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9주 신앙의 공동체적 차원 '형제애'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에 7:1-10
1 왕이 하만과 함께 또 왕후 에스더의 잔치에 가니라 2 왕이 이 둘째 날 잔치에 술을 마실 때에 다시 에스더에게 물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냐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냐 곧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 3 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좋게 여기시면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4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우리가 노비로 팔렸더라면 내가 잠잠하였으리이다 그래도 대적이 왕의 손해를 보충하지 못하였으리이다 하니 5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 에스더에게 말하여 이르되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6 에스더가 이르되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하니하만이 왕과 왕후 앞에서 두려워하거늘 7 왕이 노하여 일어나서 잔치 자리를 떠나 왕궁 후원으로 들어가니라 하만이 일어서서 왕후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하니 이는 왕이 자기에 게 벌을 내리기로 결심한 줄 앎이더라 8 왕이 후원으로부터 잔치 자리에 돌아오니 하만이 에스더가 앉은 걸상 위에 엎드렸거늘 왕이 이르되 저가 궁중 내 앞에서 왕후를 강간까지 하고자 하는가 하니 이 말이 왕의 입에서 나오매 무리가 하만의 얼굴을 싸더라 9 왕을 모신 내시 중에 하르보나가 왕에게 아뢰되 왕을 위하여 충성된 말로 고발한 모르드개를 달고자 하여 하만이 높이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준비하였는데 이제 그 나무가 하만의 집에 섰나이다왕이 이르되 하만을 그 나무에 달라 하매 10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응송 | 시 124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짐으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서신 | 약 5:16-18
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복음 | 막 9:38-42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 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9:38을 묵상하십시오.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라는 요한의 표현에서 느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② 에 7:9, 10을 묵상하십시오. 독한 시기와 교만과 편견에 사로잡힌 삶의 결과를 보며 무엇을 느끼십니까?
③ 약 5:16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인으로서 형제의 죄를 고백받았을 때,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겠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신앙의 공동체적 차원 '형제애'
초기 그리스도교 수도생활의 정립에 커다란 공헌을 한 대표적인 두 사람을 꼽으라면, 수도승의 아버지로 불리는 '성 대 안토니'와 회수도회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성 파코미우스'를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각자 고유한 수행방법을 통해 초기 그리스도교의 수도생활을 뿌리내리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성 대 안토니가 '은둔 수도생활'의 가치와 실천에 중점을 두었다면, 성 파코미우스(St. Pachomius)는 수도원제도의 첫 개선자로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공주 수도생활'의 정초를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공주 수도생활을 결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본디 은둔 수도생활을 결심하고 은수자 팔라몬을 찾아가 그의 슬하에서 친형인 요한과 함께 수년을 은둔 수도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한 천사가 나타나 이르기를 "하나님의 뜻은 그대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화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 더욱 다가가고 싶은 마음뿐인데 사람들에게 봉사하라니요?"하고 항의하자 천사는 세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그제야 지난날 룩소르의 감옥에서 경험했던 크리스천들의 사랑과 봉사에 대한 감동이 떠오르며, 그때 "감옥에서 풀려나기만 한다면 일생을 바쳐 사람들을 사랑하며 봉사하겠다"고 기도하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형 요한과 함께 타베니스의 초막을 증축해 근처의 몇몇 은수자들과 첫 수도 공동체를 시작했는데, 그렇게 시작한 공동 수도생활을 '코이노비온(κοινώβιον)'이라 부르고, 이런 공주수도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을 '코이노비오스(κοινώβιος)'라고 불렀습니다.이 공동체의 기본구조는 형제애로서, 구성원들이 서로를 '형제'로 여기는 '친교'에 중점을 둔 영성이었습니다. 그들의 영성이 지닌 우선적 가치는 상호 섬김으로, 파코미우스 역시 자신을 '모든 이를 섬기는 봉사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파코미우스를 불러 세우신 새로운 신앙공동체가 당시 그리스도인 사회에 던져 준 메시지는 자칫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간과하기 쉬운 '신앙의 공동체적 차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아직은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분리되어 있던 때, 하나님은 그를 통해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게 하심으로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상통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복음서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장차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삼 일만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조차 두려워했던 제자들이, 정작 자신들의 서열문제에 있어서는 예민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막 9:32-34) 주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시고(막 9:35),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시각적으로 그 아이를 보게 하시며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하셨습니다. 당시 어린이는 삶의 변두리로 밀려난 모든 존재를 상징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이들을 마음을 다해 돌보는 것을 당신을 영접하는 행위로 여기신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의 가르침대로라면, 어린아이처럼 삶의 변두리로 밀려난 존재를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위로부터 난 지혜'라고 한다면, 스스로 오만해져서 높은 자리에 서려 한다거나 나보다 연약한 형제를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은 '땅 위의 지혜' 즉 '세상에 속한 지혜'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 말씀들은 고스란히 이번 주의 말씀들로 연결이 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요한이 예수님을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 막 9:38
