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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3주 예수님의 참 형제자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6-10 11:39
조회
1339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삼상 8:4-9, 19-20
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9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 19 ○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20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응송 | 시 138
여호와께서는 높은 곳에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살피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심이니이다
서신 | 고후 4:16-18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복음 | 막 3:31-35
3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 이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3:35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 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까?
② 고후 4:16을 묵상하십시오. 우리가 변화되어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 은 어떠한 상태입니까?
③ 삼상 8:5, 20을 묵상하십시오. 이들은 자신들이 변화되고 싶은 모 범으로 누구를 세우고 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토마스 머튼이라는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낭만적인 시인의 열정으로 자기 삶을 사랑했고 26세 때는, 자기 삶의 궁극적 열정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 생애를 걸기 위해 트라피스트의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이후로 머튼은 검소하게 관상생활을 하며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가 쓴 '침묵 속의 만남'이란 책을 보면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항상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삶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소유하는 데까지 이를 수가 없으며 그러기에 우리는 어둠속에서 길을 가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는 이미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은총을 받아서 그 분을 소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러한 의미에서는 우리가 이미 도달한 것이고 빛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이미 도달해 있는 당신을 찾기 위해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건가요?"
이미 도달했음과 그렇지 못함 사이에 있는 수도자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기도입니다. 우리도 그런 심정일 때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주님과 무척 가까워진 것 같고, 말씀 하나에 감격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주님이 낯설기만 하고 들으면 들을수록 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어쩌면 이 고민은 그리스도를 따라 나선 우리 모두에게 운명과도 같이 주어진 고민이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민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현상인 듯합니다. 오늘 성서일과를 읽다 보면 구약시대 사람들도, 그리고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 선지자를 찾아가 '모든 나라와 같이'(삼상 8:5), 혹은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삼상 8:20)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요구 속에서 영혼의 어두운 밤을 봅니다. 이 어두움은 하나님이 너무 멀고 막연하게 느껴지는 어두움입니다. 그들은 그 영혼의 어두움 속에서, 택함 받은 나라 백성으로서의 자존감마저 상실한 채, 그저 다른 나라의 발전을 부러워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가 하면 복음서의 말씀에서는 예수님 가족의 고민이 엿보입니다. 혹은 멀게, 혹은 막연하게 느껴지는 이 영혼의 답답함은 심지어 예수님의 가족들조차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내 아들이고, 내 형제이지만 그럼에도 멀게만 느껴지는 답답함이 예수님의 가족이 가졌던 현실적인 고민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가 '미쳤다', '귀신들렸다'는 소문이 고향 마을에까지 들려왔을 때, 가족들의 시름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서에서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으러 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불신을 탓하기에 앞서 그들이 느꼈을 상실감을 헤아려보아야 할 것입니다.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반응이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제시하시는 가족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새로운 가족의 기준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태도 여부였습니다. 혈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태도야 말로 참된 가족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라는 프랑스 철학자의 말을 빌자면 주님은 혈연으로서의 가족을 '탈영토화' 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새로운 가족으로 '재영토화' 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셈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교회는 주님의 그런 뜻에 부응하여 형성된 새로운 가족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 우리는 지금 주님의 참된 가족이 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있으며, 과연 우리는 주님의 뜻에 동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앞에서 토마스 머튼의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은총을 받아서 그 분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는 우리가 이미 도달한 것이고 빛 속에 살고 있다"고 선언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제가 이미 도달해 있는 당신을 찾기 위해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건가요?" 라며 자신 없어하는 수도자의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공감이 되고 한편으로는 안쓰럽습니다.
요 6:60에 보면 예수님을 떠나는 제자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이게 제자들이 주님을 떠난 이유였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이성이나 경험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입니다. 요 6:61에 보면 예수님께서, 수군거리는 제자들에게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고 물으십니다. 진리라는 것은 인간의 이성에 항상 걸리게 마련인 것입니다. 영의 세계에는 항상 육의 것들이 걸림이 됩니다. 이성으로 어떻게 영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영적인 말씀을 하실 때마다 제자들은 항상 그 말씀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고 물으신 것은 그런 현실을 반영하신 질문입니다.
