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주현절 후 마지막 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왕하 2:8-9
8 엘리야가 겉옷을 가지고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마른 땅 위로 건너더라 9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응송 | 시 50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 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서신 | 고후 4:3-6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 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복음 | 막 9:2-8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 뿐이었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9:7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께 임한 빛의 의미를 모른 채 두려 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② 왕하 2:9을 묵상하십시오.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의 능력이나 지혜나 명성이 아닌 무엇을 요구했습니까?
③ 고후 4:6을 묵상하십시오. 우리의 내면으로 비쳐 와, 우리를 새롭게 할 빛은 어떠한 빛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알렉산드리아의 대표적인 신학자였던 오리게네스(Origene)는 빛의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인간 존재가 처음에 하나님과 원초적이고 사랑스러운 상태에 놓여 있었고, 그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닮은 존재였다가, 불행하게도 죄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닮음을 상실한 것에 주목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의 참된 목적은 인간의 근원적 모습인 '하나님 닮음'을 회복하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것인데, 오리게네스는 이러한 회복을 향한 여정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시작된 회심과, 그들이 광야에서 치열한 영적 투쟁을 거쳐 마침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이렇게 '하나님 닮음'을 회복해 가는 과정,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되돌아가는 여정은 점점 더 크고 강한 빛을 향해 나아가는 영적 노력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는 이 노력을 '긍정의 길(The Kataphatic Way)'이라고 말했고, 훗날 그에게 영향을 받은 '에바그리우스(Evagrius)'는 이 '긍정의 길'을 더 정교하고 체계적으로 다듬었습니다. 에바그리우스는 빛을 향해 나아가는 영적 여정을 세 단계로 제시했습니다. 그는 먼저 신앙생활의 첫째 목표를 아파테이아를 얻는 것에 두었습니다. '아파테이아(apatheia)'란 당시 스토아학파의 용어로서, 어떠한 욕망에도 휘둘리지 않는 평정의 상태를 뜻합니다. 에바그리우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이란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선 사람이고, 철저한 영적생활을 통해 내 삶의 중심에서 멀어진 하나님을 다시 내 삶의 중심에 모신 사람이고, 어떠한 욕망에도 휘둘리지 않고 평정의 상태를 이룬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부터 신앙생활의 둘째 목표와 셋째 목표가 시작되는데, 그것이 바로 '관상(Contemplatio)'입니다. '관상(觀想)'이란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에바그리우스에게 있어 관상생활이란, 처음에는 자연에 대한 관상에서 시작하지만 마침내는 하나님께 대한 관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관상이 신앙생활의 둘째 목표이고, 하나님께 대한 관상이 신앙생활의 셋째 목표입니다.에바그리우스는 자연에 대한 관상을 두 단계로 구분했습니다. 첫째는 관상의 낮은 차원으로서, 감각으로 인지되는 자연의 원리나 목적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상은 우리 마음을 더욱 넓게 만들어줍니다. 둘째는 관상의 보다 높은 차원으로 우리 감각들로 파악되지 않는 영적 존재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상은 우리 정신을 고양시키고 결국 하나님께로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결론적으로 자연에 대한 관상을 통해 사람들은 자연 전체를 '하나님의 손길이 깃든 책'으로 보게 되고, 모든 피조물 안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는 자연을 제2의 성경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했습니다. 에바그리우스가 말하는 신앙생활의 셋째 목표는 '하나님께 대한 관상'입니다. 여기서는 자연 즉 피조물이라는 매개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안에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직접 주님을 뵙게 됩니다. 이 단계에 있는 성도는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에 정신이 모든 인간적인 감각에서 해방되고, 자유로운 영혼을 얻게 됩니다. 에바그리우스는 '기도론'에서 이 상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신자는 모든 이로부터 분리된 사람이지만, 동시에 모두와 일치를 이루고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이루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분리해 낸 사람은 하나님과 일치를 이룬 상태가 되었을 때, 동시에 사람들과도 참된 일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읽으면서 새삼 에바그리우스의 영적 깨달음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 막 9: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시는데, 마가가 그 시점을 '엿새 후' 라고 밝히는 것에는 깊은 신학적인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서 마가가 말하는 '엿새'는 바로 앞 장에서의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고 난 엿새 후'를 말하는 겁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 8:29) 라는 베드로의 고백이 있고 난 직후 예수님께서, 장차 당신께서 당하실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가 베드로의 거센 반발(막 8:31, 32)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때의 베드로의 반발은 그 동안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색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머리에 차곡차곡 쌓아놓기만 한 지식들이 하나님의 뜻을 통보 받던 그 순간에 얼마나 무능한 것인지가 드러나는데, 바로 그 일이 있고 난 엿새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산 위에서 베드로와 다른 두 제자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 막 9:2b-3
