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사순절 제3주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3-04 12:59
조회
1348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출 20:1-3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 와니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응송 | 시 19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서신 | 고전 1:18, 22-25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 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 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 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 보다 강하니라
복음 | 요 2:13-17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출 20:3을 묵상하십시오. '나 외에는'과 '내 앞에서'는 어떤 메시지의 차이로 마음에 다가옵니까?
② 요 2:14-16을 묵상하십시오. 성전에서 장사하거나 돈 바꾸는 사람 들의 내심에는 성전이 어떤 곳으로 여겨지고 있습니까?
③ 고전 1:22, 23을 묵상하십시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과 다르고, 지 혜를 구하는 헬라인과도 다른 바울의 관심은 오직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호 2:16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바알'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남편이라 하지 않고 바알이라고 불렀다는 건, 그들이 하나님을 조건 없이 사랑한 것이 아니라 바알이 주는 떡과 물과 양털과 삼과 기름과 술을 하나님에게서 기대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하나님의 은총이 그들 눈에 보이지 않자 그들은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호 2:5a) 라며 바알에게로 가버리고 맙니다. 그들이 바알에게 간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호 2:5b) 그러나 그들은 바알에게 가는 길을 찾지 못합니다. 바알을 따라가려 했지만 찾지도 만나지도 못합니다. 그제야 그들은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호 2:6) 하면서 하나님과 바알 사이를 숱하게 방황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얼굴 (앞)과 (위)에' 다른 신을 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조건 없이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소유와 탐욕의 하나님으로 대체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과의 순결한 관계를 온통 더럽히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우리의 탐욕을 채워줄 것을 요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순결한 관계를 더럽히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가 명백한데도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끈질기게 하나님보다 우상에게 더 마음을 주었을까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방식은 영적이고 언어적이었지만, 우상의 존재방식은 육적이고 가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정통 기독교에 속해 있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러나 여전히 영으로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애를 쓰지 않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자꾸 물질의 세계로 끌고 나오려고 애를 쓴다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 혹은 '위에' 다른 신 즉 '우상'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기대와 예상을 뛰어넘어 존재하시는, 그래서 은폐의 방식으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보며 따르는 태도인 것입니다. 반면에 우상을 따르는 길은 그런 은폐의 방식을 견디지 못하고 당장 성과가 나타나는 것을 바란다는 측면에서 천박하고 불신앙적인 태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 예배가 우상숭배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분석에 우리는 마음이 쓰여야 합니다. 외형적으로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 내면은 구약의 유대인들처럼 우상을 섬기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 증거는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의 예배가 인간의 만족에 초점을 맞춘 것에 있습니다. 영성신학자인 '마르바 던(Marva J. Dawn)'은 자신의 책 '고귀한 시간 낭비'에서 이런 현상을 패스트푸드 '버거킹'에 비교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예배가 버거킹과 같다면, '고귀한 시간 낭비'로서의 깊은 묵상이나, 경외심에 찬 침묵, 교리에 대한 숙고, 음악적 깊이, 많은 성경 구절 암송, 참 하나님과의 탄탄한 친밀함, 교회의 연속성, 진정한 공동체, 진실된 회개, 슬픈 탄식, 십자가를 지는 훈련, 시간을 초월한 진리, 거룩의 아름다움, 신실한 선과 같은 것을 어떻게 가르치겠는가?" 라고 묻습니다. 그가 재미있게 표현한 '버거킹' 식의 예배는 오늘날의 예배를 날카롭게 풍자합니다. 그는 요즘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사람을 섬기는 것으로 전락했다고 진단합니다. 사람이 예배를 통해 예수를 따라가야 하는데, 예배가 예수를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성전에서 부당한 이득을 챙기며 장사하는 사람들을 채찍으로 내려치시면서 역정을 내십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나의 예배와 기도는 우상숭배로 채워지고 있지 않은가?
② 예배와 기도로서 먼저 하나님의 뜻에 순명하고 있는가?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출 20:1-3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 와니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응송 | 시 19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서신 | 고전 1:18, 22-25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 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 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 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 보다 강하니라
복음 | 요 2:13-17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출 20:3을 묵상하십시오. '나 외에는'과 '내 앞에서'는 어떤 메시지의 차이로 마음에 다가옵니까?