우리는 지난주 복음서에 등장했던 니고데모를 기억합니다. 그는 당대의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네가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가 뭐라고 반문합니까?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 3:4) 왜 이런 수준의 대화가 이루어집니까?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말씀을 육(肉)으로, 즉 영성이 아닌 이성으로 이해하려 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6, 7)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육(肉)으로는 육(肉)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성은 지성과 감성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肉)으로 영(靈)을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영을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육체는 땅에서 온 물질입니다. 육체는 죽어서 땅 속으로 들어가 썩어 흙이 됩니다. 그리고 정신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성과 감성과 의지'를 포함한 인간의 '혼(魂)'을 말합니다. 보편적으로 '인간'이라고 할 때, 이 육체와 정신을 합해서 이르는 말입니다. '정신'이 '물질인 육체'와 결합돼 있는 존재, 그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육적인 존재'인 동시에 '정신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이러한 육체와 정신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즉 인간의 정신이 만들어낸 사상이나 철학이나 예술 혹은 과학으로는 절대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무능합니다. 사상도, 철학도, 과학도 하나님을 알기에는 너무 무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성(理性)으로 듣는 사람이 있고, 영(靈)으로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성으로 듣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대해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면서 내적으로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니고데모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으로 듣는 사람은 '아멘'하며 감동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다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도 합니다. 그에게 성령님께서 임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때 그의 영혼은 비로소 생명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까?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닌 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육과 이성으로 세상만 만나는 것이 아닌 '영(靈)'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입니다. 구원이란 다른 말로 '존재의 완성'입니다. 존재의 완성이 어느 때 이루어지는 겁니까? 우리가 영적 존재가 될 때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성 이레네우스는 "완전히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처럼 완전해지라고 손수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즉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이 되라 하시는 바로 그 사람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는' 사람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와서 말씀도 듣고 기적도 보며 먹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예수님을 따라 산 것은 아닙니다.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가족조차도 예수님을 향해 '미쳤다'고 '귀신들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동조했습니다. 그 가슴 아픈 대열에 절대 끼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신서에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이 글이 글 된 까닭은 성경에 있다. 쓴 사람의 생각으로는 성경적 입장에서'도' 역사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자리에서'만' 역사를 쓸 수 있다. 똑바른 말로는 역사철학은 성경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서양에도 없고 동양에도 없다. 역사는 시간을 인격적으로 보는 이 성경의 자리에서만 될 수 있다.”
그러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성경의 자리에서 우리 역사를 보는 것입니다. 성경적 자리에서 '도' 역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자리에서 '만' 역사를 보는 것입니다. 만약 사무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변 국가들에 비해 자기들이 가난한 이유를 '성경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눈'으로 찾았다면 이후로 그들의 역사는 분명 달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평화로운 미래를 살았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여러분의 현재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계십니까? 때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원칙 없이 흔들리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변화와 쇄신을 일으키시는 성령께서 부디 우리 모두를 변화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서의 예수님의 가족들처럼 혈육임에도 예수님과 거리가 먼 가슴 아픈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신들의 현재와 미래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면 안 됩니다. 겉 사람은 세월과 함께 늙어가지만, 그러나 우리 속사람은 날마다 순수하고 풋풋해져서 주님만이 내가 선택할 뜻이 되시고, 주님만이 내가 걸어갈 길이 되시는, 그래서 삶이 온통 예수님 향기로 채워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육에 속한 정신과 이성으로 '영(靈)'을 보려하지는 않았는가?
② 영이 깨어있음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나를 조율하고 있는가?
■ 읽기 | Lectio
구약 | 삼상 8:4-9, 19-20
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9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 19 ○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20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응송 | 시 138
여호와께서는 높은 곳에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살피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심이니이다
서신 | 고후 4:16-18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복음 | 막 3:31-35
3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 이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3:35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 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까?
② 고후 4:16을 묵상하십시오. 우리가 변화되어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 은 어떠한 상태입니까?
③ 삼상 8:5, 20을 묵상하십시오. 이들은 자신들이 변화되고 싶은 모 범으로 누구를 세우고 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예수님의 참 형제자매
토마스 머튼이라는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낭만적인 시인의 열정으로 자기 삶을 사랑했고 26세 때는, 자기 삶의 궁극적 열정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 생애를 걸기 위해 트라피스트의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이후로 머튼은 검소하게 관상생활을 하며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가 쓴 '침묵 속의 만남'이란 책을 보면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항상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삶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소유하는 데까지 이를 수가 없으며 그러기에 우리는 어둠속에서 길을 가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는 이미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은총을 받아서 그 분을 소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러한 의미에서는 우리가 이미 도달한 것이고 빛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이미 도달해 있는 당신을 찾기 위해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건가요?"
