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4주 내 마음엔 무엇이 자라고 있을까?
■ 읽기 | Lectio
구약 | 삼상 15:34-35, 16:6-7, 11-13
34 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자기의 집으로 올라가니라 35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11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12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응송 | 시 20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서신 | 고후 5:6-7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복음 | 막 4:26-32
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30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4:27, 28을 묵상하십시오. 씨앗을 심은 후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 동안 사람이 하는 일은 어떤 것입니까?
② 고후 5:7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의 삶과 사역에서 가장 우선되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③ 삼상 16:7을 묵상하십시오. 용모와 키를 중시 여기는 사람과 달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보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내 마음엔 무엇이 자라고 있을까?
4세기의 수도자인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는 인간의 세 영역의 아홉 가지 악습에 대해 말한 바 있습니다. 인간의 세 영역이란 탐욕적인 영역, 감정적인 영역, 정신적인 영역인데, 이 '세 영역' 안에 각각 '세 가지 열정'이 있다는 것이 에바그리우스의 성찰입니다. 예컨대 탐욕적인 영역 안에는 음식, 섹스, 소유에의 열정이 있고, 감정적인 영역 안에는 슬픔과 화 그리고 '아케디아(akedia)' 즉 지루함, 권태, 영적태만에의 열정이 있고, 정신적인 영역 안에는 명예욕과 질투심, 그리고 오만함에의 열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 영역 안에 있는 각각의 세 가지 열정은 처음에는 인간을 얽매지 않지만, 이것을 의식하지 않고 방치하면 결국에는 악습(惡習)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에바그리우스의 성찰을 떠올릴 때마다 "과연 지금 나의 내면엔 무엇이 자라고 있을까"하고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현실은 겉으로 드러난 나의 외모보다 속에 감추어진 나의 내면이겠습니다.오늘 성서일과가 일제히 말하려는 것 또한 바로 그 부분입니다. 구역성경에서 하나님은 용모와 키를 보고 새 왕을 찾으려는 사무엘에게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시며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5:7) 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심'이란 '마음(heat)' 즉 '인간의 내면세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이미 버림받은 사울이나 혹은 다윗의 형제들은 용모나 키의 준수함과 달리 그들 내면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왕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았으며, 반면에 다윗은 '내면에 하나님이 계신 자'로서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기에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라며 자신이 '내면을 가꾸며 사는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내면에 하나님을 모신 자'로 살아간다는 의미이고, '보는 것으로 행한다는 것'은 '육의 눈'에 '영의 눈'이 가려 '이목지관(耳目之官)'을 탐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형들을 선택하지 않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하신 것에는 바로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의 어린 시절은 외모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 내면을 아름답게 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영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사람의 영적 성장의 단계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 막 4:28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사람이란 영적 훈련이라는 과정을 거침으로서 처음에는 싹이다가, 그 다음에는 이삭이다가, 마침내는 튼실한 곡식으로 무르익는 존재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처음에 우리는 '겨자씨 한 알'(막 4:31) 같이 작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영적 훈련을 포기하지 않노라면 하나님은 우리 내면을 창조의 숨결로 채우셔서, 마침내는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아름드리 믿음의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막 4:32) 그래서 오늘 응송인 시 20:7에서 시인 역시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라고 노래합니다. 성도는 세상의 힘이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로 내면이 가꾸어지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이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비유를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매우 다양한 사례들을 비유로 활용하셨는데, 그 중 제법 많은 비중은 농사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가 들어있는 마가복음 4장에는 씨를 주제로 하는 비유가 세 가지 나옵니다. 하나는 막 4:1-9절로 '씨 뿌리는 사람과 밭에 대한 비유'이고, 둘째는 26-29절로서 '저절로 자라는 씨'에 대한 비유이고, 셋째는 30-32절로 '겨자씨에 대한 비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의 말씀은 이 중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를 시작하십니다.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 막 4:26