② 요 2:14-16을 묵상하십시오. 성전에서 장사하거나 돈 바꾸는 사람 들의 내심에는 성전이 어떤 곳으로 여겨지고 있습니까?
③ 고전 1:22, 23을 묵상하십시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과 다르고, 지 혜를 구하는 헬라인과도 다른 바울의 관심은 오직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은 각각의 '처해있는 자리'에 따른 성경해석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먼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고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십계명의 제 1계명인데, 다른 신들을 배척하는 유일신앙의 출발점으로 잘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이 계명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계명이 어떤 자리에서 주어진 명령인지를 따져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이 말씀은 번역본에 따라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개역개정성경에서 '나 외에는'이라고 번역한 부분을 표준새번역이나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내 앞에서'라고 번역을 해놓았습니다. 벌게이트역(Vulgate) 역시 이 말씀을 '코람 데오(Coram Deo)' 즉 '내 앞에서'로 번역을 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요? 그리고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요? 그런데 이 차이는 중요합니다. 이 말씀을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읽으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는 타 종교에 대한 배척 문제가 제기됩니다. 그러나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읽으면, 타 종교에 대한 배척보다 '여호와 앞에서'의 내 신앙에 대한 성찰에 무게가 더 실립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읽느냐' 또 '어느 자리에서 읽느냐'에 따라 이 성경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며, 누구를 향해 선포되는 말씀인가 하는 향방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주목해봐야 할 것이 있는데, 성경이 번역된 과정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원문을 표본으로 번역한 게 아닙니다. '칠십인역 구약성경'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칠십인역 구약성경이란, 기원전 1세기경에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굳이 그리스어로 번역한 이유는 당시 중심 언어가 그리스어였기 때문입니다. 포로 시기부터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 2-3세대들은 어느덧 아람어가 아닌 그리스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구약성경을 읽게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어 번역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가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 그들은 말씀을 바꿔서 번역해야 했을까요? 그것을 알려면 이들이 처해 있던 '삶의 자리'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 2-3 세대들을 비롯해서 전 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은 여러 다른 종교가 있는 환경 속에 살아야 했고, 그 다른 종교가 있는 환경 속에서 여호와 신앙을 지켜내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 첫 계명을 무엇보다 다른 여러 종교, 다른 여러 신을 섬기지 말라는 명령으로 읽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 말씀의 본래적 의미를 살려서 읽어보려고 합니다.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 출 20:3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이 말씀의 히브리어 뜻은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인데, '다른 종교의 배척'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신앙을 지켜내는 것'에 방점이 있습니다. 문자적인 의미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히브리어 '알 파나야(ינפֿֿֿֿ ֿ־לע)'는 '내 앞에서' 뿐 아니라 '내 얼굴 (앞)을 넘어서' 혹은 '내 얼굴 (앞) 위에'라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내 얼굴 (앞)을 넘어서' 혹은 '내 얼굴 (앞) 위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정작 하나님 앞에서 다른 신을 사랑한다면 그게 말이 되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얼굴 위에 다른 신을 모신다면 그게 말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정작 하나님 앞에서 돈을 더 사랑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얼굴보다 지혜나 쾌락을 더 위에 두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겉으로는 십계명을 지키고, 율법을 이마에 붙이고 다니면서 정작 내심으로는 바알을 숭배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에 외적으로는 절대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다른 신을 섬기는 건 차라리 정직한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하루 종일 우리의 관심사는 어디를 맴돌고 있는 것일까요? 하루 종일 우리의 목마름은 어디에 머물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십계명에서 제 1계명의 방점이 일차적으로 다른 신들에 대한 배척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에 대한 반성과 경고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얼굴은 줄곧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지만, 내심으로는 바알이 주는 풍요와 쾌락에 더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서 선지자들이 내내 호소했던 말씀들이 그것입니다.호 2:16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바알'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남편이라 하지 않고 바알이라고 불렀다는 건, 그들이 하나님을 조건 없이 사랑한 것이 아니라 바알이 주는 떡과 물과 양털과 삼과 기름과 술을 하나님에게서 기대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하나님의 은총이 그들 눈에 보이지 않자 그들은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호 2:5a) 라며 바알에게로 가버리고 맙니다. 