 알랭 코르뱅이 '침묵의 예술'에서 토머스 모어의 말을 인용해 "가장 깊은 감정은 언제나 침묵 속에 있다"고 말해주었듯이, 어쩌면 그렇게 우리 생각과 말이 어두워졌을 때는 차라리 감정을 침묵 속에 간직해 두는 것도 지혜인 듯싶습니다. 그 때의 침묵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회피가 아닌 '장 드라 크루아(Jean dela Croix)'의 말에 따르면 '은밀히 감추어진 신의 지혜에 대한 관상'입니다.
욥이 하나님께 꾸중을 들은 무지한 말과 생각의 어두움, 그것은 그가 당한 고난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우리가 두 주 전부터 계속 보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을 주의해 보라시며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2:3a)고 칭찬하셨을 때, 사탄은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욥 2:5)라며 집요하게 욥과 하나님 사이를 분리시키려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욥 2:6)시며 허락하셨고, 사탄은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했습니다.(욥 2:7) 처음 사탄이 그의 소유물을 쳤을 때, 하루아침에 재산과 자녀들까지 다 잃어버리고(욥 1:13-22)도 그는 슬픈 중에도 입술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었습니다.(욥 1:21) 그러나 사탄이 두 번째로, 그의 몸을 쳐서 온 몸이 종기로 뒤덮이자 사탄의 예상대로 욥은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했습니다.(욥 3:1) 하나님을 향해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다"(욥 23:2)고 했고,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않는다"(욥 23:8)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습니다. 우리는 욥의 이때의 심정에 대해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누가 감히 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세월호 희생자 이창현 군의 어머니 최선화 집사님이 세월호 3주기에 바친 기도문이 우리를 울립니다.
"창조주이시며 전능자라고 불리우는 당신께 기도드리는 건 쉽지 않습니다. 3년 전 우리 아이들의 살려달라는 마지막 기도를 외면했었으니까요. 당신께 등 돌리고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가든 당신이 계시더군요. 더 이상 울 힘조차 없어 그저 멍하니 앉아 바다만 바라보던 팽목항에도,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하늘을 보며 잠을 청해야 했던 국회에도, 내리쬐는 땡볕을 피할 그늘 하나 찾기 어려웠던 광화문에도, 하수구 냄새에 시달려야 했던 청운동 사무소에도, 침몰 지점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동거차도에도, 그리고 병든 몸을 이끌고 세월호가 누워있는 목포 신항에도 당신은 계셨습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몰랐던 분들이 눈물 가득 고인 눈으로 다가와서 안아주시며 같이 울어주시는 따뜻함에서 당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우리 아이들이 살려달라고 당신께 기도할 때, 그 기도 좀 들어주시지 왜 우리 아이들이 없어진 지금 모르는 사람들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시나요?"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억울함 속에서의 어머니의 이 항변이 욥의 심정이지 않았을까요? 그럼에도 불행에 빠진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먼길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친구들은 욥의 태도에 무척 당혹스러워 합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지 않았습니다. 수긍하기보다는 질문이 더 많을 수밖에 없었고, 설사 수긍한다 해도 몸과 마음에 입혀진 상처를 어찌하지 못했습니다. 욥 13:22-24에서는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라며 도발하는가 하면, 욥 31:35에서는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라며 도전합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욥의 이 도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인데, 그 첫 마디가 이것입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 욥 38:2
히브리어 성경인 맛소라 사본에 의하면 이 말씀은 "미 제 마흐쉬크 에차 베밀린 다아트(׃ תעד־ילב ןילמב הצע ךישׁחמ הזימ)" 즉 "지식이 없는 말들로 뜻을 어둡게 하는 이가 누구냐?"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 매우 중요한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견뎌내기 힘든 슬픔이나 고난에 처해졌을 때일수록 생각이 어둡지 말아야 하고, 언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우러나야 함을 역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 하나님은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시며 때로는 수사학적 질문으로, 때로는 창조에 대한 욥의 경험을 묻는 것으로, 때로는 우주의 기초에 대한 것을 묻는 것으로, 욥에게 70여개 항이 넘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 질문의 범위는 천체로부터 짐승과 새들을 망라하는데, 38:1절에서 시작된 질문이 무려 39:30절까지 계속됩니다. 사실 저는 이 말씀들을 뜻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감정적으로는 잘 공감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욥은 자기에게 임한 고통의 이유를 묻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주 속에 계시되어 있는 당신의 전능함으로 대답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 욥은 하나님의 이 질문을 성찰하면서 점차 자기존재가 창조질서 안에서 순환되는 존재임을 깨달아갑니다. 해가 아침에 떴다가 밤이면 지듯이, 별이 밤이면 떴다가 아침에 지듯이, 사자도 암사슴도 까마귀도 그리고 자기 자신도 같은 질서 안에서 떴다가 지는 것이 순리임을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그 우주가, 아니 너무 가까이 있어서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그 질서가, 자기의식과 무관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자신 역시 그 조화로움 속에서 죽고 사는 존재임을 욥은 조금씩 조금씩 알아갑니다. 그리고 그 조화와 질서 안에서 하나님은 자기를 붙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으면서, 그가 비탄에 잠겨 있는 이 순간을 함께 견디고 계심을 욥이 비로소 알아갑니다.신영복 선생이 '담론'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자부심은 고난을 견디게 합니다. 물질적 도움보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 더 큰 힘이 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함께 비를 맞지 않는 위로는 따뜻하지 않습니다. 위로는 위로를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위로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고 울부짖으며 질문해오는 욥에게 하나님은 묵묵히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순종하는, 태어나 살다가 죽는 '그 자체가 자연'인, 그의 생각 너머의 큰 세계를 보여주시면서 '너도 그 질서 속의 한 존재'라고, '그리고 '그 질서 안에서 나는 너였고, 우리는 함께 비를 맞았다'고 가르쳐 주시는 겁니다. 