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주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선 경외감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사 6:1-5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 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 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 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응송 | 시 29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 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서신 | 롬 8:12-15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 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복음 | 요 3:1-8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 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 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 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 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 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3:3, 5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의 또 다른 표현을 어떻게 설명하시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② 롬 8:14-15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 의 신분은 어떻게 변화되며, 그는 하나님을 뭐라고 부릅니까?
③ 사 6:1-5을 묵상하십시오.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스랍 들의 합창소리를 들은 이사야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선 경외감
성령강림 후 두 번째 주일인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이자 요한 웨슬리 회심 280주년 기념주일이기도 합니다. 삼위일체주일은 교회력에 있어서 종합적 축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펼쳐 가시는 구원 역사의 세 차원으로 우리 모두를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구원 역사의 세 차원이란 다름 아닌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의 차원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이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타락과 동시에 하나님께로 부터 분리되고 마는 형벌에 빠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비극으로부터 사람을 구하려는 하나님의 사역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의 사역이 그러하셨듯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차원에서 진행이 되었습니다. 교회력은 바로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차원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단계적으로 하나하나 조명해 줍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차원에서 구원사역을 보지 않으면, 자칫 우리는 무한히 크신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단편적으로 접하게 되어 그 본질적인 틀에서 벗어날 위험이 매우 큽니다. 예를 들어 구약시대의 출애굽사건과 시내산 언약,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파스카(Pascha) 신비' 즉 '구원의 은총'은 이 은총의 원초적 근원을 알 때만 비로소 명료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구원의 은총의 원초적 근원은 어디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모든 구원 역사의 원천은 철저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처음 창조로부터 시작된 인류 역사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사랑과 생명의 순환사건이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원천에서부터 출발된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이루신 파스카 은총'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과 그 분의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이라는 원천에서 인류의 구원사건이 흘러내렸습니다.단테가 자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성과 고도의 예술적 직관을 통해, 자신이 내세를 여행한 신학적 대 서사의 결론으로 모든 것을 '삼위일체 하나님 신비'에 귀결시킨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 천국 편 제 33가(歌)) 85-87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깊이 속에서 나는 보았노라. 조각조각 우주에 흩어져 있는 것들이 사랑으로 한 권에 엮여져 있는 것을" 이 단테의 고백 안에서 만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딱딱한 신학적 탐구를 통해 만나는 하나님이 아닌, 우리가 부드럽게 침잠할 수 있는 무한한 사랑의 대양 같은 하나님입니다.
성경역시 우리에게 엄격한 신학적 삼위일체보다는 부드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 요한이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예수님 위에 머무는 것을 보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요 1:33, 34) 그런가 하면 마태는 같은 장면에서,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님 위에 임하셨으며,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 14:11에서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렇듯 성부와 성자를 하나로 이어주는 그 신비의 역할은 성령의 몫이었습니다. 성자는 성령의 역할로 아버지를 알고 믿었으며, 성부는 성령의 역할로 성자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를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견고히 머물게 하는 힘도 성령의 몫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서에서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더 선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 요 3:1
어느 날, 니고데모라고 불리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오면서 대화가 시작됩니다. 이 니고데모는 공관복음서에는 언급이 없는데, 요한복음에는 세 번 나타납니다(7:50 ; 19:39). 요한은 이 사람을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소개하는데, 지도자를 의미하는 헬라어 '아르콘(ἄρχων)'은 산헤드린 공회 의원을 의미합니다. 산헤드린은 그 당시 유대인의 최고 종교회의 기관으로 그 구성원의 수는 71인이었고, 고위 종교 지도자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최고위층 인사인 니고데모가 친히 예수님을 방문했습니다.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요 3:2
그가 예수님을 찾아온 시간은 '밤'이었다고,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두 번 언급합니다. (요 3:2, 19:39) 그가 굳이 밤에 예수님을 방문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하나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요한복음의 맥락에서 밤은 악과 거짓과 무지의 실재로 상징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가룟 유다는 '밤에' 예수님을 떠남으로써 빛으로부터 사단에게로 함몰되어갔습니다. 그런가 하면 니고데모는 영혼의 밤으로부터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아왔다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니고데모를 향한 예수님의 일갈은 매우 단도직입적이고 신학적입니다.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요 3:3
2절에서 보았듯이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으로 간주한 근거는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이었습니다. 니고데모의 그 발언은 당시 유대교인들이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신앙관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들은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표적을 구함으로서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순간 대화의 주제를 바꾸십니다. 니고데모는 '표적'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표적'이 사람의 밖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면 '거듭남'은 사람의 안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표적'은 외부의 현상이 바뀌는 것이지만 '거듭남'은 내면의 본질이 바뀌는 겁니다. '표적'이 육적인 현상이라면 '거듭남'은 영적인 현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가져야 될 관심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듭남'입니다. 천지창조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었듯이, 거듭남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거듭남을 말씀하시자 니고데모가 놀라서 이렇게 반응합니다.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 요 3:4
