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2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8-12 14:28
조회
1696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삼하 18:5, 32-33
5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 지휘관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32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응송 | 시 130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서신 | 엡 4:25-5:2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복음 | 요 6:44-51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삼하 18:33을 묵상하십시오. 아들 압살롬의 죽음을 대하는 아버지다윗을 보며 우리 사랑은 어떠한 마음이어야 한다고 생각됩니까?
② 엡 5:1, 2을 묵상하십시오. 오늘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랑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사랑이어야 하겠습니까?
③ 요 6:49-51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은 이 '따름'에 있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름지기 갖춰야 할 마음가짐이 무엇일까를 성찰하게 해줍니다, 구약성경에서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아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전장에 나가는 장군들에게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삼하 18:5)며, 자신을 반역한 아들을 선대할 것을 당부합니다. 그리고 아들 압살롬이 요압장군의 창에 죽었을 때는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 18:33) 하며 슬퍼합니다. 우리는 아비 다윗에게서 하나님의 마음을 봅니다. 압살롬이 어떤 아들입니까? 자기 아버지를 반역해 세(勢)를 결집하자고 아버지의 후궁들을 겁탈한 아들입니다.(삼하 16:21, 22) 자기 아버지 죽이자고 자객을 보내려 했던 아들입니다.(삼하 17:1-4, 12) 그런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아비의 마음은 자식과 달랐습니다. 그는 아들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습니다. 남들은 다 아들의 패륜을 문제 삼아도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안전에 온통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오늘날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은 바로 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일찍이 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던 시인은 오늘 응송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1980년대, 평화를 갈망하는 동독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성지와도 같았던 '성 니콜라이 교회'가 있습니다. '성 니콜라이 교회'는 '성 토마스 교회'와 더불어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가 활동한 곳이기도 했는데, 독일 통일의 시발점이 된 사건 중 하나는, 이 교회에서 1982년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모인 평화기도회였습니다. 동독과 서독의 군비경쟁이 심화되고 있 때, '크리스치안 퓌러(Christian Fuhrer)' 목사가 "칼을 쳐서 쟁기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이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냉전시대에 평화를 열망하는 모든 사람들이 동참했고, '모두에게 열린 교회(Kirche offen fὕr Alle)'라는 안내판 그대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공산주의자와 반체제인사 등 어느 누구도 배제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그 기도회는 결코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운집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 당국은 성 니콜라이 교회로 가는 길목을 차단했습니다. 치안담당자는 700여 명의 사복 경찰과 군인들을 성 니콜라이 교회에 보내 미리 자리를 차지해서 사람들이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이 목사님의 산상수훈 설교와 모인 이들의 기도에 감화를 받고, 군중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요한네스 리히터(Johannes Richter)' 목사는 잠 25:8-9절을 본문으로 설교했습니다. "너는 서둘러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서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요한네스 리히터 목사는 이 말씀을 본문으로 삼아 인내의 용기와 격분을 거절하는 슬기를 발휘하자고 설교했습니다.이렇게 해서 성 니콜라이 교회는 인내와 온유함으로 독일 통일의 물꼬를 연 역사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분부하신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 28:20). 주님께서 분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형제를 형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분노가 고질병이 되어서 화해의 시기를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의 분노가 화해의 때를 넘겨서 민족적인 죄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계속 들어보십시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여전히 증오와 갈등의 시선으로 이웃과 형제를 바라보는가?
② 사랑 받은 자로서 예수님의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가?
■ 읽기 | Lectio
구약 | 삼하 18:5, 32-33
5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 지휘관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32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응송 | 시 130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서신 | 엡 4:25-5:2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복음 | 요 6:44-51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삼하 18:33을 묵상하십시오. 아들 압살롬의 죽음을 대하는 아버지다윗을 보며 우리 사랑은 어떠한 마음이어야 한다고 생각됩니까?
② 엡 5:1, 2을 묵상하십시오. 오늘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랑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사랑이어야 하겠습니까?