마가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변형되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 마가가 사용한 변형이라는 단어는 '메타모르포데(metamorphothe)' 즉 수동형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의 힘으로 변형되신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현존 앞에 있었을 뿐인데,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예수님을 지상적 형태에서 천상적 형태로 변형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당신이 가장 사랑하시는 세 제자 앞에서 천상적 존재의 모습으로 변하셨습니다. 훗날 바울은 예수님의 이 변형에 대해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렀다"(고후 3:18)고 했고,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고후 4:6)고 감격스러워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황홀하고 감격스러운 경험은 예수님의 변형과 광채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 막 9:4
이들이 어떤 인물입니까? 모세는 구약 율법의 상징이자 메시아의 원형(신 18:15)으로 이미 시내산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체험한바(출 31:18) 있는 이스라엘의 최고 인물입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구약의 예언자의 대표자이고, 메시아의 선구자로 예언되었던 인물(말 4:4, 5)이고, 호렙산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체험한 바 있습니다.(왕상 19:8) 유다의 민중 전승에 의하면 모세와 엘리야의 공통점은 모두 주검을 남기고 않고 하늘로 올리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인물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나눈 대화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눅 9:31에 의하면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대화는 무척 중요한 대화였습니다. 오랫동안 이스라엘이 대망해 오던 메시아가 마침내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바로 이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고, 지금껏 율법과 예언으로만 말해지던 것들이 마침내 복음으로 완성되는 찰나였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찰나에 베드로의 반응이 엉뚱합니다.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 막 9:5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베드로가 아직 자기 안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었습니다. 그러나 따라 나선 것만으로 그의 내면이 완전하게 성화를 이룬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이기적인 자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그의 내면은 세속의 욕망으로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빛 가운데로 베드로를 초청하고 게시지만, 그러나 지금 그의 눈에 비친 예수님 옷의 광채는 그가 들어가야 할 복음의 빛으로 여겨지기보다는, 현실의 버거움을 피해 도피하고 싶은 도시의 조명으로 비치고 만 것입니다. 어찌 이게 베드로만의 모습이겠습니까? 베드로처럼 이기적인 마음의 지배를 받는 삶이 곧 제 모습이고 여러분 모습이지 않겠습니까? 어떤 이는 이것을 '정신적 망명'이라고 했습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네 생각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빛이 비추어 와도 깨닫지 못하고 내 영혼은 여전히 산 아래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에바그리우스가 제시한 빛을 향해 나아가는 영적여정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선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내 존재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떠한 욕망에도 휘둘리지 않고 내면이 평화로운 '아파테이아'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공중의 새를 보며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들꽃을 보며 하나님의 '입히시는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안에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주님을 뵐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룰 때, 우리 정신은 인간적인 감각에서 해방되고, 자유로운 영혼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런 사람입니다. "모든 이로부터 분리된 사람이지만, 동시에 모두와 일치를 이룬 사람"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이루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분리해 냈지만, 하나님과 깊은 일치를 이룬 후에는, 모든 사람과 참된 일치를 이룬 사람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구약의 말씀에서 변화를 열망하는 한 사람을 봅니다.여호와께서 회오리 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지라 | 왕하 2:1, 2
이 말씀은 오늘 복음서에 등장하는 엘리야가 승천할 때, 그와 엘리사의 사이에 일어났던, 대화의 한 장면입니다. 엘리야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된 것을 알고 제자인 엘리사를 떼어놓으려 하는데, 엘리사는 스승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모진 애를 쓰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길갈에서 '너는 여기 머물라' 해도 엘리사는 기를 쓰고 떨어지지 않겠다 하고, 엘리야가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신다' 하면 엘리사는 기를 쓰고 여리고까지 따라가고, 엘리야가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신다' 하면 엘리사는 끝내 요단까지 스승과 함께 갑니다. 왜 이렇게 엘리사가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습니까? 스승과의 거룩한 대화를 통해 좀 더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고, 한편으로는 스승의 승천에 대해 확실히 알고 또 목격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왕하 2:3, 5) 끝내 제자를 뿌리치지 못하고 요단강을 건넌 엘리야는 마지막으로 엘리사에게 묻습니다.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 왕하 2:9a
그때 엘리사가 스승에게 하는 말이 감동적입니다.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 왕하 2:9b
