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부활절 제3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 읽 기| Lectio
신약 | 행 3:12-15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 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 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응송 | 시 4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서신 | 요일 3:2-3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복음 | 눅 24:36-43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 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 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 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눅 24:37-39을 묵상하십시오.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한' 제자들에 게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무엇이며,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② 행 3:12-15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목격하고, 부활 신앙으로 무장한 베드로는 어떤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까?
③ 요일 3:3을 묵상하십시오. 주를 향하여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마다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오늘은 부활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대개 주현절기와 성령강림절기 등의 표기들은 주현절 '후' 혹은 성령강림절 '후' 몇 주라고 쓰인 것과 달리 부활절은 '부활절 몇 주'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일만 바뀌었지, 지금도 부활절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깝게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50일 후인 성령강림절까지 7주간이 부활절이지만, 사실은 연중 52주일 전체가 부활절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동방교회 전통에서는 매 주일을 '작은 부활절'로 지키고 있기도 합니다. 그만큼 죽음을 이겨낸 부활절의 신비는 그리스도교 역사의 정 중앙에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새로운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 여정은 벅차고 부드럽고 평화로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저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신 이야기를 세 가지로 전하는데, 마치 동화를 읽는 것처럼 환상적으로 전개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 안식일이 지난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자들이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굴려 옮겨져 있고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합니다. 여자들이 근심하고 있을 때,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눅 24:6) 여인들이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는데, 누가는 그 때 사도들의 반응에 대해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않았다"고 회상합니다.(눅 24:11) 그리고 같은 날 저녁에 글로바라는 이름의 제자와 다른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10킬로미터 쯤 떨어진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들이 그즈음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을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서 나란히 걸으셨습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눅 24:17) 하고 주님께서 물으실 때, 그들은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서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눅 24:18)며 마치 예수님을 힐난하듯이 설명합니다.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눅 24:18-20) 그리고 이어서 하는 말에 그들 내면의 슬픔과 아쉬움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21) 그때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지금껏 자기들과 함께 걸으신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했지만, 날이 저물어 엠마오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실 때, 비로소 눈이 밝아져 예수님인 줄 알아봅니다.(눅 24:30, 31) 그들이 감격 속에 오던 길을 되돌아 예루살렘에 가 보니 거기 열한 제자와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들은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며 부활하신 예수님 이야기를 꽃피워내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거기 섞여서 자기들이 길에서 겪은 일과 떡을 떼어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분이 예수시라는 것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눅 24:35) 그리고 오늘 복음서의 말씀이 이어지는데, 안타깝게도 나머지 제자들은 이들 이야기를 믿지 못하는 분위기입니다. "이 말을 할 때에"(눅 24:36a) 그러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 눅 24:36b-37
지금까지 그들이 나누었던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감안하고 보면, 지금 그들이 본이는 반응은 엉뚱합니다. 그들은 너무 놀랍고 무서워서 자기들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영(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靈)'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 부활을 '몸으로 살아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의미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에는 "유령을 보는 줄 알았다"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십시오.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 눅 24:38-43
우리는 예수님께서 손과 발을 보여주시면서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하신 것, 그리고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맛있게 잡수시는 모습을 보면서 지난 주 복음서의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지난 주 복음서의 말씀에서도 주님은, 제자들이 두려움에 빠져서 모인 곳의 문이란 문은 모두 닫아걸고 있을 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라시며 당신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상처는 십자가 처형당할 때 생긴 상처였는데, 예수님께서 그 상처를 보여주신 이유는, 당신께서 죽기 전에 가지셨던 육체의 몸과, 부활하실 때 가지신 새 몸 사이에 분명한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영(靈)'이 아닌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 앞에서 제자들은 비로소 기쁨을 회복합니다. 당신의 부활을 의심하던 도마에게도 주님께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하셨을 때, 그 때 도마의 고백이 이랬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그러니까 지금 누가는 일관되게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데, 주님은 '몸으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확고한 부활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몇 가지 남았습니다. 우선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보인 현상들에 대해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요 20:19절에 따르면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모인 곳의 문들을 닫고 숨어 있을 때, 그곳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듯이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라는 말씀은 제자들의 두려움을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그곳을 통과해 오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주님의 그 몸'이 사실은 우리의 몸과 똑같은 몸이 아니라고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오늘 말씀 앞에 있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에서, 두 제자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인 줄 알아볼 때, 이미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눅 24:31) 함께 있다가 바람처럼 사라지신 이런 현상도 유령이나 마술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또 오늘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구운 생선을 맛있게 드시고 계십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이 몸으로 부활하신 것이 맞아 보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도 그 사실을 분명히 하시려고, 앞에서 상처 난 손과 발을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 분명히 몸으로 부활하셨으면서도 슬쩍 보여주시는 이런 모순적인 현상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영인가 싶었는데 몸을 보여주시는 것, 몸인가 싶었는데 나타나는 현상들 즉 살과 뼈를 보여 주시고 생선을 드시는 동시에 시간과 공간에서 자유로우신, 그 모습 앞에서 우리는 어리둥절합니다. 시공을 초월하는 유령은 유령일 뿐이고, 시공의 지배받는 인간은 인간일 뿐이지, 유령이면서 동시에 인간일 수는 없습니다. 이게 우리 인류가 경험한 세상의 원리입니다. 과학적으로도 그렇고 경험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런 모순적인 경계들을 넘나들고 있습니다.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섰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 중 하나는 이런 이야기를 허황된 것으로 취급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허황된 이런 이야기를 우리 삶의 중심에 둘 필요는 없습니다. 사이비 이단 교주들의 주장을 무시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태도는 누가를 포함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일상적인 보이는 세계'의 경험을 극복하고 '보이지 않는 생명 세계'를 경험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두 번째의 입장을 택한 사람입니다. 저는 그것이 진리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저와 같을 것입니다. 이 진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이해하려면 인간과 세상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벗어나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라는 독일의 신학자가 있습니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신학자들 뿐 아니라 비기독교 사상가들 중에도 토론된 바 있는 '그리스도 부활의 역사적 사실'에 관해서 현대신학에 많은 공헌을 남긴 분입니다. 그 분이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 사건'이라고 주장하며 '사도신경해설'에서 이런 설명을 했습니다. "역사가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반적인 규칙을 통해 완전하게 설명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발생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열린 입장을 보여야만 한다."
