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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제4주 믿음의 시선, 믿음의 삶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3-11 10:51
조회
1727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민 21:4-9
4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응송 | 시 107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서신 | 엡 2:10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복음 | 요 3:14-21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 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1. 민 21:8을 묵상하십시오.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다 불뱀에 물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처방은 무엇입니까?
2. 요 3:14-18을 묵상하십시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3. 엡 2:10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나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믿음에 관한 겁니다. 그런데 도대체 믿음이란 게 뭘까요? 도대체 우리의 믿음은 무엇에 대한 믿음이며, 그 믿음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뭘까요? 믿음이란 '신 뒤에 숨는' 혹은 나약하거나, 혹은 비겁한 행동인 것'일까요? 아니면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와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일까요? 요즘처럼 사람의 민낯이 부끄럽기만 한 시대에 '우치무라 간조가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복음서의 말씀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서는 어느 밤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온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니고데모를 바리새 파(派) 사람이고, 정치, 종교 사법의 기능을 수행하는 산헤드린의 의원이었다고 소개합니다. 그가 바리새파 사람이었다는 건, 그가 토라를 믿는, 신앙적으로도 진지한 사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당시 산헤드린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최고 의결기관인 '대산헤드린'과 그 외 지방에 있는 '지방 산헤드린'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가 그 중 어디에 속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니고데모는 사회적으로도 엘리트 계층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시라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다"(요 3:2)라고 말합니다.
당시 유대교의 고위급 인사로서는 이건 정말 할 수 없는 발언입니다. 그 발언을 듣고 예수님은 그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거듭남에 대한 몇 차례의 팽팽한 질문과 답변이 오갑니다. 니고데모의 입장은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느냐'(요 3:4)는 것이고, 예수님의 입장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5는 것입니다. 일종의 신학 논쟁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신학 논쟁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 있었던 신학 논쟁과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기자는 당시에 요한 공동체가 처해있던 상황을 이런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대략 기원후 100년 어간입니다. 당시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가 더 이상 좋게 유지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된 계기가 있다면 AD 70년에 끝난 유대전쟁이었습니다. BC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성전 체제가 무너졌던 것처럼, AD 70년에는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성전 체제가 무너졌습니다. 유대교는 어느덧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그동안 어설프게나마 관계를 맺고 있던 초기 기독교를 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인을 회당 공동체로부터 축출하는 작업이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로마 전역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요한복음에는 반(反)유대교 정서가 강하게 표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을 요한복음 기자는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형식으로 요 3:11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이고, '너희'는 유대교입니다. 앞의 2절에서 니고데모가 '나는'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가'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인정하는 발언을 한 것에서, 바리새인으로서, 그리고 의회원으로서의 몸에 배인 말투를 보았는데, 예수님께서 그 말을 그대로 받아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우리의 눈으로 본 것을 증언하는데,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실제로 초기 기독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그대로, 본 그대로 증언했는데, 유대교는 그걸 거부했습니다. 유대교가 기독교의 증언을 배척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축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초기 기독교는 더 이상 유대교와의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우리는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실천|Praxio
1. 시선을 땅에 두고 불평과 원망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2.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 시선을 맞추고 살아가는가?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민 21:4-9
4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응송 | 시 107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서신 | 엡 2:10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복음 | 요 3:14-21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 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1. 민 21:8을 묵상하십시오.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다 불뱀에 물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처방은 무엇입니까?