그들이 바알에게 간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호 2:5b) 그러나 그들은 바알에게 가는 길을 찾지 못합니다. 바알을 따라가려 했지만 찾지도 만나지도 못합니다. 그제야 그들은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호 2:6) 하면서 하나님과 바알 사이를 숱하게 방황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얼굴 (앞)과 (위)에' 다른 신을 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조건 없이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소유와 탐욕의 하나님으로 대체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과의 순결한 관계를 온통 더럽히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우리의 탐욕을 채워줄 것을 요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순결한 관계를 더럽히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가 명백한데도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끈질기게 하나님보다 우상에게 더 마음을 주었을까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방식은 영적이고 언어적이었지만, 우상의 존재방식은 육적이고 가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정통 기독교에 속해 있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러나 여전히 영으로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애를 쓰지 않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자꾸 물질의 세계로 끌고 나오려고 애를 쓴다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 혹은 '위에' 다른 신 즉 '우상'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기대와 예상을 뛰어넘어 존재하시는, 그래서 은폐의 방식으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보며 따르는 태도인 것입니다. 반면에 우상을 따르는 길은 그런 은폐의 방식을 견디지 못하고 당장 성과가 나타나는 것을 바란다는 측면에서 천박하고 불신앙적인 태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 예배가 우상숭배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분석에 우리는 마음이 쓰여야 합니다. 외형적으로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 내면은 구약의 유대인들처럼 우상을 섬기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 증거는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의 예배가 인간의 만족에 초점을 맞춘 것에 있습니다. 영성신학자인 '마르바 던(Marva J. Dawn)'은 자신의 책 '고귀한 시간 낭비'에서 이런 현상을 패스트푸드 '버거킹'에 비교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예배가 버거킹과 같다면, '고귀한 시간 낭비'로서의 깊은 묵상이나, 경외심에 찬 침묵, 교리에 대한 숙고, 음악적 깊이, 많은 성경 구절 암송, 참 하나님과의 탄탄한 친밀함, 교회의 연속성, 진정한 공동체, 진실된 회개, 슬픈 탄식, 십자가를 지는 훈련, 시간을 초월한 진리, 거룩의 아름다움, 신실한 선과 같은 것을 어떻게 가르치겠는가?" 라고 묻습니다. 그가 재미있게 표현한 '버거킹' 식의 예배는 오늘날의 예배를 날카롭게 풍자합니다. 그는 요즘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사람을 섬기는 것으로 전락했다고 진단합니다. 사람이 예배를 통해 예수를 따라가야 하는데, 예배가 예수를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성전에서 부당한 이득을 챙기며 장사하는 사람들을 채찍으로 내려치시면서 역정을 내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 요 2:16
그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향해 기도가 드려지고, 예배가 드려지는 하나님의 전을 통해 자신들의 우상숭배적 욕망을 채워가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이윤 추구에 눈이 멀어 있었고, 이윤을 매개로 기득권의 자리에 앉아버렸기 때문에, 그 부패성과 완악함에 있어서 온건한 설득으로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습니다. 시대가 변해도 우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의 본성은 좀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고전 1:18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멸망의 자리에 서서 바라보는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의 자리에 서서 바라보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겁니다. 바울 당시에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의 냉철함으로 보았을 때,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의 우아함으로 보았을 때, 십자가처럼 미련한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눈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미련한 방법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했습니다.(고전 1:25)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대로 예배하고, 사람의 탐욕에 점령당한 기도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표적과 지혜 뒤에 음흉하게 숨겨진 속물적인 우상숭배를 경고하며, 표적에도 지혜에도 마음 빼앗기지 말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전1:22, 23)고 엄하게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 바울 자신도 어떤 이해관계나 편견 없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응송에서 시인은 노래합니다.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 시 19:14
공동번역으로는 "내 생각과 내 말이 언제나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입니다. 마음에 살그머니 깃든 우상의 유혹을 단호히 거절할 때, 내 생각과 말은 비로소 하나님 마음에 들 수 있습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나의 예배와 기도는 우상숭배로 채워지고 있지 않은가?
② 예배와 기도로서 먼저 하나님의 뜻에 순명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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