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9주 나는 성전이 되어가는 존재입니다
■ 읽기 | Lectio
구약 | 삼하 7:1-7
1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2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3 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 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 4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6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 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7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 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 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응송 | 시 89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 내 손이 그와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서신 | 엡 2:11-22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 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 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 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 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 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 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 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 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 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복음 | 막 6:30-34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 새 33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 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 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삼하 7:2, 3을 묵상하십시오. 애초에 예루살렘 성전 건축은 누구의 구상으로 시작되었으며, 그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② 엡 2:20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성전의 모퉁이돌이시면, 그의 안에서 함께 지어져 성전이 되어가는 존재는 누구입니까?
③ 막 6:32-34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 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나는 성전이 되어가는 존재입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을 읽어보면 아주 각별한 단어를 사용해서 신앙의 본질을, 그리고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이야기해 줍니다. 그것은 바로 '성전(聖殿)'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밝히는 기독교인의 정체는 '성전'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에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면 나의 몸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아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기계적으로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왜 그런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왜 에베소교회 교우들을 향해 '성전이 되어가는 존재'라고 말씀했을까요? 먼저 우리는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성전과 당시에 위용을 떨치고 있던 예루살렘 성전이 다른 실체라는 사실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사람의 설계와 노동으로 지어진 건물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사람에 의한 질서와 차별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성전은 예수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시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기초로 세워졌습니다.(엡 2:20) 우리는 지난 주 구약성경을 통해서 다윗이 베 에봇을 입고 춤추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의 아내이자 사울의 딸인 미갈에게 체통 없는 행동이라며 힐난까지 받았지만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에 모심으로서 마침내 다윗 성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이 된 것으로 인해 기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사실 다윗처럼 입지전적인 인물도 참 드뭅니다. 헤브론에서 남유다의 왕위에 오른 다윗은 북이스라엘의 왕인 이스보셋이 죽자 북이스라엘 지파의 장로들이 찾아와 그에게 기름을 붓고 왕으로 옹립함으로서 강력한 통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마침내 법궤까지 다윗 성에 모셔옴으로서 종교적인 정통성도 확보하게 됩니다.(삼하6:1-23) 오늘 구약의 말씀은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 시작됩니다.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 삼하 7:1
여기에서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란 다윗 왕이 정치적 종교적 정통성을 확보함으로써 더 이상의 대적과 정적의 위협이 없는 가장 평화로운 때를 맞이했음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나라가 평화로워지자 다윗의 마음속에 한 가지 부담이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궤가 아직 휘장 안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그가 나단 선지자를 불러서 하는 말과 나단 선지자의 반응을 보십시오.내 말을 들으시오. 나는 이렇게 백향목으로 지은 궁에서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아직도 휘장 안에 모셔둔 채 그대로 있소 | 삼하 7:2 공동번역
야훼께서 함께 계시니 무엇이든지 뜻대로 하십시오 | 삼하 7:3 공동번역
물론 학자들에 따라서는 나단 선지자가 이렇게 짧게 대꾸한 것을 냉소적 반응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선들이 무리도 아닌 것이 당시는 왕조 전통과 선지자 전통 사이에 적잖은 갈등이 실재하던 때였습니다. 왕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어떤 공간 안에, 자기를 위해 안전하게 가두고 싶어 했지만 선지자들은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들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다윗의 성전 건축을 달가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다윗에게 반문하십니다.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 삼하 7:5 공동번역
사실 이 말씀은 반대하시는 말씀입니다. 대상 17:4에 보면 "너는 내가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 라고 반대의사가 더 확실하게 표현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성전 건축을 반대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거기에는 하나님 임재 방식에 대한 다윗과 다른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 삼하 7:6, 7
'다녔나니' 이 말씀은 동적인 표현입니다. 이 말씀에서 느껴지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정적인 분이 아니고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히브리들의 출애굽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줄곧 히브리의 역사 속에서 그들과 행동(行動)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건축을 향한 자신의 계획이 오히려 하나님을 가두게 되는 결과로 초래되지 않도록 조심했어야 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성전 건축을 포기합니다. 대신 하나님은 그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건축하도록 허락하십니다.(삼하 7:12, 13) 그러나 그렇게 해서 탄생한 예루살렘 성전은 결국 하나님을 가두고 백성을 억압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맙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나 오순절 등 중요한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제사에 참여했습니다.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도 예루살렘 성전은 순례지로서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거룩하게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눈에 띠게 사람을 차별하는 공간이 몇 군데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뜰과 여인의 뜰, 그리고 유대인의 뜰과 제사장의 뜰이 그것입니다. 이방인은 이방인의 뜰에만 머물 수 있었고, 여인은 여인의 뜰에만 머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발짝도 더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는 거룩한 사람들과 속된 사람들이 엄격하게 구별되도록 규정되어져 있었고 그것은 엄연한 차별이요 담(墻)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의 그 차별과 담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도 무너지지 않고 지긋지긋하게 사람들 삶을 지배하며 바울 시대까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을 읽어보면 바울 시대에는 이 차별이 성전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 엡 2:11
