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5주 지금 "예수의 이름으로" 산다
■ 읽기 | Lectio
구약 | 삼상 17:4-7, 45-47
4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요 5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무게가 놋 오천 세겔이며 6 그의 다리에는 놋 각반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으니 7 그 창 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 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가 앞서 행하더라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응송 | 시 9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 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서신 | 고후 6:1-10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복음 | 막 4:35-41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고후 6:1, 2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② 삼상 17:45을 묵상하십시오. 블레셋 사람이 칼과 창과 단창으로 다 가올 때, 다윗은 무엇에 자신을 의지하여 나아갑니까?
③ 막 4:40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서움에 떨었던 궁극 적인 이유를 주님은 어디에서 찾고 계십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지금 '예수의 이름으로' 산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톨스토이의 사상은 러시아만이 아닌 전 세계의 추종자를 얻었고, '톨스토이주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톨스토이는 문화운동과 사회운동의 중요한 사상적 토대로서 많은 사람의 가슴을 벅차게 하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참회록'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매우 괴이한 상태가 이따금 나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 회의의 순간이, 생활의 운행이 정지해 버리는 것 같은 순간이 나를 찾아오게 된 것이다. ... 이러한 상태에서는 언제나 '무엇 때문에?', '그래서 앞으로는?' 같은 질문이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이러한 회의와 참회를 통해 톨스토이는 변해야 할 것은 인간 자신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우리 시대 모든 사람들이 인류를 변화시킬 생각을 하고 있지만 정작 아무도 자기자신을 변화시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면서 사람에게 있어야 할 영구적인 혁명은 '도덕적인 혁명', '영혼의 갱생'이라고 고백합니다. 톨스토이는 모든 민족공동체가 형제애를 통해 영적으로 결합함으로서 서로간의 유대를 공고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그리고 너희 가운데 있다"(눅 17:21)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국가 대신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 했고, 삶속에서 기독교 정신을 실현하려 했고, 전통적이면서 새로운 기독교 사회를 건설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톨스토이의 회심은 러시아에서 차르체제의 기반을 뒤흔들고, 마침내 볼셰비키 혁명을 위한 갱도를 뚫게 됩니다. 톨스토이의 이러한 삶의 여정을 읽다 보면 한 사람의 회심과 변화가 그 자신과 역사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게 됩니다.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처해진 삶의 현실에서 자신이 성찰하고 깨달은 만큼 반응하며 살아갑니다. 신앙적인 성찰과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범사에 신앙적으로 반응하며 살아가고, 이성적인 성찰과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범사에 이성적으로 반응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성서일과를 묵상하면서 우리가 보는 것도 그것입니다.
먼저 구약성경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선택을 따라 기름부음 받은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을 통해 자신의 중심을 검증 받는 이야기입니다. 골리앗이라는 당대의 전사를 맞아 싸울 때, 다윗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셨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골리앗을 이긴 것은 물매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삼상 17:45)으로 골리앗과 싸워 승리합니다. 그런가 하면 복음서에서는 마치 골리앗 앞에 선 이스라엘 군대처럼, 광풍 앞에서 공포에 겨워 소리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자기들 곁에 주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죽게되었다"(막 4:38)며 절망스러워 합니다. 마가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묻는 것은, 격랑이 끊이지 않는 인생의 바다에서 너에게 '믿음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그저 공허한 관념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고후6:1b-2
사 49:8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바울이 인용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할 때, 그는 당시 로마의 압도적인 힘과 맞서고 있었습니다. 바울 당시에 로마는 아드리아해로부터 에게해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도처에 기후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도로인 '에그나티아 가도(Via Egnatia)'를 건설했습니다. 이 '에그나티아 가도'에서 로마제국의 세계관이 거기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산을 자르고 계곡에 다리를 놓아 건설된 그 길은 자연과 지형조차도 로마에 굴복시키는 황제의 능력을 보여주는 징표였습니다. 그 길을 따라 로마는 제국의 문화를 세상에 퍼뜨렸습니다. 그런데 제국의 문화를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그 '에그나티아 가도'를 따라, 한 왜소한 유대인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 전역에 전쟁과 힘이 아닌 새로운 평화의 길을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그것은 '언약(言約)에 바탕을 둔 평화', '겸손함과 희생을 통한 평화'였습니다. 그 평화는 예수의 십자가가 보여준 평화였습니다. 로마의 압도적인 힘에 굴복하거나 매료되어 제국의 문화로 살기를 열망하던 사람들에게, 바울이 전하는 이 새로운 평화의 길은 낯선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가는 곳마다 의심의 눈길을 받았고 박해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고후 1:8, 9에서 자신이 소아시아에게 겪었던 고통이 얼마나 심했던지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어떤 열정이 바울로 하여금 그 길을 걷게 했을까요? 그의 열정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였습니다. 고전 1:18에서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비록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했지만, 그는 왜 사는지를 알았기에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그의 사도의 길을 받쳐 주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고 당부합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은 믿음 없는 이들을 향한 일갈이 아닙니다. 지금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말씀에서 '헛되이'의 헬라어는 '에이스 케논(εἰς κενὸν)' 즉 '빈', '공허한'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공허한 것으로 만들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이들은 그 은혜가 공허하게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고전 7:1에서의 바울의 말씀을 따라 유추하면, 그들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들을 깨끗하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어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이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도 바울이 봤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공허하게 만드는 행동들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도 일상의 자리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공허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지 모릅니다. 