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부활절 제2주 도마의 의심, 도마의 고백
■ 읽기 | Lectio
신약 | 행 4:32-35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응송 | 시 133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서신 | 요일 1:1-3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복음 | 요 20:19-29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20:27을 묵상하십시오.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하신 후 당부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② 행 4:32-35을 묵상하십시오. 성령의 은총을 체험한 초기 그리스도 인들은 구체적으로 삶에서 어떤 변화를 보였습니까?
③ 요일 1:1-3을 묵상하십시오. 사도 요한이 '들은 바', '눈으로 본 바', '손으로 만진 바'를 사람들에게 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도마의 의심, 도마의 고백
오늘 부활절 두 번째 주일의 복음은 너무나 생생한 은혜로 가득 차 있어서 그 어떤 주석이나 강해 혹은 해설이나 설명을 가한다면 오히려 그 생생함이 모호함으로 망가질 것 같은 조심스러움이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얼마나 많이 살아있고 숨 쉬고 있는 주님의 현존을 되지도 않은 언설이나 생명 없는 교리나 말을 위한 말 따위로 변질시키거나 망가뜨려버리는지 모릅니다. 은혜의 근저(近著) 혹은 하나님의 실재에 접한 사람은 더 이상 할 말을 잃게 됩니다. 모든 언설을 다 동원하여도 도저히 그 신비를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는 자는 말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자만이 떠들고 또 떠들어 댑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 우리들 가운데 와 계심을 보고 느끼십시오. 이 계절 안에서 주님의 손길을 느끼고, 이 성전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느끼되, 우리가 나누는 성찬과 말씀 안에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라고 인사하시는 주님 음성을 여러분의 심장 가득히 채우시고,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침묵 안에서는 우리를 향해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 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숨결을 여러분의 폐에 가득이 채워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 안에 주님 계시고, 주 안에 나 있음'을 느끼고 맛보고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도마처럼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 요 20:28
이 고백의 외침이 벽력소리와 같이 주님의 손길을 느끼고, 주님의 현존을 느끼고, 주님의 음성을 느끼고, 주님의 숨결을 느끼는 여러분의 심장과 폐로부터 우러나와 하나님을 향해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그 때 여러분은 내면으로부터 존재 전체로 퍼지는 주님께서 베푸시는 평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은 우리에게 바로 이 감격으로 살았던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먼저 사도행전의 말씀에서 누가는 초대교회 모습을 이렇게 소개합니다.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 행 4:32
여기에서 누가는 이들을 일컬어 '믿는 무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라고 인사하시고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 하셨을 때, 자신들의 심장으로, 폐로, 온 존재로 주님의 음성을 느끼고, 주님의 숨결을 느꼈던 제자들은 진정으로 '믿는 무리'가 되었고, 그 믿음이 저들의 삶의 형태를 저렇게 바꾸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요한은 주님의 실재에 대해 독특한 표현을 사용합니다.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 | 요일 1:1, 2
우리는 사도 요한의 이 증언을 통해 생명의 말씀이 '태초' 즉 '영원 전부터' 선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태초부터 선재한 이 생명의 말씀을 우리가 '들었고', '보았고', '손으로 만졌다'고 말합니다. 말씀을 '들었다'는 표현은 이해가 가지만, 말씀을 '보았다'는 표현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더구나 요한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 라고 까지 합니다. 어떻게 이런 표현이 가능했을까요?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삼위일체론(De Trinitate)에서 요한의 증언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라는 표현에서 '말씀'은 확실하게 '성자'로만 해석되어야 한다. 이는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은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뜻이며, 같은 분을 말하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 두 분이 다 형상이신 것이 아니라, 성자만이 형상이시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라'는 표현을 통해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 가운데 육체로 오셨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이 증언을 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 요일 1:3
요한은 이 증언을 통해 사람들을 자신들과의 사귐 안으로 초청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과의 '말씀이 있는 사귐'은 곧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더불어 누림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손길을 느끼고, 주님의 현존을 느끼고, 주님의 음성을 느끼고, 주님의 숨결을 느끼는 이 느낌이 우리의 심장과 폐로부터 우러나온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귐'과 '누림'이 있는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보면 제자들은 이런 실재적 신앙 가운데 있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상황은 이렇습니다.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 요 20:19a
안식 후 첫날은 우리 기준으로 주일 저녁입니다. 이때 제자들은 모인 곳의 문들을 닫고 있었다고 요한은 전합니다. 그들은 '뒤라(θύρα)' 즉 '문'이 아니라 '뒤론(θύρῶν)' 즉 '문들'을 닫고 있었습니다. 문이란 문은 모두 닫아버렸는데, 막대기를 가로질러 끼움으로서 '케클레이스메논(κεκλεισμένων)' 즉 '굳게 닫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스승인 예수를 처형한 사람들이 언제 자신들을 체포하러 올지 알 수 없어, 그들은 두려움에 문들을 굳게 닫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이들의 두려움의 이유는, 지금 자신들이 주님과 함께 있지 않은 까닭에 있었습니다. 주님의 음성도 숨결도 느껴지지 않는 마치 고아와 같은 상태에서 그들은 극심한 불안정을 체감하고 있는 겁니다. 오심과 떠나심, 임재와 부재 사이의 긴장감이 지금 그들이 처해있는 현실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이 꼭 그럴 수 있습니다. 사실 제자들의 이런 모습은 오늘날 주님의 임재와 부재 사이를 오가는 우리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처한 두려움의 상황을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그곳을 통과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요 20:19b
그리고 주님은 자신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 상처는 십자가 처형당할 때 생긴 상처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가지셨던 육체의 몸과 부활하실 때 가지신 새 몸 사이에는 분명한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기쁨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 요 20:21-23
주님은 그들에게 기쁨과 평안을 회복시켜 주실 뿐만 아니라 다시 한 번 그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의 은총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러한 회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숨결을 회복하고 성령의 은총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 열두 제자 중 하나인 도마는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이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요 20:25) 라고 할 때,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딱 잘라서 이렇게 말합니다.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 요 20:25