저는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 장면이 어렵지 않게 그려집니다. 씨를 뿌리는 것은 사람만이 하는 고유한 행동입니다. 고대 조상들이 씨앗에서 미래의 생명을 보아낸 것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신비한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토마토 묘목을 주셔서 밭에 심고 정성껏 물을 주며 키웠던 적이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다가 어느 날 열매를 맺히고 발갛게 익어가던 토마토는 지금 생각해도 그 생명의 신비에 가슴이 설렙니다. 이렇게 생명의 탄생과 성장은 온통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려분의 상상력을 동원하셔서 땅에 뿌려진 씨앗의 심정으로 이 신비를 한 번 따라가 보십시오. 씨앗 하나가 어느 농부의 손에 의해 땅에 뿌려졌습니다. 처음에는 뿌려진 그대로 씨앗이었겠지만 어느 순간 자기 몸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피부가 썩기 시작하다가 몸체도 썩어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썩은 그 몸에 가녀린 싹이 트이더니, 자기를 뒤덮은 두터운 흙을 밀어 올리고 땅 위를 향해 머리를 내밀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땅위로 오르자 햇빛이 머리 위로 쏟아지고, 비가 시원하게 내리면서 온몸이 해갈을 경험합니다. 자기가 자라려고 애를 쓰는 것도 아닌데, 자신도 모르게 하루하루 쑥쑥 자라갑니다. 그러면 농부의 시선으로 이 상황을 보면 어떨까요? 농부는 추수를 기대하며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가 한 일이란 좋은 씨를 가려 보관하고, 밭을 부드럽게 해주기 위해 쟁기질을 하고, 적당한 퇴비를 주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고 며칠 뒤에 밭으로 나갔습니다. 아주 작은 떡잎이 보입니다. 얼마 후에는 부쩍 자란 이삭이 보이더니, 어느 날 이삭마다에 열매가 달렸습니다. 이 신비를 마가는 오늘 복음서에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막 4:27, 28
마가가 여기에서 강조한 것은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 중에 이 당연한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 이치에도 우리를 착각하게 만드는 지점이 있습니다. 사람이 한 일이란 씨앗을 뿌린 후에 그저 '자고'와 '깨고'만 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라는 것까지 내가 한 일인 양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물도 주고 비료도 주긴 했습니다. 그리고 이 노력은 진정으로 소중합니다. 그러나 우리 노력은 거기까지입니다. 씨앗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시는 '주체'는 철저하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씨앗을 뿌리는 자이지 자라게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지난 수요일에 우리가 한 일도 일종의 '씨앗을 뿌리는 일'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이 나라 발전을 열망하며 투표라고 하는 씨앗을 뿌렸습니다. 이 행위를 받아 역사가 자라게 하고, 평화를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철저하게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농부가 뿌린 씨앗 안에는 '생명'이 있었는데, 우리가 뿌린 씨앗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 마음속에 진리가 살아있고, 그 마음속에 정의를 향한 갈망이 있고, 그 마음속에 평화를 향한 갈망이 있고, 그 마음속에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은 그를 통해 역사가 발전하게 하십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장로와 백성들이 '다른 나라들처럼' 혹은 '모든 나라들처럼 '왕을 세워주기를 고집할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불러 "그들의 말을 들어주라"(삼상 8:9)고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사울왕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때 사울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렸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 | 삼상 9:2
외모로만 판단했을 때 그는 한 나라의 왕이 되기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 한 곳 흠 잡을 데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왕이 된 이후의 그의 행동을 보면서 사람의 인격이라는게 얼마나 나약한지도 보았습니다. 왕이 된 이후로 사울은 번번이 사무엘과 충돌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마침내 사무엘은 그를 찾아가서 선지자로서 그를 책망합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3) 그리고 오늘 말씀이 이어지는데 여기 아주 가슴 아픈 장면이 소개됩니다.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자기의 집으로 올라가니라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 삼상 15:34, 35
그런데 역사를 통해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자칫 어두운 역사가 수레바퀴처럼 반복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6장으로 계속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 삼상 16:1
그래서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새 왕을 찾아 베들레헴에 있는 이새의 집을 찾아갑니다. 이새에게는 아들이 여덟이나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에게 아들들을 한 사람씩 만나게 해달라고 합니다. 첫 아들인 엘리압이 사무엘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사울처럼 용모가 준수한 젊은이였습니다. 사무엘이 속으로 독백합니다.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 삼상 16:6
