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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제7주 우리도 예수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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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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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0 11:18
조회
2153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신약 | 행 1:23-26
23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바 되어 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응송 | 시 1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서신 | 요일 5:10-11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 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복음 | 요 17:11-19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 옵나이다 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 묵상 | meditatio
① 요 17:14, 16을 묵상하십시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 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② 행 1:22을 묵상하십시오. 초대교회 공동체가 유다를 대신하여 다른 한 사람을 세운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③ 요일 5:10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 '증거'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앞으로 38년이 지나면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사두개파 사람들은 힘을 잃고, 율법과 회당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막강한 기득권을 챙기게 될 것입니다. 이때부터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따르지 않는 세력을 회당으로부터 몰아내기 시작할 것이고, 그 첫 번째 대상이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바리새파가 근본주의로 선회하면 원시 기독교는 양자택일을 해야만 합니다. 바리새파가 요구하는 정도로 율법을 준수할 것인지, 아니면 그들에게 저항할 것인지, 율법을 따르려면 복음의 본질훼손이 불가피하게 되고, 그들에게 저항하려면 정치적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의 이 걱정이 보다 구체화되어 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승천의 신비는 우리 존재성이 하나님의 오른편으로 이끌림을 받는 것뿐 아니라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으로 우리를 이끌기도 합니다. 기다린다는 건 그리워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움이 없이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기다리면, 하나님도 우리를 그리워하며 기다리십니다.
토마스 머턴은 '침묵 속의 만남'에서 '유일한 불행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면서,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과 기다림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당신은 언제 돌아오시겠습니까? 내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오시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당신의 이 순수한 사랑 외에는 결코 아무 것도 갈망하지 말아야 할 것만 같습니다. 이 사랑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는 당신, 곧 제 영혼 안에서 뿐 아니라 저의 모든 생각과 말과 기능들 안에서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는 당신입니다. 이 사랑으로 제 육체의 기능은 공허하게 사라지고 끝나버려 마침내 자유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순수한 사랑 외에는 아무 것도 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 육체의 기능이 사라지고 끝날 때, 우리에게는 자유가 황홀하게 남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에 몸을 두고' 살아가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석 유영모의 제자인 '김흥호 선생'은 '믿음은 기다리고 바라는 것'이라면서, 기다리던 비가 와서 우물에 샘이 터지듯, 은혜의 비가 오고 기쁨의 샘이 터져 나올 때, 그것을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손을 놓고 막연히 기다리기만 하는 기다림이 아닙니다. 김흥호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둑도 없이, 우물도 없이 비만 기다림은 너무도 태만하다. 둑을 쌓고, 우물을 파며 비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오늘날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주님"을 믿고 기다리는 성도로서, 둑을 쌓고, 우물을 파는 우리의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주님께 속한 존재'요, '세상에 보냄 받은 존재'로서 오늘 우리에게 맡겨주신 직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직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유다 대신 사도의 직무를 감당할 사람을 세우며 안타까운 기도를 합니다.
만약 유다가 주님의 희생으로부터 시작되어 부활과 승천, 그리고 다시 오심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이루어질 생명의 신비를 볼 수 있었더라면, 그래도 그토록 무모한 선택을 했을까요?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유다에 대해, '그가 제 곳으로 갔다'고 증언합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3년이나 주님과 함께 다녔으면서도 끝내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은 채 '자기 길'을 가고 만 것입니다. 대신 맛디아가 뽑혀서 열한사도의 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보면 어쩌면 맛디아는 불행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머잖아 닥쳐올 환란과 핍박의 한 가운데서 그도 잔인한 핍박을 당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우리 존재의 진짜 현실이 하늘에 있는 것임을 알았기에 기꺼이 사도가 되었습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요한은 말씀합니다.
"제가 여러분을 위한 주교라는 사실은 두렵고 떨리지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는 적이 위로가 됩니다. 여러분을 위해 섬길 때 저는 주교가 되지만, 여러분과 더불어 있을 때에는 저 역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 전자는 제가 떠맡은 직능의 이름이지만, 후자는 제가 받은 은총의 이름입니다. 전자는 위험을 뜻하지만, 후자는 구원을 뜻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직무를 수행하던지 우리는 꼭 이 당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직분 혹은 직능'은 위험한 이름이지만,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이름입니다. 어떤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보냄 받은 삶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사도 요한에 따르면 '자기 안에 증거가 있는 사람'입니다. 신앙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하나님 말씀을 '깊이 깨닫고, 깊이 믿어' 마침내 진리로 거룩하게 된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는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을 맞아 주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분,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분을, 믿음이 담긴 고백 속에서 바라보며 예수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우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삶을 살며, 동시에 세상에 보냄 받은 삶을 살겠다는 믿음의 결단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일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자기 직무를 망각하고 세상을 향해 가고 있지 않은가?
