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주현절 후 제2주 나는 '성령의 전(殿)'입니다
■ 읽 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 약 | 삼상 3:1-9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 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6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 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8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 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 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응송 | 시 139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서신 | 고전 6:19, 20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복음 | 요 1:45-51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 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 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 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 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 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 묵 상 | meditatio
① 삼상 3:1-3을 묵상하십시오. 당시의 영적 상황을 알 수 있는 표현 을 세 가지만 찾아 자신의 영적 상태와 비교해 보십시오.
② 요 1:50-51을 묵상하십시오.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무화과나무 아래 서 보신 것보다 더 큰 일은 무엇입니까?
③ 고전 6:19을 묵상하십시오. 사도 바울에 따르면 우리의 몸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나는 '성령의 전(殿)'입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그가 1848년 3월27일에 신학자 '해리슨 블레이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 소개됩니다. 거기 보면 소로우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삶과 내면이 일치한다고 믿습니다. 바깥으로 보이는 부분은 안의 것들이 드러난 결과입니다. 습관은 사람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나게 합니다." 그러니까 소로우의 편지에 따르면, 오늘 우리의 겉으로 드러나 있는 모든 모습은 '나의 내면의 것들이 밖으로 드러난 결과'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사실 사람의 내면은 숨겨지지 않습니다. 그의 표정을 통해 드러나든지, 그의 습관을 통해 드러나든지, 그의 삶의 궤적을 통해 드러납니다. 오늘 성서일과를 묵상하면서 소로우의 말이 새삼 공감이 되었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에서 보이는 엘리 제사장과 어린 사무엘의 일상의 모습들이 사실은 그들 내면이 밖으로 드러난 결과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첫 만남이 그려지는데, 주님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던 나다나엘의 모습을 떠올리며 "너의 내면엔 간사함이 없다"고 칭찬해 주십니다. 서신서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성령의 전(殿)'으로서 살아갈 것을 권고합니다. 성령의 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성령을 내면에 모시고 산다는 것이겠습니다. 먼저 구약성경을 보겠습니다.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 삼상 3:1
오늘 구약의 말씀은 사사시대로부터 왕정시대로 옮아가던 전환기의 영적 상황을 담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모든 분야에서 큰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특히 신앙적인 정체성을 지켜내야 할 영적인 지도력의 부재가 가장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당시의 영적 상황을 가늠하게 해 주는 한 마디가 1절에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여기에서 '여호와의 말씀'이란, 히브리어 '다바르(dabar)'인데 '귀에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이상(理想)'은 히브리어 '카존(chazon)'으로,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계시'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다"는 건,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기를 포기하고 침묵하셨다는 의미이고,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을 향해 당신의 뜻을 계시하시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말씀을 하셔도 그 말씀을 귀담아 들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고, 당신의 뜻을 눈에 보여주셔도,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 일을 하던 사람들은 제사장이나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일과를 감당하는 사람들이 없었거나 혹은 있어도 영적 게으름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이스라엘을 휘감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 시대에 제사장이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엘리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영적 게으름에 빠져서 매일같이 잠만 자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와 더는 말씀을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구약의 말씀은 그러한 영적 어둠에도 불구하고 한 가닥 희망의 불씨가 남아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 삼상 3:3
다행히 사무엘이라는 소년이 거기 있었습니다. 미루어 짐작해볼 때, 엘리 제사장이 등불 살피는 일을 어린 사무엘에게 떠맡기고 자기는 처소에서 잠들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린 사무엘은 지성소 가까운 곳에서 늦도록 책을 읽고 있었거나, 기도를 했거나 아니면 다음 날 제사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년에게서 그나마 동시대에 남아있는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희망도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등불이 우리 내면에서 꺼지지 않고, 우리 존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있을 때, 바로 거기에서 희망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 삼상 3:4, 5
어린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은 하나님께서 말씀이 희귀하여 소망이 없던 이스라엘에 새로운 소망을 태동시키시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세 번이나 거듭해서 부르시는데, 사무엘과 엘리가 똑같이 깨닫지 못하는 장면이 안타깝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깨닫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 삼상 3:7
결국 문제는 엘리였습니다.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것도, 여호와의 말씀이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것도, 책임은 모두 당시 제사장이던 엘리에게 있었습니다. 지금 이 장면을 봐도 그렇습니다. 사무엘은 그의 내면이 잘 정돈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부르실 때 예민하게 듣고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눈도 내면도 어두워진 엘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무엘을 부르고 계십니까? 엘리 제사장과 그의 아들들의 죄로 인해 그 가문을 심판하시겠다는 경고를 어린 사무엘에게 하시려는 겁니다. 왜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이 들어야 할 경고를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시는 걸까요? 하나님과 엘리 제사장 사이에 대화가 사라지고, 하나님께선 이미 대화 상대를 옮기신 것입니다. 세 번 같은 부르심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엘리 제사장이 깨닫습니다. 그가 어린 사무엘을 불러 말합니다.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 삼상 3:9
나이 들어 육체가 노쇠 하는 것, 그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마저 쇠해지지 않도록 우리는 영혼을 잘 돌봐야 합니다. 어린 사무엘의 입을 빌어 심판의 말씀을 들었을 때, 노(老) 제사장의 마음이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현상은 여전히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 말씀이 들려오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말씀이 희귀하기만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이상이 눈에 보이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 이상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게 영성입니다. 그런 영성이 없을 때, 우리는 박제화 된 종교인 즉 습관적이거나 교리적인 종교인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이상을 볼 수 있을까요? 그 대답과 관련해서 오늘 복음서에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사람이 등장합니다.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입니다.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 1:45-48