그는 엘리야의 수중에 있는 그 어떤 지식도 능력도 명성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령을 구했습니다. 더욱이 그의 말을 자세히 보십시오. "성령을 주옵소서" 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왕하 2:9b) 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선지자로서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 그에게 절실한 것은 요단강을 마른 땅같이 걸을 수 있는 능력도, 스승과 함께 승천하는 능력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령께서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자기에게 있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것만이 자신이 선지자의 사역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을 그가 마침내 깨달았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보아야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의 옷이 광채가 나고 매우 희어진 현상에만 황홀해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정작 그들이 봐야 했던 것은 그 황홀한 광채가 어디에서 비쳐온 것이며. 그 광채가 예수님의 옷에서 빛나게 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예수님만이 바로 그 광채 속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장차 당신이 당하실 죽음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습니다.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 왕하 2:7
우리는 이 장면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시던 장면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임했듯이 지금도 하늘로부터 소리가 임합니다. 그런데 그 때는 예수님을 향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라고만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향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까?그는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분의 말씀이 곧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신 말씀 속에는 '그의 말에 복종하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제자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베드로는 다시 제자 됨의 자리로 초청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글자 안에 가두어 두고 한낱 지식이나 정보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책을 읽는 우리의 습관이 그렇게 몰고 갑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서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소리' 즉 '말씀'으로 다가오셔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오셔서 하신 말씀을 깊이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교회에서 시행하는 '렉시오 디비나'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또 '깊이' 만나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렉시오 디비나는 기도이고,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이며, 하나님과 나와의 대화입니다. 우리가 훌륭한 분을 만날 때, 그 분 말씀을 귀 담아 듣는 것이 마땅한 도리인 것처럼, 하물며 하나님과 만날 때 더욱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들이 당신을 죽이려는 것에 대해 한 마디로 정리하셨습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요 8:37)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 고후 4:3, 4
예수님의 옷과 얼굴에서 광채가 난 것은 그 분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여전히 우리 마음이 혼미하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말씀이 있을 곳이 없어 복음이 가려지고 말았거나, 이 세상 신이 우리 마음을 혼미하게 해서 그리스도의 빛이 내 안에 비쳐들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씀합니다.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 고후 4:6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빛을 비추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 빛을 향해 돌아선 사람이고, 이 빛을 받아들여 빛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하나님을 친밀하게 바라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번 주부터 사순절기가 시작됩니다. 부디 이번 사순절의 여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빛나던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여러분의 마음에서도 환하고 따뜻하게 빛나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말씀이 내 안에 있을 곳이 없어 어둠의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② 우리에게 오신 말씀을 경청하며 나의 내면이 밝아오고 있는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41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6주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
KOR | 2024.11.17 |
41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5주 나를 넘어 하나님께로
|
KOR | 2024.11.10 |
410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4주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
KOR | 2024.11.02 |
409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3주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
KOR | 2024.10.26 |
408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2주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
KOR | 2024.10.19 |
407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1주 하나님만이 오직 최선이시다
|
KOR | 2024.10.12 |
406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0주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KOR | 2024.10.05 |
405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8주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
|
KOR | 2024.09.21 |
404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7주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
KOR | 2024.09.14 |
403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
KOR | 2024.09.07 |
40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
KOR | 2024.09.01 |
40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
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