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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제5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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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18-04-30 05:01
조회
1757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신약 | 행 8:32-39
32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37. (없음) 38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39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응송 | 시 22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 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서신 | 요일 4:7-10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복음 | 요 15:1-5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15:5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우리 안에, 우리가 그리스 도 안에 있으면 어떤 결과가 맺어집니까?
② 행 8:34, 35을 묵상하십시오. 에디오피아 내시가 궁금해한 것과 빌 립이 설명해 준 것은 무엇에 관한 것이었습니까?
③ 요일 4:7, 8을 묵상하십시오. 포도나무 가지로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어떤 것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사실 이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는 당대에 이 말씀을 직접들은 제자들이나 후대에 이 말씀을 전해들은 사람들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그들의 영적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입니다. 하나는 이 비유가 그 분위기를 보아 '최후의 만찬' 때 주어졌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 흘린 피와 최후의 만찬에서의 포도주는 '언약'이라는 맥락에서 일치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 흘린 피가 하나님과 히브리들 사이의 언약을 기념하는 것이라면, 포도나무 열매로부터 우러난 포도주는 주님의 감사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자녀들의 새언약을 기념하는 표증(表證)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단순히 주님과 제자의 관계에 국한된 비유를 넘어 보다 본질적인 구원의 메시지를 흠뻑 담은 예수님 사랑의 표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 비유가 즉석에서 예수님이 지어내신 말씀이 아닌, 이미 구약시대부터 선지자들의 예언과 시인의 기도를 통해 누누이 강조되어 왔던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포도원의 비유는 명백하게 대립되는 이중적인 색채를 띠고 선지자들에 의해 선포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의 표증으로서의 비유이고, 하나는 불충의 표증으로서의 비유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 5:1, 2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었도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렘 2:21에서 "내가 너를 순전한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됨이냐"며 안타까워하고, 에스겔 선지자는 겔 15:1-6에서 이스라엘을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로 묘사하며 그들에게 돌아올 징벌을 예고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포도원 혹은 포도나무로 표현한 구약성경의 이야기들마다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심연과 더불어 분노와 징벌의 심연도 예감하게 해줍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포도원의 비유는 하나님 자비의 언약인 동시에 심판의 예언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시편 80편에서 아삽은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여호와께 바치는 비탄에 찬 기도에서 여호와께서 과거 자기 조상들에게 베푸셨던 은총을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옮겨 심은 것'에 견주어 찬양합니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시 80:8-11) 그러나 아삽의 이 감사와 찬양은 이내 비탄으로 바뀌고 맙니다.(시 80:12-13)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돌보시던 포도나무는 어느새 외세의 침약을 받아 유린되어지고, 이내 황폐해지고 맙니다. 그들이 받고 누리던 전폭적인 사랑이 그만 어느 날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평가에 의하면, 그들이 좋은 포도가 아닌 '들포도열매(사 5:2)'를 맺었기 때문이고, 예레미야 선지자의 평가에 따르면 그들이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렘 2:21)'가 되었기 때문이고, 에스겔 선지자의 평가에 따르면 그들이 '쓸모없는 자들(겔 15:3-5)'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범한 악한 나무였기 때문(겔 15:8)'입니다. 그러나 아삽은 탄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이 포도나무를 결정적으로 다시 일으켜 주시기를 간청합니다.(시 80:14, 15) 아삽의 이 기도는 어찌되었을까요? 우리는 오늘 복음서의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읽으면서 아삽의 이 간절한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을 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하나님의 사자가 빌립에게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일러줍니다.(행 8:26) 빌립이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이사야 53:7 말씀을 읽는데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주님과 분리되어 열매 없는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② 주님의 가지로서 사랑과 평화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 읽기 | Lectio
신약 | 행 8:32-39
32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37. (없음) 38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39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응송 | 시 22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 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서신 | 요일 4:7-10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복음 | 요 15:1-5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15:5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우리 안에, 우리가 그리스 도 안에 있으면 어떤 결과가 맺어집니까?
② 행 8:34, 35을 묵상하십시오. 에디오피아 내시가 궁금해한 것과 빌 립이 설명해 준 것은 무엇에 관한 것이었습니까?
