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사순절 제6주 참된 거룩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3-24 21:48
조회
1258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사 50:4-9a
4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 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 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 니하였느니라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 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 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9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응송 | 시 31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 사 나를 붙드소서
서신 | 빌 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 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복음 | 막15:25-39
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 (없음) 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 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 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 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 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사 50:6-9을 묵상하십시오. 고통과 조롱을 주는 자들 앞에서 끝까 지 당당할 수 있었던 이사야의 힘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이었습니까?
② 막 15:39을 묵상하십시오. 사람에게 조롱과 수모를 당하시고 십자가 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끝까지 지켜본 백부장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③ 빌 2:5-8을 묵상하십시오. 우리 안에 품어야 할 예수님의 마음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마음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비바람 치는 나무 아래서
찢어진 생가지를 어루만지며
이 또한 지나갈 거야 울먹이자
나무가 그랬다
정직하게 맞아야 지나간다고
뿌리까지 흔들리며 지나간다고
시간은 그냥 흔들리지 않는다고
이렇게 무언가를 데려가고
다시 무언가를 데려온다고
좋은 때도 나쁜 때도
그냥 그렇게 지나가는 게 아니라고
뼛속까지 새기며 지나가는 거라고
비바람 치는 산길에서 나무가 그랬던 것처럼, 정직하게 맞아야 지나가고, 뿌리까지 흔들리며 지나가는 그 '과정의 엄숙성'을 예수님은 당신에게 다가온 '시간' 안에서 고스란히 견디고 고스란히 겪으셨습니다. 그렇게 죽음의 묵은 땅을 걷어내고 일어난 생명의 사건이야말로 진짜 '경천동지'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예수님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성대한 환호와 그 후의 수난과 죽음 이 양면성은 서로 대립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자발적인 순종으로 수난과 죽음을 몸으로 받아들인 것이고, 그 수난과 죽음을 통해 '왕'이 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흔드는 진정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건인 겁니다. 이 경천동지할 사건은 벌써 구약시대 선지자들로부터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도 그 중 하나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이기적이고 야만적인 본성을 따라 살고 있지 않은가?
②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참된 거룩'을 살아내고 있는가?
■ 읽기 | Lectio
구약 | 사 50:4-9a
4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 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 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 니하였느니라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 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 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9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응송 | 시 31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 사 나를 붙드소서
서신 | 빌 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 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복음 | 막15:25-39
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 (없음) 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 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 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 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 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사 50:6-9을 묵상하십시오. 고통과 조롱을 주는 자들 앞에서 끝까 지 당당할 수 있었던 이사야의 힘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이었습니까?
② 막 15:39을 묵상하십시오. 사람에게 조롱과 수모를 당하시고 십자가 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끝까지 지켜본 백부장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③ 빌 2:5-8을 묵상하십시오. 우리 안에 품어야 할 예수님의 마음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마음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참된 거룩
오늘 우리는 종려주일을 맞이했고, 고난주간의 입구에 서 있습니다. 이즈음이면 우리의 마음은 어김없이 힘겹고 복잡한 심경에 빠져들곤 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저 옛날 성지(聖地)에서 벌어진 종려주일 풍경에서부터 비롯되는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환호하는 군중들과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서 성대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은 찰나에 지나가고, 성경의 장면은 일순간 수난과 죽음의 아비규환 속에서 비탄스러운 분위기로 뒤바뀝니다. 예수는 인간의 차디 찬 법정에서 조롱을 받으시고, 환호하던 군중들은 순식간에 돌변해서 이기적인 관람객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십자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광경들을 목격하며 우리는 사람이 현실문제에서 얼마나 야만적인지, 그리고 지금 내 모습은 저들과 얼마나 닮았는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야만성이 야수처럼 드러나 버린 현장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참된 거룩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 거룩은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주님의 자태에서 배어나오고 있는데, 마치 길고 추운 겨울을 이기고 피어나는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박노해 시인의 '나무가 그랬다'는 시(詩)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비바람 치는 나무 아래서
찢어진 생가지를 어루만지며
이 또한 지나갈 거야 울먹이자
나무가 그랬다
정직하게 맞아야 지나간다고
뿌리까지 흔들리며 지나간다고
시간은 그냥 흔들리지 않는다고
이렇게 무언가를 데려가고
다시 무언가를 데려온다고
좋은 때도 나쁜 때도
그냥 그렇게 지나가는 게 아니라고
뼛속까지 새기며 지나가는 거라고
