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0주 예수를 '살아내는' 사람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8-05 14:33
조회
2015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삼하 11:2-5
2 저녁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3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4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5 그 여인이 임신하매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임신하였나이다 하니라
응송 | 시 14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서신 | 엡 3:14-19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복음 | 요 6:3-7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 묵상 | meditatio
① 엡 3:16-19을 묵상하십시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과 '믿 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들은 각각 무엇입니까?
② 삼하 11:2을 묵상하십시오. 다윗이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마음의 욕 망을 감추지 못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③ 요 6:5-7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의 시험 어린 물음에 대한 빌립의 대답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이화여대의 박경미 교수가 '예수의 교회, 마몬의 교회'라는 글에서 '맑스는 맑시스트가 아니고,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표현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녀의 말은 이런 취지인 것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는 유대교인이었는데, 그의 후예들이 그의 삶과 죽음을 기념하는 과정에서 '기독교'라는 제도적인 교회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이 말 속에는 현대 제도적 교회에 대한 다소간의 냉소(冷笑)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기독교는 예수를 '기념'하는 종교지, 예수를 '살아내는' 종교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스승과 제자 사이였던 유영모와 함석헌 이야기를 예로 듭니다. 다산 유영모와 함석헌은 서로를 지극정성으로 대했지만, 매우 엄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함석헌이 정부 허락을 받아 간디를 추모하는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유영모는 함석헌이 간디를 '기념'하는 것을 깊이 염려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간디를 기념하는가? 간디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 내가 간디처럼 사는 것이 중요하지 어째서 간디를 기념하는가?" 간디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지, 간디를 기념하는 것은 사실은 간디와 멀어지는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이야기 끝에 박경미 교수는 이런 말을 남깁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은 예수와 멀어지기 위해 예수를 높은 곳에 고이 모셔놓는다. 예수를 기념하는 것은 사실은 예수를 먼 과거의 인물로 박제하여 가두어 두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예수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했을 때, 그 말은 단순히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예수의 살과 피가 내 몸 안에 녹아들어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예수의 친구가 되어, 나도 예수처럼 하느님 나라, 동무들의 나라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참 아팠습니다. 예수를 따라 치열하게 살 자신이 없어서 내 마음 어디 후미진 곳에 박제처럼 모셔두고, 그의 말을 교리로 만들어 되새김질만 할 뿐, 정작 예수가 결여된 삶을 살고 있는 제 민낯이 다 드러난 느낌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예수처럼 살아감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존재가 아닌, 예수를 빙자해 하나님 나라를 그저 탐하는 소비자의 자리에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아주 각별한 단어를 들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이야기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는 사람'(엡 2:21),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사람'(엡 2:22),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이고, 둘째는 '성전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 중에 한 가지라도 결핍되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가 무척 힘들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사도 바울도 "너희는 성전이다"라고 완결형으로 이야기하고 않고, '너희는 성전이 되어 가고 있다', '너희는 함께 지어져 가고 있다'라고 현재 진행형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가 아직은 성전으로서 부족하지만, 그러나 종말론적인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그 가능성을 붙잡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성전이 되어가는 존재'로서 성도가 도달해야 할 세 가지 신앙적 목표에 대해 기도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예수를 멀리서 바라보며 기념만 하는 신앙인이지 않은가?
②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성전으로 지어지고 있는가?
■ 읽기 | Lectio
구약 | 삼하 11:2-5
2 저녁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3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4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5 그 여인이 임신하매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임신하였나이다 하니라
응송 | 시 14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서신 | 엡 3:14-19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복음 | 요 6:3-7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 묵상 | meditatio
① 엡 3:16-19을 묵상하십시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과 '믿 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들은 각각 무엇입니까?