③ 요일 4:7, 8을 묵상하십시오. 포도나무 가지로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어떤 것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지난 금요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있었습니다. 남과 북의 정상이 군사분계선을 잠깐 사이에 넘나드는 모습을 TV 화면으로 지켜보신 분들은 아마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정전 이후 73년이 지나도록 그곳은 냉전의 상징이었습니다. 함부로 넘어갈 수도, 넘어올 수도 없던 그 선이 사실은 마음만 합의되면 누구나 아무렇지 않게 넘나들 수 있는 선이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중독'이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어쩌면 지난 73년 동안 우리 민족은 지독한 '분단 중독증'을 앓아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1991년 남과 북은 유엔에 동시 가입함으로써 '사실상' 별개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분명히 '조국은 하나다'였는데 '조국은 하나였다'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5000년 동안을 단일민족으로 살아온 그 장구한 역사를 생각해 보면, 상대적으로 길지 않은 우리 분단의 역사는 어느 한 시기의 전염병 같은 세월이고, 그 전염병에 중독되어 앓아온 세월입니다. 그 지독한 '분단 중독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제 우리는 새로운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 새로운 습관이란 새로운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고, 새로운 지향으로 완성해가는 것이겠습니다. 관계 심리학자인 '수잔 존슨'은 '우리는 사랑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에서 사랑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는 강한 정서(情緖)라고 말합니다. 서로를 향한 부정적인 정서가 잠잠해지고 회복과 조화를 이루는 만남이 지속되도록 이성과 정서를 잘 조절해 나가다 보면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것이 사랑의 관계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일과는 일제히 우리에게 그와 같은 '이성과 정서가 잘 조절된' 사랑의 차원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을 통해서는 이방인에 대한 정서적 편견을 극복하고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말씀을 가르쳐 줄 뿐 아니라 그에게 세례를 베풀어주는 빌립을 볼 수 있습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요한은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요일 4:7)이라고 역설하며, 성도는 '사랑함으로서 하나님께 속하는 존재'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 복음서에서 주님은 주님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사랑의 일치를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보여주십니다.사실 이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는 당대에 이 말씀을 직접들은 제자들이나 후대에 이 말씀을 전해들은 사람들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그들의 영적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입니다. 하나는 이 비유가 그 분위기를 보아 '최후의 만찬' 때 주어졌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 흘린 피와 최후의 만찬에서의 포도주는 '언약'이라는 맥락에서 일치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 흘린 피가 하나님과 히브리들 사이의 언약을 기념하는 것이라면, 포도나무 열매로부터 우러난 포도주는 주님의 감사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자녀들의 새언약을 기념하는 표증(表證)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단순히 주님과 제자의 관계에 국한된 비유를 넘어 보다 본질적인 구원의 메시지를 흠뻑 담은 예수님 사랑의 표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 비유가 즉석에서 예수님이 지어내신 말씀이 아닌, 이미 구약시대부터 선지자들의 예언과 시인의 기도를 통해 누누이 강조되어 왔던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포도원의 비유는 명백하게 대립되는 이중적인 색채를 띠고 선지자들에 의해 선포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의 표증으로서의 비유이고, 하나는 불충의 표증으로서의 비유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 5:1, 2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었도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렘 2:21에서 "내가 너를 순전한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됨이냐"며 안타까워하고, 에스겔 선지자는 겔 15:1-6에서 이스라엘을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로 묘사하며 그들에게 돌아올 징벌을 예고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포도원 혹은 포도나무로 표현한 구약성경의 이야기들마다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심연과 더불어 분노와 징벌의 심연도 예감하게 해줍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포도원의 비유는 하나님 자비의 언약인 동시에 심판의 예언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시편 80편에서 아삽은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여호와께 바치는 비탄에 찬 기도에서 여호와께서 과거 자기 조상들에게 베푸셨던 은총을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옮겨 심은 것'에 견주어 찬양합니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시 80:8-11) 그러나 아삽의 이 감사와 찬양은 이내 비탄으로 바뀌고 맙니다.(시 80:12-13)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돌보시던 포도나무는 어느새 외세의 침약을 받아 유린되어지고, 이내 황폐해지고 맙니다. 그들이 받고 누리던 전폭적인 사랑이 그만 어느 날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평가에 의하면, 그들이 좋은 포도가 아닌 '들포도열매(사 5:2)'를 맺었기 때문이고, 예레미야 선지자의 평가에 따르면 그들이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렘 2:21)'가 되었기 때문이고, 에스겔 선지자의 평가에 따르면 그들이 '쓸모없는 자들(겔 15:3-5)'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범한 악한 나무였기 때문(겔 15:8)'입니다. 그러나 아삽은 탄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이 포도나무를 결정적으로 다시 일으켜 주시기를 간청합니다.(시 80:14, 15) 아삽의 이 기도는 어찌되었을까요? 우리는 오늘 복음서의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읽으면서 아삽의 이 간절한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을 봅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 요 15:1