이미 도달했음과 그렇지 못함 사이에 있는 수도자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기도입니다. 우리도 그런 심정일 때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주님과 무척 가까워진 것 같고, 말씀 하나에 감격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주님이 낯설기만 하고 들으면 들을수록 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어쩌면 이 고민은 그리스도를 따라 나선 우리 모두에게 운명과도 같이 주어진 고민이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민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현상인 듯합니다. 오늘 성서일과를 읽다 보면 구약시대 사람들도, 그리고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 선지자를 찾아가 '모든 나라와 같이'(삼상 8:5), 혹은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삼상 8:20)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요구 속에서 영혼의 어두운 밤을 봅니다. 이 어두움은 하나님이 너무 멀고 막연하게 느껴지는 어두움입니다. 그들은 그 영혼의 어두움 속에서, 택함 받은 나라 백성으로서의 자존감마저 상실한 채, 그저 다른 나라의 발전을 부러워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가 하면 복음서의 말씀에서는 예수님 가족의 고민이 엿보입니다. 혹은 멀게, 혹은 막연하게 느껴지는 이 영혼의 답답함은 심지어 예수님의 가족들조차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내 아들이고, 내 형제이지만 그럼에도 멀게만 느껴지는 답답함이 예수님의 가족이 가졌던 현실적인 고민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가 '미쳤다', '귀신들렸다'는 소문이 고향 마을에까지 들려왔을 때, 가족들의 시름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서에서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으러 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불신을 탓하기에 앞서 그들이 느꼈을 상실감을 헤아려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 막 3:32
그런데 이 때, 예수님의 대답을 보십시오. 너무 뜻밖의 대답을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막 3:33) 그리고 주님은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씀하십니다.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 막 3:34, 35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반응이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제시하시는 가족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새로운 가족의 기준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태도 여부였습니다. 혈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태도야 말로 참된 가족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라는 프랑스 철학자의 말을 빌자면 주님은 혈연으로서의 가족을 '탈영토화' 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새로운 가족으로 '재영토화' 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셈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교회는 주님의 그런 뜻에 부응하여 형성된 새로운 가족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 우리는 지금 주님의 참된 가족이 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있으며, 과연 우리는 주님의 뜻에 동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앞에서 토마스 머튼의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은총을 받아서 그 분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는 우리가 이미 도달한 것이고 빛 속에 살고 있다"고 선언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제가 이미 도달해 있는 당신을 찾기 위해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건가요?" 라며 자신 없어하는 수도자의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공감이 되고 한편으로는 안쓰럽습니다.
요 6:60에 보면 예수님을 떠나는 제자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이게 제자들이 주님을 떠난 이유였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이성이나 경험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입니다. 요 6:61에 보면 예수님께서, 수군거리는 제자들에게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고 물으십니다. 진리라는 것은 인간의 이성에 항상 걸리게 마련인 것입니다. 영의 세계에는 항상 육의 것들이 걸림이 됩니다. 이성으로 어떻게 영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영적인 말씀을 하실 때마다 제자들은 항상 그 말씀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고 물으신 것은 그런 현실을 반영하신 질문입니다.