그가 말하는 '완전하게 설명될 수 없는 어떤 것들'이란, 사람들이 경험과 지식으로 기존에 알고 있는 것들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잘 받아들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역사 앞에서 정말 진실한 사람'이라면 자기 경험과 지식 외의 사실들에 대한 가능성을 결코 닫아두지 말아야 합니다. 어차피 과학의 발전이 그랬습니다. 지금까지의 과학적 논리로 해명이 안 되는 어떤 현상들을 연구하면서 발전해왔습니다.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시공간을 초월해 오셔서, 살과 뼈를 보여주시고, 구운 생선을 잡수셨다는 제자들의 경험은 분명 의학이나 생물학의 논리로는 해명이 안 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종말론적 생명 사건'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함으로서 종말에 완성될 생명을 미리 경험한 것입니다. 그 경험에 힘입어서 제자들은 혹독한 박해들을 버티어 냈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시라고 증언해낼 수 있었습니다. 이후로 그리스도교 신앙은 영과 몸을 하나로 봅니다. '몸이 없는 영'은 참된 인간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도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라고 지난 이천년 간 고백해온 것입니다.
물론 이 고백에 진통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몸의 부활'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던져왔습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전 15:35) 이 질문이 가볍지만은 않은 것이 부활의 형태에 관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곧 우리의 궁금함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죽으면 몸이 썩어 없어집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갑니다. 더욱이 요즘 우리 장례 문화는 거의 화장이 대세를 이룹니다. "그렇다면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이 도대체 가능하냐? 화장하면 지금과 같은 몸으로 살아나는 게 가능하냐?"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물음에 사도 바울이 신학적으로 설명한 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5장입니다. 여기서 두 구절만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고전 15:43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그리고 고전 15:52입니다.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여기서 키워드는 변화입니다. 지금 우리의 몸은 썩을 몸입니다. 맞습니다. 우리 몸은 없어집니다. 아무도 이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기막힌 설명을 했습니다. 그 설명이 바로 '변화'입니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고전 15:36) 그렇습니다. 씨앗을 심으면 죽습니다. 사람의 몸과 같습니다. 썩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죽음으로서 다시 살아납니다. 바울에 따르면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씨앗의 몸으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꽃으로 살아나고, 곡식으로 열매로 살아납니다. 심기고 죽은 그 씨앗에서 나왔지만, 그 씨앗과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이때 '심겨서 죽은 그 씨앗' 즉 '지금 내 몸'이 중요한 것이 '그 씨' 즉 '지금의 나, 내 몸'이 없었으면 꽃도 열매도 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게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변화'입니다. 이건 단순히 '모양만의 변화'가 아닌 '존재의 질적 변화'입니다. 과거의 자기 몸은 죽고 썩었지만, 그 몸에서 질적으로 완벽한 자기 몸이 부활한 것입니다. 그 부활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 고전 15:42-44
그래서 지금 내 몸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겁니다. 지금 내 몸이 부활의 몸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고전 6:19-20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우리 '몸'이 '성령의 전'임을 엄중하게 깨달아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경험한 이후로 제자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우리는 사도행전의 말씀에서 그 이후, 제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 행 3:13-15
여기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갔던 베드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입니다. 이후에도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 두려워 문까지 닫아걸고 숨어 살던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가 사람들 앞에 당당히 서서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달라도 너무 달라진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8) 그런데 지금 베드로가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5) 부활의 확신으로 성령의 전이 되었을 때, 베드로가 이렇게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요한은 말씀합니다.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 요일 3:2, 3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장래의 우리 모습이 아직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부활합니다. 그리스도를 향하여 이런 소망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처럼 우리도 깨끗한 삶을 살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관념도 지식도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살과 뼈'를 가지신 완전한 인격으로 만나고 체험하는 믿음, 부활신앙이란 그런 것입니다. 꽃에서 주님께서 피워내신 부활을 보는 것입니다. 열매에서 주님께서 맺히신 부활을 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매일, 매순간, 매사의 어디에나 주님께서 계시지 않은 곳이 없고, 내가 보는 모든 것, 내가 만지는 모든 것, 내가 느끼고 체험하는 모든 것이 주님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내가 살과 뼈를 가진 육신으로 그분을 보면 그분의 살이 아닌 것이 없고, 내가 살과 뼈를 가진 육신으로 그분을 만지면 그분의 뼈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라는 우리 신앙고백의 '진정성'입니다. 이 부활신앙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 모두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눅 24:36) 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에 '아멘!' 할 수 있습니다.■ 실천 | Praxio
① 지식으로, 관념으로 부활신앙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③ '몸의 부활'을 믿음으로서 삶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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