② 예수님처럼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신약 | 행 1:23-26
23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바 되어 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응송 | 시 1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서신 | 요일 5:10-11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 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복음 | 요 17:11-19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 옵나이다 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 묵상 | meditatio
① 요 17:14, 16을 묵상하십시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 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② 행 1:22을 묵상하십시오. 초대교회 공동체가 유다를 대신하여 다른 한 사람을 세운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③ 요일 5:10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 '증거'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우리도 예수님처럼
오늘은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이자 '승천주일'입니다. 승천주일은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대로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을 찬미하며 경배하는 축제일입니다. 따라서 그 어느 때 보다도 이 기간 우리의 눈길과 마음은 자주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때마침 오월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이 빛의 계절에 주님을 따르려는 우리의 마음이 당신께서 승천하신 저 하늘을 향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신앙의 선배들은 승천주일을 맞으면 이렇게 노래하곤 했습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올라가신 그곳으로 지체인 우리의 희망도 따르오니,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기쁨에 용약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드리게 하소서" 물론 그들이 노래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올라가신 그곳', '지체인 우리의 희망도 따르려는 그곳'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창공(蒼空)'이라는 물리적인 어떤 공간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승천이 갖는 신학적인 의미, 혹은 신앙적인 의미는 예수님께서 더 이상 제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성부 하나님의 세계로 돌아가셨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부활과 승천은 '별개의 두 사건'이 아닌 '연속적인 하나의 사건'입니다. 승천은 부활의 완성으로서, 예수님께서 본래 가지셨던 영광을 회복하신 '승귀(昇貴)' 혹은 '즉위(卽位)'의 사건입니다. 창조주로, 구원자로, 그리고 이제 마지막 심판자라는 본래의 자리로 복귀하신 사건입니다. 그 믿음을 초대교회 신자들은 사도신경을 통해서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오늘 복음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의미심장합니다.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요 17:11
저는 주님의 이 기도를 묵상하면서 주님의 기도가 너무나 현실적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선 감동했고, 그러면서도 그 현실을 극복하고 성도가 마침내 도달해야 할 '궁극의 자리'가 '성부와 성자가 하나이듯이, 성도 또한 주님과 하나 됨을 이룬' 자리라는 것에 다시 한 번 감동했습니다. 주님의 기도가 현실적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이 처해질 현실을 너무 정확하게 보고 기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라는 이 짧은 기도 안에 앞으로 제자들이 처해질 현실과 그 현실에 대한 예수님의 심정이 애틋하게 담겨있습니다. 당신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할 시간은 임박했는데, 당신이 부재한 세상에 황량하게 남겨져 위험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하는 제자들은 그야말로 '목자를 잃은 양' 그 자체였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보내셔서 제자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이지만, 문제는 당신의 죽음에서 성령강림까지 이르는 그 막간(幕間)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막간의 시간 동안 제자들로서는 감당하기 버거운 일들이 제자들이 남겨져 있는 세상에 거세게 몰아닥칠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그 제자들을 향한 연민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제자들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버거운 일은 앞으로 몰아닥칠 바리새인들에 의한 율법 근본주의의 거센 탄압이었습니다.앞으로 38년이 지나면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사두개파 사람들은 힘을 잃고, 율법과 회당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막강한 기득권을 챙기게 될 것입니다. 이때부터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따르지 않는 세력을 회당으로부터 몰아내기 시작할 것이고, 그 첫 번째 대상이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바리새파가 근본주의로 선회하면 원시 기독교는 양자택일을 해야만 합니다. 바리새파가 요구하는 정도로 율법을 준수할 것인지, 아니면 그들에게 저항할 것인지, 율법을 따르려면 복음의 본질훼손이 불가피하게 되고, 그들에게 저항하려면 정치적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의 이 걱정이 보다 구체화되어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 요 17:14
결국 우리는 11절과 14절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왜 그토록 절박하게 기도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세상에 남겨져 있으면서'도 '예수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남겨질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바람이고, 예수님께서 그토록 기도하셨던 이유였습니다. 결국 세상이 제자들을 그토록 미워한 이유도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분명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 요 17:116
물론 주님의 이 기도는 우리가 세상에 속해있지 않을 때만 성립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마지막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또 하나의 정체를 부여해 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속해 있지는 않으면서 동시에 세상에 보냄 받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 요 17:18
이 말씀의 흐름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11절에서는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라고 하셨습니다. 14절에서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8절에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다"고 하십니다. 결국 제자는 어떤 존재입니까?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세상에 속해있지는 않고, 세상에 속해있지는 않지만 세상에 보내진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승천 이후에 세상에 남아 있는 성도들의 정체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에서 그 거룩성 때문에 미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문제는 우리를 진정으로 거룩하게 하는 것이 뭐냐는 겁니다. 주님은 '진리가'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고 말씀합니다.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 요 17:17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 요 17:19
여기에서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성별(聖別, consecration)' 즉 분리된 삶을 의미하는 것인데, 헬라어 성경에 보면 '하기아조(ἁγιάζω)'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따로 떼어놓는다.'는 뜻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위하여 따로 떼어지는' 이 성별된 삶은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만 진리로 살아갈 수 있고, 말씀을 통해서만 '세상에 속해있지 않으면서 세상에 보내진 존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예수님의 이 기도가 우리를 '승천의 신비'에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 요 17:13
'당신의 기쁨을 우리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라'는 것은 당신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 기쁨이 우리 안에도 충만하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영원한 계절'에서 주님의 승천일을 보내면서, 주님께서 성육신하심으로 당신의 인간적인 삶을 우리와 공유하셨을 뿐 아니라, 승천하심으로서 우리의 존재성을 하늘 아버지의 오른편으로 이끄셨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의 이 영적 통찰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다가올 죽음만을 현실로 인식하고 죽음에서 부활로 그리고 승천으로 이어지는 주님이 이끄시는 내 미래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끝내 세상에 속한 존재로 세상을 탐하며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손에 모든 것을 움켜쥐어도 불안한 삶이고, 가진 것이 없으면 없어서 더 초라한 삶이 '세상에서 내 존재가 마감되는' 그러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우리가 맞이한 이 승천주일은 그러한 우리의 시선을 들어 하나님 안으로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한편으로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승천의 신비는 우리 존재성이 하나님의 오른편으로 이끌림을 받는 것뿐 아니라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으로 우리를 이끌기도 합니다. 기다린다는 건 그리워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움이 없이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기다리면, 하나님도 우리를 그리워하며 기다리십니다.
