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21주 하나님을 향한 개방성
■ 읽기|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욥 23:1-3, 8-10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3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응송 | 시 22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 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서신 | 히 4:15-16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 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복음 | 막 10:17-27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 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10:27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해 나를 개방하는 이 '자기 초월'의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② 욥 23:10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반항과 '하나님 결핍감'에 시달리던 욥이 자신을 추스르게 된 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③ 히 4:16을 묵상하십시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 는 언제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말씀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하나님을 향한 개방성
어느 날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공관복음마다 그를 소개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지만 그가 부자라는 사실에는 너나없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부유함으로 인해 세인의 부러움을 한 몸에 느끼며 살아왔을 것이지만, 정작 그에게는 남모르는 결핍감이 있었습니다. 그는 생명의 유한성에 대한 허무함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막 10:17
마음속에서 가장 절실한 것이 밖으로 표현되는 법입니다. 마태는 마 19:20에서 이 사람을 '그 청년'이라고 소개합니다. 생명의 유한성에 대한 허무함은 청년도 피해가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청년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 유한한 생명의 허무함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그 사실로 인해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불안을 느낍니다. 하이데거는 사람을 불안으로 몰아가는 죽음의 성격을 세 가지로 규정합니다. 하나는 독자성입니다. 아무도 죽음의 길을 함께 갈 수 없습니다. 혼자만 가는 길을 사람들은 무서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는 무연관성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맺었던 모든 연관이 끊어진다는 뜻입니다. 가족, 재산, 명예 등 모든 것과의 연관이 사라집니다. 셋째는 불능가성입니다. 죽음 이후에 어떤 존재가 될지 아무도 모르고, 그것을 극복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이 부자청년도 이런 불안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 마음의 불안을 감지하셔서인지 주님은 찾아온 이 청년을 진지하게 대해주십니다. 먼저 주님은 그가 간과하고 있는 것 한 가지를 수정해 주십니다.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 막 10:18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얼핏 이해가 잘 가지 않았었습니다. 에이든 윌슨 토저(A. W. Tozer)에 따르면 "우주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본성과 일치하는 만큼 선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악하다" 했는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선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아무래도 예수님은 이 청년의 잘못된 전제를 수정해 주시기 위해 완곡하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사실 '선하신 선생님'이라는 표현은 존경하는 영적지도자에게 붙이는 의례적인 수사임에도, 그런 의례적이고 관습적인 호칭마저 지적해 주시는 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이 젊은이의 구원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아주시기 위해서인 듯싶습니다. 아무튼 선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참이십니다. 선함을 지향할 수는 있지만,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선함' 자체일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예수님께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에는, 그 다음 하시려는 말씀을 염두에 두신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 막 10:19, 20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자기 욕망을 거슬러 하나님의 뜻에 자기 존재를 붙들어 매는 것입니다. 그런 실천을 다부지게 반복하는 동안 자아의 속박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켜온 청년이었습니다. 그 사실은 정말 칭찬할 만한 것이었고, 그래서 예수도 그 청년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셨습니다.(막 10:21) 그러나 자신이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켰다는 그 사실로 인해 자칫 청년은 '자기 선(善)'에 대한 교만에 빠질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이 청년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씀을 하십니다.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 막 10:21