이 한 마디 때문에 그는 지난 이천 년간 '의심 많은 도마'라는 불명예스러운 캐릭터의 주인공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부분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의심은 신앙생활에 있어 불경하기만 한 걸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심 없는 확신, 맹목적인 신앙이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확신에 찬 사람들은 좀처럼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회의(懷疑)를 통과하지 않은 성스러움'은 자칫 자신과 타인에게 폭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확신에 찬 사람이 얼마나 타인에 대해 폭력적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맹목적인 확신보다 회의를 거친 합리적인 의심이 우리를 더 성숙한 인식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참으로 알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의심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는 도마의 태도가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삶은 모호한 것입니다. 빛과 어둠, 성(聖)과 속(俗), 선과 악이 뒤엉켜 있습니다. 그렇기에 누구도 삶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어제 옳은 것이 오늘도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새롭게 물어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다.물론 만져보지 않고,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지 아니하겠노라는 도마의 태도가 꼭 이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이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눈에 보인다는 확실성'으로 우리를 기만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우리가 본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그랬습니다. 요한은 그들이 무덤으로 달려가서 "보고 믿더라"(요 20:8)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들이 '보고' 믿은 것은 예수님 부활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본다'는 것은 믿음을 일으키게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믿음을 가로막을 수도 있습니다. 또 참 믿음은 '시각적으로 보는 것'에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내면성과 내적 의미를 성찰함'으로 얻어지기도 합니다. '감추어진 내면성과 내적 의미를 성찰한다'는 것은 눈으로 보이는 이면(裏面)에 숨겨져 있는 진실에 관심을 두고 깨달아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도마의 태도가 반드시 옳다고 볼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러면 도마의 이 발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셨을까요?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 요 20:26, 27
도마가 이 때 예수님의 상흔에 자기 손을 대어 확인했을까요? 요한은 그것을 확인해주지 않습니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신 건 '믿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 말씀에 예수님의 바람이 들어 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하신 말씀은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 이후에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요 20:29
사실 이 말씀은 도마 뿐 아니라 거기 있는 제자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이고, 동시에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눈으로 보고서야 믿는 믿음'보다는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이 복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되 '잘 믿고', '올바로 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라고 주님 말씀 하실 때, 그 음성을 심장 가득히 채워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 하셨으니 주님의 숨결로 존재 가득 채워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도마처럼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도마의 이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자 본질이고 요체입니다.도마의 이 고백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사회 속에서 성찰해 봐야 합니다. 당시 현실 속에서 '나의 주님'이라는 표현은 로마 황제에게만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로마 황제가 최고 권력을 손에 쥐고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하던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로마 황제를 '퀴리오스' 즉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는 황제가 곧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도마가 주님을 향해 '퀴리오스' 즉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겁니다. 도마는 이 순간 진리를 분명히 안 것입니다. 도마가 비로소 '참 믿음'에 도달한 것입니다. 단지 교리적으로 주님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돌아설 회개의 대상'으로서의 주님을 깨달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퀴리오스는 누구일까요? 제가 교리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적으로 물으면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의 퀴리오스는 누구일까요? 대기업 총수일까요? 권력을 손에 쥔 정치인일까요? 실제로 이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 굴러갑니다. 오늘 우리의 삶과 생각과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배하고 있는 힘이 무엇인지를 보면 대답은 간단히 주어집니다. 현대인들은 세속적인 힘 즉 경제만능주의와 권력숭배라는 우상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교리적으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이 처한 상황도 사실은 그랬습니다. 그들은 이미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했던 주님께서 기뻐하셨던 고백이 무엇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그러나 이후로 사람들은 이 고백을 따라 살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로마 황제를 중심으로 한 제국의 질서가 사람들과 세상을 구원하는 진리로 여겨졌습니다. 존재 가득 주님이 느껴지고 경험되지 않는 신앙은 그렇게 신자를 나약하게 만들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실재를 가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점점 떼어놓는 우상이요 유혹일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런 사회 질서를 깨뜨리는 고백이 도마의 심장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입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 도마의 고백에는 "이제부터 나의 주님은 맘모니즘도 권력도 아닌 오로지 주님이십니다"라는 결단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고백을 하며, 이 고백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심장으로, 폐로, 온 존재로 주님의 음성을 느끼고, 주님의 숨결을 느끼며, 그렇게 주님과 일치를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로 '믿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비로소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우리 고백도 진짜가 되는 것입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나의 신앙고백이 교리의 차원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② 신앙고백과 삶의 변화가 일관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41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6주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
KOR | 2024.11.17 |
41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5주 나를 넘어 하나님께로
|
KOR | 2024.11.10 |
410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4주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
KOR | 2024.11.02 |
409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3주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
KOR | 2024.10.26 |
408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2주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
KOR | 2024.10.19 |
407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1주 하나님만이 오직 최선이시다
|
KOR | 2024.10.12 |
406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0주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KOR | 2024.10.05 |
405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8주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
|
KOR | 2024.09.21 |
404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7주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
KOR | 2024.09.14 |
403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
KOR | 2024.09.07 |
40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
KOR | 2024.09.01 |
40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
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