여기서 바울이 말씀하는 '너희'란 당시 에베소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바울의 말씀에 따르면 당시 에베소 사람들은 할례 받은 유대인들에게서 '무할례자들'이라는 오명(汚名)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 엡 2:12
바울이 더 기가 막힌 말을 합니다. 그 때에 에베소 사람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그들은 '밖'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구원에서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삶과 종교적인 삶에서 소외가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소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어떤 분들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차별한 것은 도덕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주 도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을 뿐 아니라 과부와 나그네를 잘 돌보아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들만큼은 한 형제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는 저들과 다르다'는 우월감이 그들 영혼을 옭아맸기 때문입니다. 열등감이 덫이듯이 우월감도 덫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도를 바꾸면 이러한 덫에서 영혼이 해방될 수 있을까요? 이방인을 유대인의 뜰에까지 들어오게 하고, 유대인을 제사장의 뜰에까지 들어오게 하고, 할례의 유무로서 사람을 차별하지 못하도록 제도를 개혁하면 사람을 차별하는 악습들이 사라질 수 있을까요? 물론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제도 개혁만으로 인간을 차별하는 문제들이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건 참 낭만적인 생각입니다. 본질적인 변화, 그리고 존재론적인 변화가 없이는 사람들을 '밖'에 세우는 일 즉 차별(差別)의 악습이 해결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변화란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 엡 2:14-16a
12절에서 '그 때에 너희는'이라고 말했던 바울이, 13절에서는 '이제는 너희가'라고 말씀합니다. 그때와 이제가 어떻게 다르다는 것입니까? '그때'는 너희가 그리스도 밖에 있었지만, '이제'는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혀있던 담을 허물었다고 말씀합니다.(엡 2:14) 법조문에 지나지 않는 율법을 폐하심으로 율법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로막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엡 2:15) 예수님이 무슨 이유로 십자가에 처형당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발한 이들은 율법의 최고 집행기관인 산헤드린 의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신성을 모독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신성모독이란 것에는,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만이 아닌, 창녀와 죄인들, 그리고 이방인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해 주는 예수의 반유대적인 모습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임으로서 율법의 권위를 지켜냈다고 자부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허무하게 죽으심으로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을 끝내 허물지 못한 듯 보였습니다. 결국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철저하게 신뢰했다가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으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바로 그 실패의 자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율법과 예루살렘 성전 질서의 승리로 보이던 십자가에서 전혀 새로운 사건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입니다.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엡 2:16b-18
여기, 먼데 있는 자들과 가까이에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신 이 분은 누구이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그 분이 사람들에게 평안을 전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신앙의 질서를 혁명적으로 무너뜨렸습니다. 구원의 기준이 달라졌습니다. '그 때' 그들에게 중요한 건 '율법을 지키느냐' 여부와 '성전에서 어떤 계급에 속해 있느냐'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에게 중요한 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나에게 믿어지느냐의 여부였습니다. 교회에서 사람을 소외시키는 악습이 극복되려면, 예루살렘 성전으로 대표되는 낡은 질서가 거부되고 '십자가와 부활'로 이어지는 구원의 은총 아래서 모든 사람이 형제임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에게 정말 중요한 건 무엇이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나의 직분이겠습니까? 그 직분에 따르는 서열이겠습니까? 마치 예루살렘 성전 안에 신분에 따른 차별이 존재했듯이, 여전히 우리 관심사가 그런 것에 매여 있어도 괜찮은 것일까요?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의 직분은 내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건 오로지 주님을 향해 순종하라고 주님께서 주신 종의 직분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내가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있느냐는 겁니다. 내가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내 안에 성령께서 현존하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포합니다.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 엡 2:20-22
여기에서 바울은 저와 여러분의 정체를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제시합니다. 첫째는,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엡 2:21) 그리고 둘째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어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주 안에, 성령 안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내가 '성전(聖殿)'이 되어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성전이십니까? 다행이 사도 바울은 "너희는 성전이다."라고 완결형으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직 현재 진행형입니다. '성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함께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성전으로서 아직은 부족하지만, 그러나 종말론적으로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의 말씀은 희망적입니다. 지금 내 모습이 이미 완성된 모습이라면 얼마나 실망스러운 사실입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성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함께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누구도 함부로 속단하면 안 됩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지금은 허점투성이이지만 그러나 아름다운 성전으로 지어져서,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성전으로서, 나의 내면에서 예배가 그쳐지지 않고, 나의 내면에서 기도가 그쳐지지 않고, 나의 내면에서 찬양이 그쳐지지 않고, 말씀이 샘물처럼 청량하게 솟아나 내 영혼을 적시고, 내가 성전이라서 헌신해야 하고, 내가 성전이라서 봉사해야 하고, 내가 성전이라서 십자가를 지는 놀라운 일들이 우리 삶 속에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누군가 '당신의 정체가 뭐냐'고 묻거든 나는 '성전이 되어가는 존재'라고 분명하게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예루살렘 교회처럼 사람이 만든 질서가 우리를 이끌지 않는가?
② 성전이 되어가는 존재로서 그에 걸맞은 열매가 맺히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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