요한의 이 말이 나온 시점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방금 전에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 9:35) 말씀하시고,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말씀하셨음에도 요한이 자기들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타인이 하는 '선한 행위'를 막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신앙이 올바로 인식되지 못하면 오히려 사람들 사이를 구분시키거나 갈라놓아 대립을 조장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타인과 공유하기 위해 그들과의 접촉점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결코 '논쟁적'이거나 '배타적'인 성격을 띠지 말아야 하고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요한은 다소 참을성이 없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눅 9:51 이하에 보면 예수님 일행이 사마리아를 통과하려고 할 때,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신다는 말을 듣고 사마리아로 들어오는 것을 거절합니다. 그 때 야보고와 요한이 주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눅 9:54 공동번역) 누가는 그 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셨다고만 기록을 남겨놓았습니다. 마가는 막 3:17에서 그들을 '보아너게' 즉 '우레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 요한이 주님께 그렇게 말한 겁니다.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습니다 | 막 9:38 공동번역
사람에 대한 차별의식이 분명히 담겨 있는 요한의 이 말의 이면에는, 예수 안에 있는 진리와 생명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할 '선물'로 여기는 것이 아닌, 질투심에 의해 독점해야 할 '소유물'로 여기고 있었음이 은연 중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어떠하셨습니까?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 막 9:39-41
"금하지 말라"시는 예수님의 이 대답에서 우리는 포용성을 봅니다. 주님은 나에게 속하지 않았다고 해서 배척하시는 분이 아니라, 포용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이 마음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배척하는 사람이 아니라 포용하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물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막 9:41)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포용과 사랑에 있음을 분명히 하십니다.오늘 구약성경은 전혀 포용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한 사람의 음모와 그 음모의 처참한 결말을 보여줍니다. 온갖 모략을 동원해 왕의 마음을 사고 그 대가로 질펀하게 권력을 누리며, 어둠 속에서 살육을 꾸미던 하만의 이야기입니다. 하만이라는 사람은 옛날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광야를 지날 때 공격해 왔던 아말렉의 후손이고, 사울시대에는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아각의 후예로, 유다인을 향해 수백 년 묵은 원한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르 왕은 궁중 역모 사건이 있은 후 하만을 등용해 총리로 삼고 있었습니다. 왕의 신임을 등에 업은 그는 한껏 권력의 맛을 누렸습니다. 대궐 문의 신하들은 하만이 행차할 때마다 그 앞에 꿇어 절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꿇지도 않고 절하지도 않은 딱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에 3:2) 유다인 모르드개였습니다. 그가 하만에게 절을 하지 않은 이유는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는 제 2계명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비록 포로로 끌려간 땅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러나 자기 마음까지 노예일 수는 없었습니다. 동료들이 그를 향한 하만의 분노를 감지하고 몸을 굽히라고 충고할 때마다 그는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유다인이오."(에 3:4) 모르드개의 이 당당함은 번번이 하만의 교만한 품성에 불을 지폈습니다.(에 3:5)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모르드개의 무릎을 자기 앞에 꿇게 해서 상처받은 자존심을 보상받고 싶어 합니다. 결국 하만은 모르드개 뿐 아니라 페르시아 전역의 유다인을 모두 살육(殺戮)해서 자신과 조상들의 복수를 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핵심 세력들을 규합해 법적 근거를 마련합니다. 그들은 아하스에로스 왕 '십이 년 정월' 곧 니산월에 모여서 유다인을 해치울 날을 정하기 위해 하만 앞에서 주사위를 던지는데, 아달월 즉 십이월 십삼일이 나왔습니다.(에 3:7) 하만은 지체하지 않고 왕 앞에 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나라 백성들 가운데는 남과 섞이지 않는 한 민족이 각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 민족의 법은 어떤 민족의 법과도 달라서 임금님의 법마저도 지키지 않으니 도저히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임금님께서만 좋으시다면 그들을 멸하라는 영을 내려주십시오. 그렇게만 하신다면 신은 은화 일만 달란트를 달아서 재산 관리인에게 넘겨 내탕고에 넣도록 하겠습니다."(에 3:8, 9 공동번역) 그는 온갖 지혜로운 말로 왕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왕은 끝내 인장반지를 뽑아 하만에게 주며 "그 민족은 그대 손에 넘길 터이니 좋도록 처리하라"고 허락해 줍니다.(에 3:10, 11) 유다인들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모르드개는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통곡을 합니다.(에 4:1) 소식을 들은 에스더가 자기에게 가까이 있는 내시 하닥을 모르드개에게 보내 자초지종을 묻자 모르드개는 하닥에게 하만이 꾸민 음모를 알립니다.(에 4:6-9) 그리고 이때 에스더의 화답이 눈물겹습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왕후 에스더는 풍성한 잔치를 벌여놓고 왕과 하만을 초대하여 정성을 다해 대접합니다.(에 5:1-8) 잔치가 끝난 후 하만은 자기가 누리는 특권에 만족하여 흡족한 마음으로 집을 향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흡족한 속에서 모르드개를 매달 50규빗(25.93m) 높이의 장대를 높이 세워놓고 잠을 청합니다.(에5:14) 그런데 하나님은 살아계셨습니다.