용모가 준수한 사울에게 그렇게 실망하고도 그는 아직도 외모로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십니다.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 삼상 16:7
하나님께서 외모보다 중심을 보신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사람의 겉모습을 보지 아니하시고, '레바브(לבב)' 즉 '내면의 중심'을 보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시선으로 볼 때만, 우리 자신도, 타인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선거 때, 여러분은 어떠셨습니까? 사무엘처럼 달라진 시선으로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셨습니까? 아니면 흔들리지 않는 일관성으로 과거의 기준 그대로 사람을 선택하셨습니까? 사무엘은 달라집니다. 그는 더 이상 외모나 키를 왕의 기준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이새의 아들 일곱 명은 모두 뛰어난 외모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은 그들을 모두 지나보냅니다. 그런데 아들 일곱 명이 다 지나갔는데 그들 중에 왕 될 인물이 없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아들이 또 없느냐"고 묻자 이새는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삼상 16:11a) 라고 대답합니다. 형들이 왕이 되기 위해 사무엘 앞에 있을 때, 여전히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던 사람, 다윗, 그가 바로 하나님께서 보아두었던 이스라엘의 새 왕이었습니다. 마침내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왔을 때, 하나님께서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삼상 16:12)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 삼상 16:13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수정해 주신 시선으로 다윗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그에게 부었더니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었습니다. 사람이 씨앗을 뿌리면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듯, 사람을 자라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복음서로 돌아와서 이 말씀을 좀 더 심층 깊게 묵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한 가지 '염두(念頭)'에 두어야 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비유라는 사실입니다. 마가는 어떤 사람이 씨앗을 뿌린 후에,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자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카테우데(katheude)'로서 '죽음'을 의미하고, '깨다'라고 번역된 단어 '에게이라타이(egeiretai)는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이 비유를 단순히 파종에서 수확에까지 이르는 '한 계절'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죽음과 부활까지 포함한 '인생 전체'를 전제하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복음의 씨앗, 말씀의 씨앗, 믿음의 씨앗이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내면에 기름을 부으셔서, 이 땅에서 살다가 죽고 부활하는 우리 인생 전체를 통해서 이 씨앗이 우리 안에서 자라게 하실 것이고, 열매 맺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결과를 주님께서는 '겨자씨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십니다.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 막 4:30-32
생각해 보면 예수 사건은 일종의 겨자씨와 같은 사건입니다. 말구유에 태어나 목수의 아들로 자란 예수, 불과 열두 명의 제자를 이끌고 갈릴리를 다닌 이 젊은이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2천 년 전에 팔레스티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겨자씨만큼 작고도 초라했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지난 2천년 동안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 그늘에 깃들어 쉼과 생명을 열매 맺게 된 생명 운동의 시작이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는 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 작고 작은 씨앗 안에 은폐되어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은총 말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내면에 이 씨앗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 고후 5:7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내면을 말씀으로 채우고' 살아간다는 의미이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겠다는 것'은 '육의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 빼앗겨 살아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면에 말씀을 뿌리며 살아간다면 우리 내면엔 생명의 씨가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씨앗에서 믿음과 생명의 싹을 틔우시고, 그 싹이 자라 아름드리나무가 되게 하시고, 가지마다 생명의 열매가 맺히게 하셨을 때, 주변의 이웃들이 우리를 찾아와 삶에서 지친 날개를 기댈 것입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외모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내면을 방치해두고 있지 않은가?
② 나의 내면은 말씀의 씨와 성령의 은총으로 자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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