우리는 지난주 복음서에 등장했던 니고데모를 기억합니다. 그는 당대의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네가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가 뭐라고 반문합니까?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 3:4) 왜 이런 수준의 대화가 이루어집니까?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말씀을 육(肉)으로, 즉 영성이 아닌 이성으로 이해하려 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6, 7)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육(肉)으로는 육(肉)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성은 지성과 감성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肉)으로 영(靈)을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영을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육체는 땅에서 온 물질입니다. 육체는 죽어서 땅 속으로 들어가 썩어 흙이 됩니다. 그리고 정신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성과 감성과 의지'를 포함한 인간의 '혼(魂)'을 말합니다. 보편적으로 '인간'이라고 할 때, 이 육체와 정신을 합해서 이르는 말입니다. '정신'이 '물질인 육체'와 결합돼 있는 존재, 그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육적인 존재'인 동시에 '정신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이러한 육체와 정신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즉 인간의 정신이 만들어낸 사상이나 철학이나 예술 혹은 과학으로는 절대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무능합니다. 사상도, 철학도, 과학도 하나님을 알기에는 너무 무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성(理性)으로 듣는 사람이 있고, 영(靈)으로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성으로 듣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대해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면서 내적으로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니고데모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으로 듣는 사람은 '아멘'하며 감동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다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도 합니다. 그에게 성령님께서 임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때 그의 영혼은 비로소 생명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까?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닌 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육과 이성으로 세상만 만나는 것이 아닌 '영(靈)'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입니다. 구원이란 다른 말로 '존재의 완성'입니다. 존재의 완성이 어느 때 이루어지는 겁니까? 우리가 영적 존재가 될 때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성 이레네우스는 "완전히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처럼 완전해지라고 손수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즉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이 되라 하시는 바로 그 사람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는' 사람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와서 말씀도 듣고 기적도 보며 먹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예수님을 따라 산 것은 아닙니다.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가족조차도 예수님을 향해 '미쳤다'고 '귀신들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동조했습니다. 그 가슴 아픈 대열에 절대 끼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신서에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 고후 4:16
여기, 우리가 변화되어가야 할 방향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 겉사람이 날로 낡아지는 것과 달리 우리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지고, 청년의 때처럼 풋풋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바울은또 말씀합니다.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 고후 4:18
지금 여러분의 시선은 무엇에 의존되어 있습니까? 잠시 보이는 것들에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시기 바랍니다. 구약성경에 가슴 아픈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을 찾아가서 이렇게 요구합니다.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 삼상 8:5b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 삼상 8:20
이스라엘의 사사시대가 저물고 왕정시대로 전환되어 가던 때의 한 장면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처음에 왕을 요구한 주체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이었습니다.(삼상 8:4, 5) 그런데 이 요구는 점점 백성 전체의 요구로 확대되는 양상을 띠게 됩니다.(삼상 8:7, 10, 19, 21, 22) 이들은 왜 그렇게 집요하게 왕을 요구했던 것일까요? 그들의 요구는 다른 강대국들을 동경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때 그들이 요구했던 왕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다스리는 그런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그들이 원했던 왕의 기준은 그저 '다른 나라의 왕과 같은 왕', '모든 나라의 왕과 같은 왕' 그런 왕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상' 안에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세상보다, 강력한 왕권과 통치로 이루어지는 부자 나라를 더 원했습니다. 사실 그들의 이런 태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라며, 그들의 이런 행태들이 이미 출애굽 이후로 계속되어 왔던 것임을 언급하십니다.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 역사'에서 '성서적 입장에서' 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그러한 표현이 일반 사람에게는 걸림이 될 듯하니 빼면 어떤가' 하는 의견들도 있었지만, 그러나 함석헌 선생은 역사를 기록하면서 '성서적 입장에서' 라는 표현을 빼는 것은 사슴에게서 뿔을 자르는 것 같다며 그대로 사용하기를 고집했습니다. 책에서 함석헌 선생이 이런 말씀을 합니다."이 글이 글 된 까닭은 성경에 있다. 쓴 사람의 생각으로는 성경적 입장에서'도' 역사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자리에서'만' 역사를 쓸 수 있다. 똑바른 말로는 역사철학은 성경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서양에도 없고 동양에도 없다. 역사는 시간을 인격적으로 보는 이 성경의 자리에서만 될 수 있다.”
그러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성경의 자리에서 우리 역사를 보는 것입니다. 성경적 자리에서 '도' 역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자리에서 '만' 역사를 보는 것입니다. 만약 사무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변 국가들에 비해 자기들이 가난한 이유를 '성경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눈'으로 찾았다면 이후로 그들의 역사는 분명 달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평화로운 미래를 살았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여러분의 현재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계십니까? 때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원칙 없이 흔들리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변화와 쇄신을 일으키시는 성령께서 부디 우리 모두를 변화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서의 예수님의 가족들처럼 혈육임에도 예수님과 거리가 먼 가슴 아픈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신들의 현재와 미래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면 안 됩니다. 겉 사람은 세월과 함께 늙어가지만, 그러나 우리 속사람은 날마다 순수하고 풋풋해져서 주님만이 내가 선택할 뜻이 되시고, 주님만이 내가 걸어갈 길이 되시는, 그래서 삶이 온통 예수님 향기로 채워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육에 속한 정신과 이성으로 '영(靈)'을 보려하지는 않았는가?
② 영이 깨어있음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나를 조율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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