③ 요 6:49-51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1988년 8월 14일 정동제일교회에서 '평화통일기도주일' 연합예배를 했던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11월 23-25일 스위스 글리온 회의에 참석한 남한과 북한의 그리스도인들이 매년 8월15일 직전 주일을 남한과 북한의 교회들이 함께 '남북평화통일 공동기도주일'을 지키기로 합의하였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남북평화통일 공동기도주일' 예배가 올해로 꼭 30년째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은총으로 올해의 한반도 상황은 매우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1988년에 열린 서울올림픽은 미국과 소련을 정점으로 하던 냉전이 종식되는 평화의 서막을 여는 축제가 되었고, 이후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1990년 독일의 통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꼭 30년 만에 열린 지난 2월, 평창올림픽에서의 평화의 분위기는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으로 이어졌습니다. 이후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향한 거대한 발걸음이 한반도와 동북아의 지형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통일 이전의 동독과 서독은 역사적 요인과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 통일은 불가능하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분단을 받아들이면서 제한적으로나마 교류와 협력에 나섰었는데, 예기치 않게 통일까지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독일과는 달리 남한과 북한은 그동안 통일을 위한 준비를 피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통일의 큰 꿈을 품고 있었기에 지금 한반도는 아슬아슬하게나마 '평화'의 첫발을 내딛고 있습니다. 남북 간 평화공존을 향한 걸음이 새 시대를 여는 한 축이라면, 미북 간 북핵폐기와 체제보장 합의는 다른 한 축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노력에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상대를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인정하는 역지사지입니다. 이 노력은 신앙의 눈으로 보면 혼합이 아니라, 둘을 변화시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같은 민족으로서 타고난 동질성에는 문제가 없지만, 오랜 분단으로 누적된 이질적인 정치체제와 이념, 그리고 사고의 차이는 극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극복하기 어려운 것은, 그간 상대방을 원수로 여겨온 적대관계입니다. 73년이 넘도록 끌어온 이념의 차이와 적대감은 사실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후천적 이질성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때가 찼고, 바야흐로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일구시는 평화의 시대가 다가옵니다. 이제 남한의 교회와 북한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주의 깊게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방향으로 순종하며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은 이 '따름'에 있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름지기 갖춰야 할 마음가짐이 무엇일까를 성찰하게 해줍니다, 구약성경에서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아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전장에 나가는 장군들에게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삼하 18:5)며, 자신을 반역한 아들을 선대할 것을 당부합니다. 그리고 아들 압살롬이 요압장군의 창에 죽었을 때는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 18:33) 하며 슬퍼합니다. 우리는 아비 다윗에게서 하나님의 마음을 봅니다. 압살롬이 어떤 아들입니까? 자기 아버지를 반역해 세(勢)를 결집하자고 아버지의 후궁들을 겁탈한 아들입니다.(삼하 16:21, 22) 자기 아버지 죽이자고 자객을 보내려 했던 아들입니다.(삼하 17:1-4, 12) 그런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아비의 마음은 자식과 달랐습니다. 그는 아들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습니다. 남들은 다 아들의 패륜을 문제 삼아도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안전에 온통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오늘날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은 바로 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일찍이 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던 시인은 오늘 응송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 시 130:7, 8
성도는 모름지기 '여호와의 인자와 자비'를 받아들여 '그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념을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념을 넘어서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보내신 분도 아버지시고, 사람들을 당신께 이끄시는 분도 아버지이심(요 6:44)을 가르쳐 주시며, 당신을 '생명의 떡'(요 6:48)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살과 피는 '우리의 생명을 위한 희생'이었습니다. 주님의 이 사랑이 아니고는 절대로 우리의 분노와 갈등을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당신의 살이 찢기고 피를 흘려 우리를 살리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들여서 '그 마음 그대로 우리 삶속에서 재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惡意)와 함께 버리고,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 32)고 당부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구절이 마치 빛바랜 사랑처럼 상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때가 흔합니다. 왜 그런 걸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음 없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랑과 용서를 자신의 마음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 바로 앞에서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 4:22)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 4:24)고 권면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말씀에서 새사람이 되어 살아가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 엡 4:25-27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초대교회 안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피차에 분을 품게 하는 심각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반목과 대립과 증오의 역사는 이미 예수님 당시부터 존재했었는데, 당시 이방 제국들에게 식민 지배를 받은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해서 좋은 생각을 품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또 이방인들대로 유대인들의 배타적인 태도를 거슬려했습니다. 이런 대립과 반감이 상징적으로 그려진 것이 예루살렘 성전의 '이방인의 뜰'이라는 실존하는 차별이었고, 초기 기독교 공동체 때에는 행 6:1-7에 기록되어 있는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헬라파 유대인들의 갈등이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정통성을 주장하는 히브리파 사람들에게 지긋지긋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교회의 구제에서도 헬라파 과부들은 항상 배제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따르면 그 여파가 안디옥교회에까지 미쳤습니다. 당시 안디옥교회는 이방인 기독교의 대표였는데,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먼저 "너희도 우리처럼 구원을 받고 싶으면 모세의 법에 따라 할례를 받으라"고 시비를 걸었습니다.(행 15:1) 그들의 말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이 일로 인해 예루살렘 종교회의까지 열리게 됩니다. 이렇게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사소하게는 과부들의 구제에 관한 문제로부터 중요하게는 구원론에 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27절)고 당부합니다. '분노를 품고 있는 것'에 시간제한을 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가끔 우리의 분노가 너무 과해서 화해의 시기를 놓칠 때가 있습니다. 개인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렇고, 민족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분노가 때를 넘겨서 죄와 섞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 우리의 분노가 내면에서 처리되지 못할 때, 마귀에게 틈을 허용할 가능성은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분단은 독일의 분단과 차원이 다르다고 합니다. 