토마스 머턴은 '침묵 속의 만남'에서 '유일한 불행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면서,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과 기다림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당신은 언제 돌아오시겠습니까? 내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오시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당신의 이 순수한 사랑 외에는 결코 아무 것도 갈망하지 말아야 할 것만 같습니다. 이 사랑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는 당신, 곧 제 영혼 안에서 뿐 아니라 저의 모든 생각과 말과 기능들 안에서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는 당신입니다. 이 사랑으로 제 육체의 기능은 공허하게 사라지고 끝나버려 마침내 자유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순수한 사랑 외에는 아무 것도 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 육체의 기능이 사라지고 끝날 때, 우리에게는 자유가 황홀하게 남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에 몸을 두고' 살아가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석 유영모의 제자인 '김흥호 선생'은 '믿음은 기다리고 바라는 것'이라면서, 기다리던 비가 와서 우물에 샘이 터지듯, 은혜의 비가 오고 기쁨의 샘이 터져 나올 때, 그것을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손을 놓고 막연히 기다리기만 하는 기다림이 아닙니다. 김흥호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둑도 없이, 우물도 없이 비만 기다림은 너무도 태만하다. 둑을 쌓고, 우물을 파며 비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오늘날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주님"을 믿고 기다리는 성도로서, 둑을 쌓고, 우물을 파는 우리의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주님께 속한 존재'요, '세상에 보냄 받은 존재'로서 오늘 우리에게 맡겨주신 직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직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유다 대신 사도의 직무를 감당할 사람을 세우며 안타까운 기도를 합니다.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 행 1:25
만약 유다가 주님의 희생으로부터 시작되어 부활과 승천, 그리고 다시 오심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이루어질 생명의 신비를 볼 수 있었더라면, 그래도 그토록 무모한 선택을 했을까요?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유다에 대해, '그가 제 곳으로 갔다'고 증언합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3년이나 주님과 함께 다녔으면서도 끝내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은 채 '자기 길'을 가고 만 것입니다. 대신 맛디아가 뽑혀서 열한사도의 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보면 어쩌면 맛디아는 불행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머잖아 닥쳐올 환란과 핍박의 한 가운데서 그도 잔인한 핍박을 당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우리 존재의 진짜 현실이 하늘에 있는 것임을 알았기에 기꺼이 사도가 되었습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요한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 요일 5:10, 11
예수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우리 역시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삶이란 그런 것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그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음을 믿고, 주님께서 나를 보내신 세상 한 가운데서 주님이 맡겨주신 직무에 충실한 것입니다. 성(聖)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신앙이 좋은 어머니 모니카의 사랑 안에서 자라났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 방탕한 생활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암브로우스 주교의 설교를 듣다가 감동을 받고,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회심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후로 그는 주교가 되었고, 3년 동안 '고백록'을 집필합니다. 그런 그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매우 의미 있는 강론을 남깁니다."제가 여러분을 위한 주교라는 사실은 두렵고 떨리지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는 적이 위로가 됩니다. 여러분을 위해 섬길 때 저는 주교가 되지만, 여러분과 더불어 있을 때에는 저 역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 전자는 제가 떠맡은 직능의 이름이지만, 후자는 제가 받은 은총의 이름입니다. 전자는 위험을 뜻하지만, 후자는 구원을 뜻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직무를 수행하던지 우리는 꼭 이 당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직분 혹은 직능'은 위험한 이름이지만,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이름입니다. 어떤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보냄 받은 삶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사도 요한에 따르면 '자기 안에 증거가 있는 사람'입니다. 신앙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하나님 말씀을 '깊이 깨닫고, 깊이 믿어' 마침내 진리로 거룩하게 된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는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을 맞아 주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분,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분을, 믿음이 담긴 고백 속에서 바라보며 예수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우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삶을 살며, 동시에 세상에 보냄 받은 삶을 살겠다는 믿음의 결단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일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자기 직무를 망각하고 세상을 향해 가고 있지 않은가?
② 예수님처럼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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