비바람 치는 산길에서 나무가 그랬던 것처럼, 정직하게 맞아야 지나가고, 뿌리까지 흔들리며 지나가는 그 '과정의 엄숙성'을 예수님은 당신에게 다가온 '시간' 안에서 고스란히 견디고 고스란히 겪으셨습니다. 그렇게 죽음의 묵은 땅을 걷어내고 일어난 생명의 사건이야말로 진짜 '경천동지'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예수님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성대한 환호와 그 후의 수난과 죽음 이 양면성은 서로 대립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자발적인 순종으로 수난과 죽음을 몸으로 받아들인 것이고, 그 수난과 죽음을 통해 '왕'이 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흔드는 진정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건인 겁니다. 이 경천동지할 사건은 벌써 구약시대 선지자들로부터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도 그 중 하나입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 사 50:6
제2 이사야에는 '고난당하는 종의 노래'가 네 번 나타납니다. 사 42:1-4, 사 49:1-6, 사 50:4-11, 사 52:13-53:12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중에서 세 번째 노래인데, 이 말씀에 나오는 고난당하는 종은 일차적으로는 이사야 자신입니다. 당시 이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신탁을 받아 왕과 백성들에게 전해주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의 역할이라는 게 간단하지가 않았습니다. 왕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날 때마다 선지자들이 나서서 책망하고 경고해야 했습니다. 이런 책망들을 듣기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왕과 귀족들은 선지자들을 예의주시했고, 때로는 신체적 위협과 협박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따르면 그가 당한 고통은 세 가지입니다. 등을 맞았다는 건 일종의 태형(笞刑)으로 '육체'에 고통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수염을 뽑힌다는 건 '마음'에 수치를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얼굴에 침을 뱉는다는 건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의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되는 모욕과 수난을 당한 겁니다. 당시 이사야에게 모욕을 주고 조롱을 가한 사람들은 지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정상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이사야에게 모욕을 준 이유는 이사야가 자신들의 존재 근거를 위협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발언 가운데 그들이 문제를 삼은 것은 바벨론 포로생활이 곧 끝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 47장은 바벨론의 심판에 대한 설교입니다. 1절-3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을 다리와 속살을 드러내고 수치를 당하는 처녀로 묘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셔서 그렇게 수치스럽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47장만이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이 발언을 수차례나 반복했습니다. 바벨론 당국자들은 물론이고, 그 나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그들은 이사야의 수염을 뽑고, 침을 뱉으며, 모욕을 주는가 하면 목숨까지 위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 안전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체제를 거스르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 사 50:4, 5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시고', '나의 귀를 여셨다'는 고백에서 그가 얼마나 들려오는 말씀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힘은 '들을 귀'에서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의 종이란 '들을 귀'가 열린 사람인데, 하나님은 아침마다 이사야의 귀를 열어 당신의 말씀을 그의 귀에 담아주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사야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인 모욕과 수치를 당하고 협박을 당하면서도 말씀을 전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이사야에게서 두 가지 모습을 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열고 주신 말씀을 순종해서 전하는 모습이고, 또 하나는 그 말씀이 말씀 되도록 하기 위해 모욕하고 협박하는 자들을 향해 아무 저항도 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어쩌면 우리 시대는 '라멕의 노래'가 더 설득력 있는 시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창 4:23-24)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당연한 본능을 거슬러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해 살아갑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 사 50:8
이사야의 힘은 바로 여기 있었습니다. 그가 이를 악물고 학대를 견딘 것이 아닙니다. 복수를 다짐하며 조롱을 견딘 것이 아닙니다. 그의 힘은 바로 자기 가까이에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 의해 질적으로 진보되어 가는 것입니다. 먼 훗날 복음서 기자들은 '고난당하는 종의 노래'를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암시로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 바로 그 '고난당하는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옵니다. 시대는 변해도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심문하고 있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빌라도의 모습에서 우리는 구약시대 여호와의 종을 능멸하던 자들의 야만적인 본성을 다시 한 번 목격합니다. 빌라도는 보기에도 초라한 유대 청년을 조롱감으로 군중들에게 던져줘 버립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금쪽같이 여기던 법조항을 무시합니다. 산헤드린법 4장 1조 1항과 2항에는 '범죄인 심문은 반드시 낮에 할 것이며 해지기 전까지는 끝마칠 것'과, '만일 선고가 무죄일 때에는 심문 당일에 선고할 것이나유죄일 때는 다음날 선고하여 판결에 신중을 기할 것'을 법조문으로 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주님을 밤에 심문하고 심문한 당일 사형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로마 군인들에게 넘겨져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하십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몇 번씩 쓰러져가면서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주님은 저들에 의해 옷이 벗겨집니다. 저들은 주님께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로 관을 엮어 머리에 씌웁니다.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하고 "유대인의 왕 만세" 하며 희롱하다가, 주님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때리며 "네가 무슨 유대인의 왕이냐"며 또 조롱합니다. 우리 시간으로 금요일 아침 9시경에 주님의 형이 집행됩니다. 십자가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붙고, 양편으로 강도 둘이 주님과 함께 사형을 당합니다. 그때 지나가던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고 '자기 머리를 흔들었다'고 했습니다. 시22편에 의하면 '머리를 흔드는 행동'은 적대자에 대한 조롱의 몸짓입니다.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 막 15:29, 30