때로는 생각이 막히고 말이 막혀버리는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순간이 하나님의 신비와 맞닥뜨리는 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성찰이 없는 입으로 함부로 말하다가 말의 무지함과 생각의 어두움을 들키기보다는, 내 깊은 감정은 침묵 속에 간직하고 은밀히 감추어진 신의 지혜를 관상하며 사는 것이 참되고 본 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질문이 모두 그친 후에 욥도 그런 취지로 대답합니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 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욥 40:4, 5)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고통과 죽음이 찾아올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음을 깨우쳐줍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 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 히 5:7-10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사람으로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향해 심한 통곡과 눈물로 살려주시기를 간구하셨습니다. 아프면 울고, 살고 싶다고 발버둥 치는 것, 그것은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난 주 우리가 보았듯이 예수님도 우리와 똑 같은 시험을 받으셨을 때(히 4:15),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그러나 그 시험의 순간들을 지나며, 예수님은 끝까지 당신의 뜻을 고집하지 않고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 결과는 온전함이었고, 예수님의 온전함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때때로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 속에 주저앉아버리지 않고 배워야 할 순종이 있음을 가르쳐주십니다. 그 배워야 할 순종이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 당신에게 다가온 죽음이 아프다고 통곡하다가 당신의 죽음을 통해 살려야 할 사람들을 돌아보시고 그들을 위한 죽음에 순종하신 것. 그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순종입니다. 하나님이 욥의 고통 속에서 욥과 하나였듯이, 예수님이 인류의 죽음에서 우리와 하나였듯이, 우리 또한 형제를 나와 타자가 아닌 '또 하나의 나'임을 알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배우고 감당해야 할 순종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죽음을 향해 걸어가시는 예수님 일행 가운데 있었던 대화를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이 길 위에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다가와서 청탁을 합니다.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 막 10:35
그들은 지금 예루살렘에서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런 그들이 말하려는 '우리가 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막 10:36)고 예수님께서 되물으셨을 때, 그들 대답이 이랬습니다.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 막 10:37
여기에서 그들이 말하는 '우리'는 모두를 아우르는 '우리'가 아닙니다. 자신과 자신의 동생만을 염두에 둔 '우리' 즉 지극히 정치적이고 이기적인 '우리'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에 연민이 배어있습니다.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 막 10:38
이미 욕망에 마음을 빼앗겨 판단력을 잃은 그들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막 10:39a) '주님께서 마시는 잔'이 무엇입니까? '고난과 죽음의 잔'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받는 세례'는 무엇입니까? 역시 괴로움과 고난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은 그 의미도 모른 채, 그 잔을 마시고 그 세례도 받겠다고 합니다. 토마스 머튼의 묘사대로라면 지금 제자들은 그릇된 욕망에 사로잡혀 점차 마음으로부터 자유를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이들의 대답을 진실하게 받아주시고 장차 이들이 순교하리라고 말씀해 주십니다.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 막 10:39, 40
실제로 행 12:2에 보면 이들은 주님 말씀대로 순교의 영광을 얻습니다. 야고보는 AD 44년 헤롯 아그리파(Herod Agrippa) 1세에 의해 12 사도 중 최초의 순교를 함으로서 주님의 잔과 세례에 동참하는 영광을 얻고, 사도 요한은 비록 순교의 증거는 없지만 밧모 섬으로 추방당함으로서 주님의 수난에 참여하고(계 1:9), 모진 육체적 고난을 수없이 당함으로서, 예수님께서 남겨놓으신 잔을 마셨습니다.(행 4:3;5:18, 33, 40) 그들은 무지한 가운데 말하고, 어두운 생각 속에서 말했지만,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무지한 말을 받아들여 고난과 죽음에 순종하는 영광을 주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 막 10:41
차마 겉으로 표현을 못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제자들도 야고보와 요한과 똑같이 정치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을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청탁을 선점 당했다고 생각해 화를 내는 겁니다.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王宮)의 음탕 대신에 오십(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옹졸하게 분개하는 자신,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二十)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다며, 자신의 작음을 실망스러워 하던 시인에 비하면, 지금 이 제자들의 분노는 유치하기까지 합니다. 그들의 말에는 무지함이 묻어있고, 그들의 생각은 어둡고 음산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막 10:42-45
세상의 집권자들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사람에게 군림하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막 10:43)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은 따로 있습니다. 무지한 말과 어두운 생각에 겨워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걸음을 걷는 것이 아니라, 욥이 가장 힘겨울 때 함께 비를 맞으신 하나님처럼, 우리 죽음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지금 내 곁에서 비를 맞고 있는 형제가 '나'임을 알아서 그와 함께 비를 맞아주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 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무지한 말과 어두운 생각으로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지 않은가?
② 섬김과 희생과 순종의 영성으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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