② 삼하 11:2을 묵상하십시오. 다윗이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마음의 욕 망을 감추지 못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③ 요 6:5-7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의 시험 어린 물음에 대한 빌립의 대답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예수를 '살아내는' 사람
이화여대의 박경미 교수가 '예수의 교회, 마몬의 교회'라는 글에서 '맑스는 맑시스트가 아니고,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표현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녀의 말은 이런 취지인 것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는 유대교인이었는데, 그의 후예들이 그의 삶과 죽음을 기념하는 과정에서 '기독교'라는 제도적인 교회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이 말 속에는 현대 제도적 교회에 대한 다소간의 냉소(冷笑)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기독교는 예수를 '기념'하는 종교지, 예수를 '살아내는' 종교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스승과 제자 사이였던 유영모와 함석헌 이야기를 예로 듭니다. 다산 유영모와 함석헌은 서로를 지극정성으로 대했지만, 매우 엄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함석헌이 정부 허락을 받아 간디를 추모하는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유영모는 함석헌이 간디를 '기념'하는 것을 깊이 염려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간디를 기념하는가? 간디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 내가 간디처럼 사는 것이 중요하지 어째서 간디를 기념하는가?" 간디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지, 간디를 기념하는 것은 사실은 간디와 멀어지는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이야기 끝에 박경미 교수는 이런 말을 남깁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은 예수와 멀어지기 위해 예수를 높은 곳에 고이 모셔놓는다. 예수를 기념하는 것은 사실은 예수를 먼 과거의 인물로 박제하여 가두어 두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예수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했을 때, 그 말은 단순히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예수의 살과 피가 내 몸 안에 녹아들어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예수의 친구가 되어, 나도 예수처럼 하느님 나라, 동무들의 나라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참 아팠습니다. 예수를 따라 치열하게 살 자신이 없어서 내 마음 어디 후미진 곳에 박제처럼 모셔두고, 그의 말을 교리로 만들어 되새김질만 할 뿐, 정작 예수가 결여된 삶을 살고 있는 제 민낯이 다 드러난 느낌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예수처럼 살아감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존재가 아닌, 예수를 빙자해 하나님 나라를 그저 탐하는 소비자의 자리에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아주 각별한 단어를 들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이야기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는 사람'(엡 2:21),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사람'(엡 2:22),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이고, 둘째는 '성전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 중에 한 가지라도 결핍되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가 무척 힘들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사도 바울도 "너희는 성전이다"라고 완결형으로 이야기하고 않고, '너희는 성전이 되어 가고 있다', '너희는 함께 지어져 가고 있다'라고 현재 진행형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가 아직은 성전으로서 부족하지만, 그러나 종말론적인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그 가능성을 붙잡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성전이 되어가는 존재'로서 성도가 도달해야 할 세 가지 신앙적 목표에 대해 기도합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 엡 3:14-16
에베소 교우들을 위한 바울의 첫 번째 기도는 '내적 강화' 즉 하나님의 영을 통해 저들의 내적 본질이 강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의 중보기도가 필요할 만큼 현재 그들의 속사람이 약해져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겠습니다. '속사람(ἒσω ἄνθρωπος)'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몸과 영혼을 구별해서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으로 말하는 헬라 철학에서 온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4:16에서 이 '속사람'을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어 새로워진 사람'으로서 '겉사람(ἒξω ἄνθρωπος)'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겉 사람은 단순한 육체뿐 아니라 육적인 본능, 욕구 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사도 바울이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본디 성서적인 인간학에서 '육, 혼, 영'은 인간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가 아닌 '인간 자신' 혹은 '전 인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속사람'이라는 표현 자체도, 그것이 이원론으로 이해된 인간의 두 영역 중 한 부분이라든가 혹은 인간됨의 더 높은 단계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16절에서 말씀하는 속사람은 17절에서의 '마음(χαρδία)'과 동의어로 쓰인 것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마음은 성령이 임재하시는 자리이고(롬 5:5;고후 1:22),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자리입니다. 사도 바울이 '속사람'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자리가 '마음' 즉 속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한편으로는 완고해질 수 있고(엡 4:18),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신령한 노래를 부를 수 있고(엡 5:18), 존재를 성실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엡 6:5) 성령께서 내 마음을 꼭 붙잡아 주실 때, 우리는 내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음이 강건한 사람만이 그 삶 또한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도한 겁니다. "아버지께서 성령의 활동을 통해 여러분의 속사람 즉 마음을 강하게 하시고, 그럼으로 삶 또한 강건하기를 빕니다." 부디 성령의 새바람이 우리 마음에 불어와서 우리 마음이 강건해지고, 그럼으로써 삶 또한 강건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의 두 번째 기도를 보겠습니다.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 엡 3:17a
우리는 바울의 이 기도 안에서 그의 놀라운 영적 통찰을 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이 표현이, 16절에서의 "성령으로 말미암아"와 평행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오셨을 때,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모셔 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내 의지로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계시도록 허락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내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믿음을 나에게 주셨을 때,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엡 3:12),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에 오셔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는 수단이고(롬 6:3-5), 신앙 공동체의 존재양식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오셨을 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의 인식 능력 뿐 아니라, 행위의 능력도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나와 그리스도와의 바른 관계도, 나의 인식능력과 행위의 능력도, 새롭고 강건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이 되어가는 내 안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바울이 그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교우들의 마음속에 거하시기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막의 수도자들의 몸부림이 이해가 갑니다. 그들은 주님의 현존을 한시도 놓치지 않으려는 영혼의 몸부림으로 '단순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이집트의 스케테 사막에 살았던 성 마카리오스는 '주님'이라는 말마디만을 끊임없이 반복하라고 가르쳤고,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라고 묻는 제자에게 "말을 하기 위해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 그저 '당신의 지혜와 뜻을 따라 자비를 베푸소서'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말을 많이 하려다 보면 주님은 놓치고 말마디만 남을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짧은 말마디나 단마디 기도로, 기도는 단순하게 하고, 마음은 하나님 안에 고요히 머물러 있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단마디 기도를 '화살기도'라고도 하고 '단순기도' 혹은 '독백기도'라고도 합니다. 사막의 수도자들은 짧은 기도를 호흡에 결합해서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반복함으로서 기도의 지속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대표적인 기도로는 시편 51:1에 있는 "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와 시편 70:1에 있는 "하나님 날 구하소서. 주님 어서 오사 나를 도우소서" 등이 있습니다. 이런 시편기도들은 오늘날까지 계속되어서 주일예배에서의 '입당송'과 '죄의 고백'으로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성 대 바실리오스는 이렇게 단순기도가 지속되는 상태를 '지속적 영성체' 상태라고 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의 세 번째 기도를 보겠습니다.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엡 3:17b-19