가장 큰 차이는 독일은 체제만 분단되었지, 사람은 분단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독일은 분단된 상황 속에서도 지정된 곳에서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고, 가족 간의 서신 왕래도 자유로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독이 가난한 동독을 위해, 인도적 차원에서 자금을 지원하는 프라이카이프(freikauf) 운동도 있었습니다. 서독은 동독의 경제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동독에서 탄앙당하는 기독교인들을 데려와 그들을 통일을 위한 사람으로 키웠습니다. 서독이 통일을 위해 사람을 키웠다는 부분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운동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1980년대, 평화를 갈망하는 동독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성지와도 같았던 '성 니콜라이 교회'가 있습니다. '성 니콜라이 교회'는 '성 토마스 교회'와 더불어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가 활동한 곳이기도 했는데, 독일 통일의 시발점이 된 사건 중 하나는, 이 교회에서 1982년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모인 평화기도회였습니다. 동독과 서독의 군비경쟁이 심화되고 있 때, '크리스치안 퓌러(Christian Fuhrer)' 목사가 "칼을 쳐서 쟁기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이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냉전시대에 평화를 열망하는 모든 사람들이 동참했고, '모두에게 열린 교회(Kirche offen fὕr Alle)'라는 안내판 그대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공산주의자와 반체제인사 등 어느 누구도 배제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그 기도회는 결코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운집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 당국은 성 니콜라이 교회로 가는 길목을 차단했습니다. 치안담당자는 700여 명의 사복 경찰과 군인들을 성 니콜라이 교회에 보내 미리 자리를 차지해서 사람들이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이 목사님의 산상수훈 설교와 모인 이들의 기도에 감화를 받고, 군중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요한네스 리히터(Johannes Richter)' 목사는 잠 25:8-9절을 본문으로 설교했습니다. "너는 서둘러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서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요한네스 리히터 목사는 이 말씀을 본문으로 삼아 인내의 용기와 격분을 거절하는 슬기를 발휘하자고 설교했습니다.이렇게 해서 성 니콜라이 교회는 인내와 온유함으로 독일 통일의 물꼬를 연 역사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분부하신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 28:20). 주님께서 분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형제를 형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분노가 고질병이 되어서 화해의 시기를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의 분노가 화해의 때를 넘겨서 민족적인 죄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계속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 엡 5:1, 2
여기에서 '그러므로'라는 단어는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이 앞에서 언급한 말씀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분을 내는 것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은 아예 분노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이 어떻게 분노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더구나 분노 중에는 의로운 분노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 엡 5:1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 엡 5:2
사도 바울은 분노가 내 감정을 지배할 때, 적어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맞는다면, 그리스도께 사랑 받았던 기억을 기억해 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는 목숨을 버려 사랑해 주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나를 당신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사랑을 기억하고 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미 2천 년 전에 그런 일이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일어났습니다. 원수 같았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율법으로는 죽어도 하나 될 수 없던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의 사랑을 먹고, 그 사랑을 생명으로 여기고 사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목숨을 걸고 나를 버리면 예수님은 새로운 생명과 평화를 주십니다.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 엡 5:1
여러분은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말씀'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을 통해 보여주신 아버지의 마음,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사랑의 마음, 바울을 통해 가르쳐 주신 사랑으로서, 이 땅에 분노와 단절의 역사를 끝내고 평화의 새 아침이 동터오게 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여전히 증오와 갈등의 시선으로 이웃과 형제를 바라보는가?
② 사랑 받은 자로서 예수님의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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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11.02 |
409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3주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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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10.26 |
408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2주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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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10.19 |
407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1주 하나님만이 오직 최선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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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10.12 |
406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0주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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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10.05 |
405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8주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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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21 |
404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7주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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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14 |
403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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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7 |
40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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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1 |
40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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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