너무 오랫동안 황폐해 있었던 포도원이, 너무 오랫동안 쓸모없었던 포도나무가, '나는 참 포도나무'라는 예수님의 선언을 통해비로소 회복되기 시작한 것을 우리가 봅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는 이 선언에서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포도나무를 갖다 심으신 하나님의 본래적 숙원이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포도나무를 가져다 가나안에 심으시며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참 포도열매가 맺히기를 기대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정치와 경제에 밝은 왕을 요구하면서부터 그들은 주변의 나라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들 포도 같은 존재들이 되어가기 시작합니다. 떡이 아닌 여호와의 말씀을 의지해 새로운 차원의 삶을 꽃 피우는 그런 나라가 아닌 정치 경제 군사력에 의존된 풍요를 갈망하는, 심지어 이방우상들에게마저 풍요를 구걸하는, 그들은 영락없는 속물들이 되어갔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는 참 포도나무요"(요 15:1) 여기 참 포도나무인 예수님과 들 포도가 되고 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적나라하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제 당신께서 친히 '참 포도나무'가 되심으로 성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하시는 것입니다. 장구한 세월 그토록 이루어지지 않던 하나님의 뜻이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현실화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본문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신 혼자서만 참 포도나무가 되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일컬어 '너희는 가지라' 하시며 당신 안에서 '함께' 참 포도나무가 되도록 우리를 당신에게 결합시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요 15:3-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정체를 시원하게 밝혀줍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입니다. 여기에 '둘이 하나이요 하나는 둘'이라는 신비의 등식이 생깁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산술입니다. 열매는 어디에 열리는 것입니까?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에만 열립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열매란, 철저하게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열리는 가지에 맺힌 열매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런 영적 열매는 둘이 하나이요, 하나는 둘이라는 신비의 등식 안에 있는 포도나무 가지인 신자들에게 맺히는 놀라운 결실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과연 가능하겠냐는 겁니다. 사람인 우리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일치를 이룰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주님의 선언이 자못 비현실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주님의 이 말씀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우리 영과 몸이 하나님의 빛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려진 영적 수준으로 성숙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 영적 체험은 성령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육체에 머물러 있으면 우리는 그저 종교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으로 변화된 시각을 통해서, 즉 하나님을 관상하는 신비적 활동을 통해서 우리는 육체를 넘어 주님과의 영적 일치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런 뜻입니다.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 즉 그리스도와의 영적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첫째, 예수님을 진실히 따르려는 의지적인 노력 죽 수덕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성령의 은총을 통해서 가능한데, 성령의 은총 안에 성숙하게 머무를 때 몸과 혼과 영의 분리가 극복되어 마침내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4절에서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이 말씀은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런 뜻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그리스도께서는 내 안에 머무시는 것, 신앙의 신비를 이룬 그 상태가 바로 포도나무와 가지가 연합한 상태이고, 그 때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 맺는 삶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 그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특별히 이 역사의 격동기에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의 열매이고, '평화'의 열매가 아니겠습니까?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고,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로서 담장을 허무시고, 마침내 평화를 이루신 것입니다.사도행전에 보면 하나님의 사자가 빌립에게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일러줍니다.(행 8:26) 빌립이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이사야 53:7 말씀을 읽는데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 사 53:7, 행8:32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사랑의 십자가에 대해 이사야 선지지가 예언하신 부분인데, 도대체 사람의 이성으로서는 이해가 될 수 없는 이 사랑의 사건에 대해 빌립이 설명해 주었을 때,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수레를 멈추고, 빌립에게 세례를 받고, '주의 영' 즉 '성령'께서 빌립을 이끌어주십니다.(행 8:38, 39) 이때는 아직 이방인과 유대인의 관계가 극도로 혐오스러운 때였습니다. 이방인을 찾아가는 것도, 그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도, 편협한 이성으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 없이 이미 모든 민족, 모든 사람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주님의 사랑스러운 가지로서, 우리 역시 사랑의 열매 맺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분께 속한 삶이 됩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요한은 말씀합니다.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 요일 4:7-10
가지가 포도나무에 속해 있듯이, 사랑도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하지 않는 자는 요한에 따르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모를 뿐만 아니라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속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인을 통해 나타날 때, 세상은 그 열매를 보고 비로소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가지임을 알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와 '미움의 관계'는 180도 배치되는 정서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겹치고 교차되는 동의어로 쓰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살기도 하지만, 쉽사리 '미움의 관계'를 맺으며 살기도 합니다. 부디 우리가 맺어가는 모든 관계는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된 포도나무가지다운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속한 가지로서, 주님의 살과 피가 흐르는 가지로서,'미움의 열매'가 아닌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담장을 쌓는 사람'이 아닌, 담장을 허무는 사람'으로 2018년 이후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주님과 분리되어 열매 없는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② 주님의 가지로서 사랑과 평화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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