바울의 이 기도는 나무의 뿌리와 집의 터를 연상시킵니다. 그러니까 지금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거주하심으로 믿음의 뿌리가 깊이 박히고, 믿음의 터가 더욱 튼튼하게 세워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때 성도들이 비로소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 것인지 바울은 우리가 그것을 깨달아 우리 존재가 완성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 안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존재가 완성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 안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사랑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16절부터 시작된 사도 바울의 기도가 첨차로 단계가 높아지는 것을 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해지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마음에 계시고,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지는 것 즉 사랑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성전에는 무엇보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건물로서의 성전은 기초가 부실하면 무너지지만, 성도로서의 성전은 사랑이 무실하면 무너집니다. 사랑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하면 과장된 표현일까요? 요 1:1, 14을 자의적으로 이렇게 고백해보았습니다. "태초에 사랑이 계시니라 이 사랑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사랑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사랑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저는 이 고백이 과장되지 않다고 봅니다. 사랑엔 가까이 가려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겁니다. 사랑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것, 우리는 이 사실을 말씀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육신을 받아들임으로서 가슴으로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말씀의 종교'일 뿐 아니라 '성사(聖事)적 종교'이기도 한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신 여러분이 예수님의 사랑에 뿌리를 박고, 예수님의 사랑을 기초로 살고, 예수님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예수님의 충만하신 사랑으로 여러분도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구약성경과 복음서의 말씀을 읽으면서 사람이 내적 성숙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그의 내면에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거나, 혹은 사랑을 기초로 자기를 세우지 못했을 때,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질 수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저녁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 삼하 11:2
우리는 이 짧은 말씀에서 이 순간의 다윗의 영적 상태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가 '저녁때' 침상에서 일어났다고 말함으로 그가 낮잠을 자고 일어났음을 암시합니다. 지금이 전시상황임을 고려하면 그는 분명 영적 긴장이 풀려 있는 것입니다. 이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목욕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의 내면이 영적으로 성숙해 있을 때는, 목욕하는 여인이 그다지 유혹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내적 성숙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까닭에, 그는 거침없이 간음과 살인으로 치달아 갑니다.(삼하 11:2, 15) 만약 그가 내적으로 성숙해 있었더라면 그녀의 아름다움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잃었기 때문에 그녀의 아름다움을 욕망의 대상으로 보고 맙니다. 그래서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는 '안티레티코스' 즉 '악한 생각과의 싸움'에서 부단한 내적 수행 즉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영혼의 욕정부'를 정화할 것을 당부합니다. 오늘 복음서는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자리에서 있었던 한 대화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월절이 가까운 때(요 6:4)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이 자기에게로 몰려오는 걸 보시고 빌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빌립이 예수님께 대답했던 말이 그의 내적 상태를 가늠하게 해 줍니다.우리가 어디에서 빵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 요 6:5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 요 6:7
지혜만으로 하는 대답은 기도하면서 하는 대답과 질적으로 다릅니다. 빌립은 명석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적 성숙과 신앙이 결여된 명석함은 주님의 뜻을 이루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고 맙니다. 주님께서 빌립에게 원하신 것은 내적 성숙도 신앙도 결여된 그런 명석함은 아니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빌립에게 원하신 것은 '사람을 향한 사랑이 배어있는 명석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기념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를 '살아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 후미진 곳에 박제처럼 모셔두고, 그의 말을 교리로 만들어서 되새김질만 하며 '예수가 결여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내적 수행' 즉 '말씀묵상과 기도'를 통해 내 마음에 성령께서 임재하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해지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마음에 계시고,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어, 인식능력 뿐 아니라, 행위의 능력까지 새롭게 되는 아름다운 성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예수를 멀리서 바라보며 기념만 하는 신앙인이지 않은가?
②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성전으로 지어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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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8주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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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21 |
404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7주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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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14 |
403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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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7 |
40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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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1 |
40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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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