이 조롱은 주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마귀가 했던 시험의 연장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함께 주님을 희롱합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막 15:31) 심지어 주님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두 강도도 주님을 욕합니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막 15:32) 우리는 이들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조롱과 욕과 비웃음을 보이는 저 냉소적인 모습이 혹시 내 모습은 아닙니까? 이해와 사랑과 연민보다는 판단과 비판에 익숙하고, 비웃음과 냉소에 익숙한 내 모습 말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비웃음과 냉소에 휩싸여서 생의 가장 힘든 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없이 십자가를 감내하십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이 십자가를 절대로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무력함이요 패배입니다. 수치요 손실이요 좌절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십자가를 바라본다면 십자가는 새로운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저 야만적인 십자가의 현장에서 인간의 야만성이 여지없이 드러나 버렸다면, 예수님은 그 야만성을 십자가 사랑으로 바꾸어 최후 승리의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악을 이겨내기 위해 칼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수(數)에 의지하지도 않았고, 당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방법을 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빛난 이 당당한 승리는 세상의 강함과는 질적으로 다른 승리였습니다. 세상의 강함이 강격한 무기와 경제적 우위를 바탕으로 과시되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강함은 이미 십자가에서 드러났듯이 무기가 아닌 사랑으로, 과시가 아닌 희생으로 조용히 꽃피운 것이었습니다. 이 강함이 믿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을 따르는 일로 인해 세상의 조롱을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멸시를 당했다고 마음에 상처를 받거나 복수를 다짐하며 독해질 이유도 없게 됩니다. 우리는 세속의 영리함과 오만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바랍니다. 우리의 힘은 바로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이 승리한 현장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바로 '이 마음을 품으라'고 당부합니다.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빌 2:5-8
버트런드 러셀이 쓴 '서양 철학사'에 재미있는 분석이 있습니다. 러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윤리학을 분석하면서, "이성적인 소수들이 더 많은 행복을 누려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에 대해, 그의 사상은 현대 귀족 정치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그의 분석대로라면 우리 한국사회 안에서 사람들이 그토록 공부에 매달리는 이유는 이성적인 소수가 되어 더 높은 곳에 서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라는 뜻도 되겠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의 무의식 안에는 이런 류의 욕망에 대한 꿈틀거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의식에라도 품어야 할 마음은 그러한 마음들은 분명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당부합니다.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간직하고 이 고난주간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가치관을 내 가치관으로 받아들여 이 고난주간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고난주간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여정을 걸어가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조용히 그 분을 신뢰하면서 우리가 지고 있는 십자가를 견뎌내는 시간입니다. 인간은 십자가를 짐으로서 현실적인 타산에서 벗어날 수 있고,십자가를 감내해냄으로서만 내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야 말로 참된 거룩의 길입니다. 이사야 선지가가 그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몇 사람만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러면 세상이 변합니다. 한 방울의 물이 바다를 이루고, 한 줌 햇살이 우주를 키우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외쳤던 백부장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후로 그 백부장은 어떤 사람으로 살았을까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지 않았을까요? 그 거룩을 통해 로마가 변화되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내 귀와 마음에 담고, 그 말씀에 순종해서 살고, 세상을 거슬러 살아갈 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세상의 질서를 거슬러 살아갈 때, 그 거룩함 속에서 맞이하는 부활절은 생명으로 가득한 축제가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자리에서 부활 생명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실천 | Praxio
① 이기적이고 야만적인 본성을 따라 살고 있지 않은가?
②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참된 거룩'을 살아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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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0주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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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1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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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8주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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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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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7주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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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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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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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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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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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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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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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