2. 요 3:14-18을 묵상하십시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3. 엡 2:10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나눔
믿음의 시선, 믿음의 삶
'우치무라 간조가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이라는제목의 글이 지난 해 기독교 사상 9월호에 실렸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치무라 간조, 신 뒤에 숨지 않은 기독교인'이라는 제목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양현혜 교수가 쓴 책에 대한 양명수 교수의 서평입니다. 함석헌과 김교신의 스승이기도 한 우치무라 간조는 1861년에 태어나 1930년까지 살았습니다. 그의 생존 시기는 일본이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추진하고, 조선과 중국을 침략해 제국주의로 발톱을 갈던 시기와 일치합니다. 그러한 시기에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은 일본의 정신문화를 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의 전통 안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두 개의 J' 즉 'Jesus(예수)'와 'Japan(일본)'을 두 축으로 서양 선교사에게 의존하지 않는 기독교, 서양 교파와 무관한 순수한 일본기독교 신앙을 추구했습니다. 지나치다 할 만큼 독립적인 그의 태도는 매번 서양 선교사들과 충돌했고, 그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지만, 그러나 우치무라 간조는 철저하게 서양 선교사나 교파에 의존된 기독교가 아닌 순수한 일본 기독교 그 자체를 추구했습니다. 우치무라 간조가 일본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의 신앙이 친일본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는 철저한 기독교인으로서 일본을 비판했습니다. 신앙적으로는 친일본적 기독교인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반일본적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자기 조국인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군국주의를 실현해갈 때, 그는 제국주의적 침략에 반대하고 전쟁 반대를 외쳤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조국을 사랑했지만, 보편적 진리에 기초를 둔 애국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보편적 진리는 철저하게 성서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철저한 속죄 신앙에 서 있는 단순한 믿음의 사람이었고, 그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도덕과 종교의 종착점이었습니다. 동지사 대학의 '에비나 단조'를 비롯한 신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정통교리를 비(非)신화화할 때, 우치무라 간조는 십자가의 대속을 믿고, 부활도 믿고, 재림도 믿었습니다. 그는 '자기 의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함으로' 비로소 인간은 죄와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짐을 믿었고, 하나님께 매임으로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는 믿음으로 그는 자유롭게 세상의 불의에 항거할 수 있었습니다.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믿음에 관한 겁니다. 그런데 도대체 믿음이란 게 뭘까요? 도대체 우리의 믿음은 무엇에 대한 믿음이며, 그 믿음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뭘까요? 믿음이란 '신 뒤에 숨는' 혹은 나약하거나, 혹은 비겁한 행동인 것'일까요? 아니면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와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일까요? 요즘처럼 사람의 민낯이 부끄럽기만 한 시대에 '우치무라 간조가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복음서의 말씀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서는 어느 밤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온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니고데모를 바리새 파(派) 사람이고, 정치, 종교 사법의 기능을 수행하는 산헤드린의 의원이었다고 소개합니다. 그가 바리새파 사람이었다는 건, 그가 토라를 믿는, 신앙적으로도 진지한 사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당시 산헤드린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최고 의결기관인 '대산헤드린'과 그 외 지방에 있는 '지방 산헤드린'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가 그 중 어디에 속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니고데모는 사회적으로도 엘리트 계층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시라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다"(요 3:2)라고 말합니다.
당시 유대교의 고위급 인사로서는 이건 정말 할 수 없는 발언입니다. 그 발언을 듣고 예수님은 그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거듭남에 대한 몇 차례의 팽팽한 질문과 답변이 오갑니다. 니고데모의 입장은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느냐'(요 3:4)는 것이고, 예수님의 입장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5는 것입니다. 일종의 신학 논쟁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신학 논쟁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 있었던 신학 논쟁과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기자는 당시에 요한 공동체가 처해있던 상황을 이런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대략 기원후 100년 어간입니다. 당시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가 더 이상 좋게 유지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된 계기가 있다면 AD 70년에 끝난 유대전쟁이었습니다. BC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성전 체제가 무너졌던 것처럼, AD 70년에는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성전 체제가 무너졌습니다. 유대교는 어느덧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그동안 어설프게나마 관계를 맺고 있던 초기 기독교를 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인을 회당 공동체로부터 축출하는 작업이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로마 전역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요한복음에는 반(反)유대교 정서가 강하게 표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을 요한복음 기자는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형식으로 요 3:11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이고, '너희'는 유대교입니다. 앞의 2절에서 니고데모가 '나는'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가'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인정하는 발언을 한 것에서, 바리새인으로서, 그리고 의회원으로서의 몸에 배인 말투를 보았는데, 예수님께서 그 말을 그대로 받아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우리의 눈으로 본 것을 증언하는데,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실제로 초기 기독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그대로, 본 그대로 증언했는데, 유대교는 그걸 거부했습니다. 유대교가 기독교의 증언을 배척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축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초기 기독교는 더 이상 유대교와의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우리는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 요 3:18