그날 밤 불면증에 시달리던 왕이 신하에게 궁중실록을 가져와서 읽으라고 명을 내립니다.(에 6:1) 궁중실록 가운데서 과거에 있었던 내시 빅단과 데레스의 암살음모사건과, 그때 공을 세운 모르드개에 관한 기록에 이르렀을 때, 문득 왕이 "당시 모르드개에게 무슨 존귀와 관작을 베풀었느냐"고 묻습니다.(에 6:2, 3) 아무것도 베풀지 않았다고 하자 왕은 때마침 모르드개를 처형하게 해달라고 청하기 위해 바깥뜰에 들어서던 하만을 불러서 묻습니다. "내가 특별히 대우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해 보시오."(에 6:6) 하만은 '그 사람'이 바로 자기라고 확신하고 희색이 만면하여 이렇게 대답합니다. "왕께서 입으시는 왕복과 왕께서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가져다가 그 왕복과 말을 왕의 신하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맡겨서 왕이 존귀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 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에 6:8, 9) 그러자 왕은 '너는 네 말대로 하라'면서, 대궐 문에 앉은 유다 사람 모르드개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에 6:10) 하만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하지만 할 수 없이 모르드개를 말에 태우고, 마치 시중드는 종처럼 성안을 돕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이야기는 오늘 구약의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왕이 하만과 함께 두 번째 왕후 에스더의 잔치에 갔을 때, 왕이 왕후에게 이같이 말합니다.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냐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냐 곧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 | 에 7:2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좋게 여기시면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우리가 노비로 팔렸더라면 내가 잠잠하였으리이다 그래도 대적이 왕의 손해를 보충하지 못하였으리이다 | 에 7:3, 4
아하수에스 왕이 분노합니다.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냐"며 흥분해서 묻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에스더가 이르되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하니 하만이 왕과 왕후 앞에서 두려워하거늘 왕이 노하여 일어나서 잔치 자리를 떠나 왕궁 후원으로 들어가니라 하만이 일어서서 왕후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하니 이는 왕이 자기에게 벌을 내리기로 결심한 줄 앎이더라 왕이 후원으로부터 잔치 자리에 돌아오니 하만이 에스더가 앉은 걸상 위에 엎드렸거늘 왕이 이르되 저가 궁중 내 앞에서 왕후를 강간까지 하고자 하는가 하니 이 말이 왕의 입에서 나오매 무리가 하만의 얼굴을 싸더라 왕을 모신 내시 중에 하르보나가 왕에게 아뢰되 왕을 위하여 충성된 말로 고발한 모르드개를 달고자 하여 하만이 높이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준비하였는데 이제 그 나무가 하만의 집에 섰나이다 왕이 이르되 하만을 그 나무에 달라 하매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 에 7:6-10
하만의 비극은 그가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쳐놓은 교만의 덫에 걸려서 그만 비참하게 죽고 맙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잠 16:18)이라는 말이 어쩌면 그렇게 딱 맞는지 모릅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 왕후가 되었고, 왕의 목숨을 구하는 공을 세웠음에도 한결같이 몸을 낮추어 궁궐 문을 지키고 있는 모르드개와, 온갖 모략을 동원해 왕의 마음을 사고, 그 대가로 질펀하게 권력을 누리면서도 만족을 모른 채 자기 마음을 원한과 교만에 내어주고 어둠 속에서 살육을 꾸미던 하만은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면서도 참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서신서에서 야고보는 말씀합니다.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 약 5:16
사람이 서로 자기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병을 고백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를 부탁하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공동체성은 거기까지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형제가 내게 자신의 죄를 고백해올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슬퍼하며 회개할 수 있고, 신앙의 형제가 내게 자신의 병을 고백해올 때, 그의 고난과 함께 하며 기도해줄 수 있는 그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아직은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분리되어 있던 때, 하나님은 파코미우스라는 수도자를 통해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게 하심으로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상통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런 공동체를 일구어 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신앙과 형제애를 별개의 것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②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형제애로서 열매 맺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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