자기가 깨지는 경험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더 깊은 세계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자기 개방이 없으면 결코 자기 초월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금 주님이 젊은이에게 요구하신 것은 어려운 이웃들에 대한 자선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의 요구가 그런 것이었다면 그는 기꺼이 말씀대로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젊은이에게 재산이 아닌 그의 존재 전체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재산이 주는 안전감에 기대어 살아온 젊은이가 진리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 익숙하고 편리한 세계로부터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영생을 향한 여정은 이렇게 엄정한 결단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옥스퍼드의 신학자인 '존 매쿼리(John Macquarrie)'는 그리스도교 영성을 정의하기를 '자기 자신 밖으로, 자기 자신을 넘어서 나아가는 능력, 즉 자신을 초월하는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일제시대에 잡지 '성서조선'을 통해 잠든 영혼을 깨웠던 김교신 선생은 신앙을 택하려거든 극상품의 신앙을 택하라고 말합니다. 기왕 믿으려면 참을 향해 비약 돌진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그렇지 못합니다. 김교신에 따르면 자족하는 신앙은 마치 특실을 버리고 삼등열차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그가 '조와(弔蛙)'라는 책에서 하는 말입니다. "주일마다 달마다 정해진 액수의 연보를 바치고, 술․담배 끊고 이서방과 비겨도 못한 것이 없고, 최서방과 겨누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자족하는 신앙은 보통실의 신앙 즉 삼등 열차적 믿음이다." 존 웨슬리는 이런 신앙을 '엇비슷한 기독교인(almost christian)'이라고 했습니다.지금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런 '삼등 열차적 믿음', '엇비슷한 기독교인의 자리'를 떠나 '자기초월'로 나아가라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부자청년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 막 10:22
성경에는 이런 씁쓸한 결말들이 간혹 보입니다.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 가운데 여럿이 말씀에 걸려 넘어져 주님 곁을 떠났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13세기 페르시아 시인인 루미는 '냄비 속의 병아리콩'에서 한 요리사가 국자로 콩을 누르면서 하는 말을 들려줍니다. "뛰쳐나오려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괴롭히는 줄 알겠지만 사실은 지금 너에게 맛을 들이고 있는 중이다. 바야흐로 너는 양념에 버무려져 쌀밥과 함께 인간의 고귀한 생명으로 되는 것이다. 네가 밭에서 빗물을 받아 마실 때 이렇게 되기 위해서였음을 기억하여라." 부자청년은 뛰쳐나가고 맙니다. 안타깝게도 그가 뛰쳐나간 이유는 '재물이 많은 고로'였습니다.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번민의 시간을 보낸 후에 돌아와 주님의 제자가 되었을 수도 있고, 자괴감에 빠진 채 살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는 그 결말을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새 땅을 얻으려면 히브리인들처럼 애굽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꿈을 가슴에 품었을 때, 갈릴리의 어부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지금의 나'가 '미래의 나'를 붙잡습니다. 변화의 과정에는 반드시 갈등과 투쟁이 있습니다.오늘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욥에게는 이 부자청년과 다른 차원의 갈등과 투쟁이 전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어졌습니다. 그에게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있었고(욥 1:2),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였고, 종도 많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세인들로부터는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욥 1:3a)라는 칭찬을 받고 있었고, 심지어 그는 하나님께도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며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욥 1:1, 8;2:3) 욥이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은 존재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사탄이 하나님을 찾아와 그를 참소하면서부터 그의 인생에 가혹한 고난이 찾아옵니다. 그는 한 순간 양들과 종들을 잃고 맙니다.(욥 1:15) 뿐만 아니라 자녀들까지 모두 잃고 맙니다.(욥 1:16)
그러나 그는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슬퍼하는 중에도,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라는 믿기 어려운 고백을 남깁니다. 그러나 사탄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탄은 하나님께 이번에는 그의 뼈와 살을 치라고 합니다.(욥 2:5) 하나님께 조건부 허락을 받은 사탄은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합니다.(욥 2:7) 그의 아내는 그에게,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며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퍼붓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 2:10)며 입술로 범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그를 찾아와 토론을 벌이면서부터 욥은 조금씩 마음과 입의 평정을 잃기 시작합니다. 친구들 앞에서 욥은 자기 생일을 저주합니다.(욥 3:1)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욥 3:3, 4) 그렇게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던 그는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욥 3:11, 12) 라며 자신의 어린 날까지 후회합니다. "가볍게 나는 하루살이에게도 삶의 무게는 있다"는데, 이때 그의 어깨에 내려앉은 삶의 무게는 얼마나 견뎌내기 힘겨운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그의 저주와 후회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저주와 후회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일말의 조바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가 하나님을 향해 반항하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 결핍으로 치닫습니다.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다"고 하고(욥 23:2),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욥 23:3),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욥 23:5) 라며 호소하다가. 마침내 그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며 하나님 결핍을 호소하기에 이릅니다.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 욥 23:8, 9
그가 마음으로 겪고 있는 마음의 슬픔과 육체의 고통 그리고 영적 갈등까지 생각하면 애가 탈 지경입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다행스러운 건 이 마음의 혼란스러움 중에도 그가 조금씩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을 추스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10절을 시작하는 단어는 '그러나'입니다. 히브리어 원문 역시 '그러나'라는 의미의 접속사 '키(יכ)'로 시작되고 있습니다.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 욥 23:10a