여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고, '믿지 않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았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심판을 단순히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지 않는 자가 받은 심판은 그런 일상의 불행보다 훨씬 궁극적인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구원자시라고 한다면, 그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으로 이미 구원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 사태가 바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심판이라는 겁니다. 오늘 니고데모로 상징되고 있는 유대인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들이 특별히 다른 사람들보다 인격적인 결함이 있다거나 혹은 종교성이 부족하거나,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시원치 않아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들의 작은 세계에 고착되어 있는 것, 그것이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근본 이유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름으로 고상한 종교 체계인 율법 안에서만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구원 사건을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의 대화가 힘겨운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작은 세계 즉 율법의 세계에 갇혀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구원 사건을 끝내 이해하기를 거부한 것으로 인해 주님은 18절에서 "벌써 심판을 받았다"고 하시면서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렇게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 요 3:19, 20
결국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단순히 종교적 신념의 차이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속내를 짚어주십니다.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가슴 아픈 진단입니다. 그들은 빛 가운데서 하나님과 함께 있기보다 어둠 속에서 주님과 단절된 삶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기 행위의 악함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그들은 빛을 미워하게 되었고, 아예 빛을 향해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그런 상태가 바로 이미 심판을 받은 상태라는 겁니다. 바로 이런 상황, 즉 '믿지 않음으로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상황'을 실제적으로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예수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겁니다. 18절 말씀 다시 보십시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왜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을까요? 주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 요 3:21
악을 행하는 자가 빛으로 오지 않는 것과 반대로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을 향해 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진리를 따르는 삶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나타내려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그 결과가 행위로 직결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선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에서 '믿는 자'라는 표현을 여러 번 언급하십니다.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요 3: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요 3:16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 요 3:18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 민 21:5
만성적인 그들의 원망은 점점 도를 더해 어느덧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에 대한 불신앙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서 죽게 하시지도 않았고, 광야를 걷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는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만나를 향해 '우리 마음이 싫어한다'고 말합니다. 결국 문제는 마음이었습니다. 마음이 돌아서니까 광야가 그렇게 싫었고, 마음이 돌아서니까 만나도 그렇게 싫었습니다. 결국 도를 넘은 그들의 불평과 원망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불뱀들을 보내 백성을 물게 하셨고, 많은 사람이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민 21:6) 다행인 것은 늦게나마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이 무얼 잘못했는지를 알았다는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에게 자신들의 죄를 정확하게 고백했고,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하십니다.(민 21:7-9)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마다 치유를 경험하게 해 주십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 보고 싶은 곳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라 하신 곳을 바라보는 것,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건, 작은 시선의 차이로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요 3:14, 15
장대 끝의 놋뱀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렸듯이 십자가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과 시선은 어디를 향해야 하겠습니까? 여전히 내 세속의 환경과 조건에 마음상해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현재의 은총을 하찮다 여기며, 원망에 삼키어진 삶을 살아갈 것입니까? 아니면 시선을 들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보며, 그분의 침묵에 배어있는 깊은 사랑을 감사하며 감사가 배어나는 삶을 살 것입니까?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 엡 2:10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된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우치무라 간조'의 믿음을 보았습니다. 그는 '신 뒤에 숨지 않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철저하게 성서 위에 서있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철저하게 속죄 위에 서있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철저하게 십자가 위에 서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의를 포기하고 하나님 사랑을 의지했고, 하나님께 매임으로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만 매인 자유인이었기에 세상의 불의에 항거할 수 있었습니다. 4세기 중엽 안디옥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당시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를 지낸 '성(聖) 요한 크리소스톰'은 사치가 극에 달한 도시에서 살면서도 그의 삶은 오히려 금욕적이었습니다. 그는 좋은 음식을 찾지 않았고, 화려한 옷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자주 기도하고 명상에 잠기고 성경을 읽었으며, 자기 것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의 것은 맨몸에 걸친 간단한 옷 한 벌뿐이었습니다. 당시 그의 몸은 야위어서 뼈만 남았지만 온 도시는 그의 말에 떨었고 황제도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존경을 받았지만 그런 것들을 오히려 초개처럼 여겼습니다. 그는 물질의 추구로 인하여 영혼의 눈이 진리를 떠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영혼의 부요함이었습니다. 참 믿음은 우리를 그렇게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이 보라하시는 곳을 바라보는 성도는 그러한 영혼의 부요함 속에서 살 것입니다. 사순절은 그런 믿음의 삶을 훈련하는 기간입니다. 사순절 기간의 경건과 절제의 훈련이 우리 믿음의 삶 전체를 깨어있게 하고, 그런 믿음의 자유인으로써 심판이 아닌 날마다 행복인 삶을 살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실천|Praxio
1. 시선을 땅에 두고 불평과 원망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2.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 시선을 맞추고 살아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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