먼저 빌립과 나다나엘의 대화가 나오고, 이어서 나다나엘과 예수님의 대화가 이어지는데, 언뜻 듣기에 이 대화들은 무슨 선문답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사실 요한복음에는 이런 선문답이 많습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나,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도 사실은 다 선문답 같은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이 선문답 같은 대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려 일곱 번이나 '본다'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처음에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했을 때, 나다나엘은 매우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그때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요 1:46)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하고 묻자 주님은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8)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보았노라' 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에이든(εἶδόν)'입니다. 단순히 예지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주의 깊게 주목하고 있었다'는 의지적인 측면도 포함하는 용어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자기를 딱 한 번 보셨을 뿐인데, 자기 내면에 끌어안은 영적 갈망을 보아내신 예수님께 나다나엘은 매우 놀라서 이렇게 말합니다.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 요 1:49
하나님이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자기의 내면을 꿰뚫어본 예수님을 향해 나다나엘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나다나엘이 누군지는 성경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이 제자들이 소명을 받던 당시의 말씀임을 전제한다면,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안드레와 베드로와 빌립은 열두 제자에 속하지만 나다나엘은 그렇지 못합니다. 나다나엘을 공관복음에 나오는 바돌로매(마 10:3)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정확한 건 아닙니다. 그는 오직 요한복음에만 등장합니다. 그것도 딱 두 번, 오늘 복음서의 말씀과 부활하신 주님이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신 요 21:2에서입니다. 그러니까 나다나엘은 예수님 공생애의 시작과 끝에 등장한 것입니다. 비록 비중은 크지 않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구원 사건에서 그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현장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나다나엘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에 간사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알았습니다. 빌립이 "와서 보라"고 했을 때, 나다나엘은 정말 정확한 시각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나다나엘과 같은 입장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일을 성경을 통해 '보도록' 초청받은 사람들입니다. 지난 주 성경을 통해 우리가 본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세례 받으시는 장면을 보았고, 주님을 위해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고, 주님께 성령이 임재하시는 것을 보았고, 또 우리는 성경을 통해 주님께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막 1:9-11) 우리는 성경을 통해 주님이 병자를 고쳐주시는 것을 보았고, 주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을 보았고, 주님이 간음한 여인의 죄를 묻지 않으시는 것을 보았고, 주님께서 수난과 죽임을 당하시는 것을 보았고, 우리는 성경에서 빈 무덤과 부활하신 주님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어떻게 보았냐는 것입니다. 어떤 시선으로 주님을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메시아로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눅 4:18, 19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나다나엘이 본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무화과나무 아래서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깨달았고, 그 나다나엘을 단 한 번만 보고도 예수님은 그가 참 이스라엘 사람이요, 내면에 간사함이 없는 사람임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봄'이란 이런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아신 것처럼, 나도 주님을 깨닫는 것이고, 주님의 시선과 내 시선이 진실하게 마주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무화과나무에서 메시아를 묵상할 때, 그때 예수님도 자기를 보았었고, 그 단 한 번의 '봄'을 통해 자기 내면의 진실한 갈망을 꿰뚫어 보아준 주님께 나다나엘이 경외감에 가득차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시라고" 고백할 때, 그 때 주님은 그에게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더해주십니다.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 요 1:50, 51
바로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갈망했던 신앙의 차원을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되는' 천상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주십니다. 열리기 이전의 하늘은 물리적 공간에 지나지 않지만, 그 하늘이 열리는 날엔 '영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구름만 보이는 하늘은 물리적 공간이지만, 하나님의 사자들이 보이는 하늘은 영적 공간입니다. 밤하늘에 별만 보이는 하늘은 낭만의 공간이지만, 믿음의 눈을 뜨고 보는 하늘은 생명의 공간입니다. 주님은 지금 나다나엘로 하여금 '그 시선을' 가져야 한다고, 이제는 무화과나무 아래서 막연한 갈망으로 가슴앓이 하는 구도의 차원을 넘어, 천상의 신비를 보고 기쁨을 얻는 영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일찍이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해 가다가 하늘까지 닿은 사닥다리와 그 위로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창 28:10-17)그때 야곱은 하늘이 열린 것을 본 것입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도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새 하늘이 열린 장면을 보았습니다.(막 1:10) 예수님이 오신 것은 하늘이 열린 사건입니다. 성령님이 오신 것도 하늘이 열린 사건입니다. 오늘 여러분을 위해 하늘이 열리기를 축복합니다. 언제 하늘이 열릴까요? 무화과나무 아래를 찾아 말씀을 묵상할 때입니다. 우리 내면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될 때입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고전 6:19, 20
우리의 내면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성령의 불이 우리 안에서 꺼지지 않을 때, 우리를 위해 하늘이 열리고, 우리를 위해 성령이 임하고, 우리를 위해 말씀이 들려옵니다. 아직 하나님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보이지 않거나, 눈이 어둡듯 우리 내면이 어둡다고 느끼시면, 무화과나무 아래를 찾아 말씀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해 하늘을 여시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여러분에게 임하시며 여러분은 천상의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 관 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 천 | Praxio
①말씀이 희귀하여 이상(異象)이 보이지 않는 상태가 아닌가?
②성령의 전인 우리 안에서 말씀과 이상이 깨달아지고 있는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41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6주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
KOR | 2024.11.17 |
41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5주 나를 넘어 하나님께로
|
KOR | 2024.11.10 |
410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4주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
KOR | 2024.11.02 |
409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3주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
KOR | 2024.10.26 |
408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2주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
KOR | 2024.10.19 |
407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1주 하나님만이 오직 최선이시다
|
KOR | 2024.10.12 |
406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0주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KOR | 2024.10.05 |
405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8주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
|
KOR | 2024.09.21 |
404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7주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
KOR | 2024.09.14 |
403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
KOR | 2024.09.07 |
40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
KOR | 2024.09.01 |
40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
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