우리는 니고데모의 이 대답을 유념(留念)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니고데모의 이 물음에 우리 자화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가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내면의 변화에 관심하며 살아온 삶이 아니라, 외적 조건에 반응하며 살아온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해 가는 여정에서, 그 영적 성숙을 방해하는 힘이 있는데, 그것은 영적 인식에 대한 우리 자신의 내면적 두려움과 저항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싶어 하는 것들 즉 지금껏 쌓아온 지식이라든지 경험이라든지 혹은 사회적 지위나 감정의 세계 같은 소위 그간 쌓아온 '아성(牙城)'들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러한 '자기 아성'들을 '자기 소유'로 인식하고, 개인 실존의 정체성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심리적 방어 기제들을 형성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현실적인 힘인데, 이러한 힘은 때로는 자기 갈망으로 때로는 자기 강화에 대한 집착으로 표출됩니다. 우리는 니고데모의 대답 속에서 바로 그 심리적 방어 기제를 볼 수 있습니다.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요 3:4 공동번역)라는 니고데모의 반문에는 이런 내심(內心)이 깔려있습니다. "이미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나서 양육 받은 이것보다 더 훌륭하게 양육 받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단 말입니까?" 사실 이 니고데모의 문제는 바로 저와 여러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요 3:5
'거듭남'이라는 주제에 니고데모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새로운 차원에서 설명해 주시는데, 그 새로운 차원의 핵심은 '물'과 '성령'입니다. 물에 대한 여러 가지 엇갈린 해석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세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복음서에는 물과 성령이 세례와 관련해서 항상 나란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요 1:26;마 3:11;막 1:8;눅 3:16 등등입니다. 물은 항상 깨끗하게 하는 상징으로 유대인들에게는 희생제사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였습니다. 제사장은 몸을 씻지 않고는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고, 에세네파에서도 개종자를 받아들일 때, 물세례를 행하던 습관이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에스겔 선지자가 물세례의 의미를 가장 분명하게 설명해줍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5-27)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약속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겉으로만 깨끗함을 받고 중심은 전혀 새로워지지 못하는 그런 변화가 아닌, 마음에 물을 뿌리고, 영이 새로워지는 근본적인 변화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아가는 것은 도덕적인 결단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영(靈)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아무리 니고데모처럼 존경받는 선생이라 할지라도 부도덕한 사마리아 여인처럼 새로 태어나야 했고, 나이가 지긋하게 들은 점잖은 노인도 아기처럼 새로 태어나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습니다.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이러하니라 | 요 3:6-8
'육(肉)'으로 난 것은 '육'의 한계를 넘을 수 없습니다, 설령 니고데모가 어머니 뱃속에 두 번이 아닌 수백 번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그러나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일 따름입니다. 위로부터 바람이 불어와야 했습니다. '거듭난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노덴(ἄνωθεν)'의 문자적 의미는 '다시' 또는 '위로부터'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거듭남은 위로부터 즉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세례 요한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 1:8) 물세례가 외형적이요 객관적인 구원의 사건이라면, 성령세례는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구원 경험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봅니다. 이 구원의 사건은 '위로부터' 그러니까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교만과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해 버린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성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주셨고, 성령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된 인간을 다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주님은 '거듭남'이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고 표현해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니고데모에게, 이런 변화가 있어야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 롬 8:12-14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산다는 것은 심리적 방어 기제들 즉 하나님의 은총의 빛이 나의 내면에 비추어 올 때, 지금껏 쌓아온 육체적 아성들이 무너질 것에 대한 내면의 두려움과 저항이 너무 커서 오히려 자기를 더 강화하는 것에 집착하고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에 따르면, 그렇게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대안으로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하는데,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은 '자아에 대한 죽음'을 말씀하는 것이고, 그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견고히 머물러 있을 때 가능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래야 산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려면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이 '자아에 대한 집착'을 압도해야 합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우리 그리스도교 예배에서 가장 많이 불린 성가를 꼽는다면 '상투스(SANCTUS)'일 것입니다. '상투스'는 라틴어로 '거룩하시도다'라는 뜻인데, 우리가 성찬 때 부르는 '거룩 거룩 거룩'이 바로 상투스입니다. 이 찬양에 예배의 본질이 있습니다. 우리가 영광을 바칠 대상은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비로소 '자아에 대한 집착'을 놓을 수 있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바로 그런 경험을 했던 한 사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경외감에 압도되어 자기 의를 내려놓은 사람, 이사야 선지자입니다.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 사 6:1-3a
하나님이 높은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엄에 대한 문학적 묘사이고,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다는 말 역시 하나님의 존엄이 성전에 가득하다는 사실에 대한 문학적 수사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스랍들의 합창 소리를 듣습니다.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 사 6:3b
이사야에 따르면 이 때,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했다고 합니다.(사 6:4) 만약 여러분이 이 광경을 목격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경외감에 사로잡혀서 이렇게 절규합니다.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 사 6:5
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 사 6:5오늘 우리 모두는 이 경외감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모두는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서의 경외감, 이 경외감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동안 포기하지 않고 싶어 하던 '자기 아성'과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참된 성전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참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선 경외감과 행복 그 황홀하고 부드러운 은총이 여러분께 있기를 축복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스스로 쌓아 온 지식과 경험들이 영적 성숙을 방해하고 있지 않은가?
②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나를 진정으로 엎드리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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