여기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의 무게중심이 바뀝니다. 9절까지의 동사의 주체는 '나'였지만, 10절에 들어서면서 '하나님'으로 바뀝니다. 욥이 그렇게 찾아도 만날 수 없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욥을 결핍감에 빠지게 했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러나 그가 아시나니"라고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내가 슬픔 속에서 울부짖고, 나의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나의 어린 날을 후회하며 반항하는 마음으로 대들 때도 하나님은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 욥 23:10b
'단련하신' 이 단어가 히브리어로 '바한(ןחב)'인데, 이 단어가 명사로 쓰일 때는, 금의 순도를 더 높이기 위해 제련(製鍊)하는 도구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욥의 고백은 자금 자신이 통과하고 있는 이 고난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제련하는 순간이고, 이 고난의 순간이 지나있을 때, 자신은 순금 같은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영성신학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개방성'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전의 자기 존재를 초월하는 것인데, 자기 존재를 초월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에 따르면 이 때 비로소 '진정한 자아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욥의 이야기는 다음 주에 더 심층적으로 나누기로 하고, 다시 복음서의 말씀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부자청년이 슬픈 기색으로 돌아간 뒤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 마 10:25
제자들이 이 말씀에 충격을 받습니다. 유대교 사회에서 '부(富)'는 하나님 사랑의 징표인데, 예수님은 부유함이 천국과 배치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 말씀은 '부' 자체가 죄라기보다는, 부가 주는 그릇된 안정감이 하나님을 향한 개방성을 가로막을 수 있음에 대한 경고입니다. 부자청년을 향해 일말의 부러움을 가졌던 제자들이 서로를 향해 묻습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막 10:26)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 막 10:27
결국 '하나님을 향한 개방성'이라는 것은 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을 향해 자기를 개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씀합니다.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 히 4:16
그러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말씀을 주셔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어루만져 주시고(히 4:12), 때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해 주셨습니다.(히 4:14, 15 ) 하나님을 향해 나를 개방하는 이 '자기초월'은 이렇듯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해결됩니다.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부자청년처럼, 그리고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처럼, 사실 우리 모두는 가까운 때에 모든 것을 버려야 할 순간을 맞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 순간이 속히 올 것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약간 지체될 뿐이지 아무도 그 순간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을 앞당겨 살아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성숙함은 오로지 믿음으로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가능성을 향해 나를 개방하는 믿음, 나를 내어드리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믿음, 이 '자기초월성'으로 인해 영원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 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부자청년처럼 '내 힘과 능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가?
② 나를 내어드리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자기초월로 나아가는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41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6주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
KOR | 2024.11.17 |
41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5주 나를 넘어 하나님께로
|
KOR | 2024.11.10 |
410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4주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
KOR | 2024.11.02 |
409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3주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
KOR | 2024.10.26 |
408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2주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
KOR | 2024.10.19 |
407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1주 하나님만이 오직 최선이시다
|
KOR | 2024.10.12 |
406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0주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KOR | 2024.10.05 |
405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8주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
|
KOR | 2024.09.21 |
404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7주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
KOR | 2024.09.14 |
403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
KOR | 2024.09.07 |
40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
KOR | 2024.09.01 |
40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
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