오늘 구약성경과 복음서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공허하게 만들어버린 사람들이 나옵니다. 먼저 구약성경의 배경을 소개하면, 블레셋 군대가 진군해 와서 이스라엘 군대가 엘라 골짜기에 진을 치고 블레셋 군대와 맞서고 있는 상황입니다.(삼상 17:1-3) 그런데 블레셋 군대에 골리앗이라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싸움을 돋우는 자' 즉 '전사'라고 소개하는데, 그는 거인이었고 일대일 결투의 최강자였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 그가 들고 있는 무기도 무시무시합니다.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무게가 놋 오천 세겔이며 그의 다리에는 놋 각반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으니 그 창 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가 앞서 행하더라 | 삼상 17:5-7
그런데 그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합니다.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삼상 17:8b-9) 사무엘서 저자는 이 때,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삼상 17:11)고 전해줍니다.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두려운 것이 정상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정상적인 두려움을 극복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른도 아닌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가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 삼상 17:45-47
왕을 비롯해 온 이스라엘 군대가 골리앗의 키와 그가 들고있는 칼과창에 압도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어린 다윗의 눈에는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눈에는 중무장한 거인 전사(戰士)가 보이지 않고,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만이 크게 보였습니다.(삼상 17:45) 우리는 이 '시각의 다름'을 봐야 합니다. 언제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 사람은 단순하게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어른들의 경험과 영리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공허한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믿음의 모범으로서 번번이 어린 아이를 세우셨던 것 같습니다.(마 11:25, 마 18:2, 3) 그러고 보면 지난주 하나님의 말씀은 과연 사실이었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오늘 우리의 중심은 과연 어떠한 상태일까요? 생각해보면 우리는 정말 질그릇처럼 연약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러나 잘못된 몸의 버릇이 마음을 지배할 때가 많습니다. 옛 사람들이 '수신(修身)'을 마음공부의 기초로 삼았던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몸을 잘 다스리는 것이 마음 다스림의 기초'라는 것입니다. 몸이 먼저 공포에 떨기 시작하니 마음마저 떨리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 역시 상황은 다르지만 결론은 같은 말씀입니다.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 막 4:36-39
여기, 마치 골리앗 앞에 선 이스라엘 군대처럼, 공포에 겨워 소리치는 제자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들은 거센 광풍(狂風) 앞에서 '우리가 죽게 되었다'며 두려워했습니다. 우리는 이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함께 있었다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격랑이 끊이지 않는 삶의 파고 속에서 너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의미냐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공허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다시 서신서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사도 바울의 말씀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하나님께서는 너에게 자비를 베풀 만한 때에 네 말을 들어주었고 너를 구원해야 할 날에 너를 도와주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 고후 6:2 공동번역
여기 '지금'이라는 단어가 재미있습니다. 한자로 풀이하면 '다만 지(只)', '이제 금(今)'인데, 영어로 옮기면 '지(只)'는 'only'이고 '금(今)'은 'now'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고, 귀하고 소중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시간은 '다만' 지금 뿐이고, '오직' 지금뿐입니다. 내일이면 늦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져야 하는 시간은 다만(只), 오직(only) '지금(今)'뿐입니다. 여기 '은혜 안에서' 살기 위한 바울의 몸부림을 보십시오.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 고후 6:3-8a
로마 제국의 세계관이 온 세계를 평정해서 제국의 문화가 세상의 진리가 되어버렸을 때,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고, 그 분과 맺은 새 언약이 나의 희망의 이유라며, 환난과 궁핍과 매 맞음과 갇힘을 감수하고, 깨끗함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으로 사는 게 어찌 쉽기만 하겠습니까? 마치 골리앗처럼 우리 마음을 윽박지르는 문명의 이기에 삼키어지지 않고, 광풍처럼 우리를 소스라치게 만드는 문화의 격랑마저도 유유히 거슬러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게 어찌 쉽기만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인들이 보기엔 낯선 존재들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꼭 붙든 사람은 이렇게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증언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의(定義)'를 보십시오. 얼마나 멋있는지 모릅니다.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고후 6:8b-10
오늘은 순교자 기념주일입니다. 지난 날 예수의 이름으로 죽음을 맞이했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바로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한국 교회를 지금까지 지탱해온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힘을 얻어 살았던 순교자들의 믿음과 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다윗이 이 하나님의 힘을 알았기에 오늘 응송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 시 9:10
이 믿음이 다윗을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살게 했고, 이 믿음이 사도 바울을 '다만(只)', '오직(only)' '지금(今)' '은혜 안에서' 살게 했습니다. 이 믿음 때문에 톨스토이는 회심한 이후 자신이 직면하는 모든 상황들 속에서 산상수훈을 삶의 지표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세상 정치에 휘말리지 않고, 국가 대신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 했고, 삶속에서 기독교 정신을 실현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입니까? 세상 모든 사람이 '에그나티아 가도'를 따라 세상의 힘과 지혜와 문화를 숭상하며 살아도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은혜를 공허한 것으로 만들지 말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며, '지금' 은혜의 날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세상이 제시하는 지혜와 힘과 문화를 따라 살고 있지 않은가?
②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지혜를 따라 '믿음으로서' 살아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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