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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 후 제5주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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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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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08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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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 후 제5주 (가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사 58:1-12
1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2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 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3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 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 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 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 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 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 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 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12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 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 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응송 | 시 112
1 할렐루야. 복되어라, 주님을 경외 | 하-며
○ 그의 계명을 좋아 | 하는 사 - 람,
2 그의 자손은 세상의 영도자가 | 되 - 고
○ 정직한 후예의 축복을 | 받으리 - 라.
3 그의 집에는 부귀영화가 깃 | 들이고
○ 그의 의로운 행실은 영원히 | 기억되리라.
4 그는 어질고 자비롭고 올바른 사람 | 이 - 라
○ 어둠 속의 빛처럼, 정직한 사 | 람을 비춘다.
5 인정이 많고 동정어려 남에게 꾸어 | 주 - 며,
○ 모든 일을 양심으로 | 처리한 - 다.
6 그 사람은 흔들리지 | 않겠고
○ 영원히 의로운 사람으로 | 기억되리라.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서신 | 고전 2:1-12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 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 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 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 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 | 마 5:13-20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 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 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 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마 5:13-14을 묵상하십시오.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정체를 소금과 빛이라 하시는데 ‘어디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까?
② 사 58:6-8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어떤 것 이며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③ 고전 2:4, 5을 묵상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말씀과 전도의 힘을 어디 로부터 공급을 받았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이 고백은 우리를 창 2:7절로 이끌어 갑니다. 창세기 저자의 증언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다음 ‘생기(生氣)’ 즉 당신의 ‘숨(네페쉬)’을 그 코에 ‘불어넣으심(와이파흐)’으로서 사람의 숨결이 되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숨결을 받아 숨을 쉼으로서 흙으로 대변되는 육(肉)의 한계를 극복하고 영적(靈的) 존재로 발돋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형상을 상실했습니다. 아담의 타락과 함께 사람은 외적 육체는 입었지만 내적 생명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냥 내버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내적생명을 잃은 인간이 처해질 절대고독에 당신 아들을 대신 던져 넣으심으로서, 그 사랑과 희생을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적생명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 내적생명은 철저하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어서, 그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을 주님은 ‘성령으로 난 사람(born of Spirit)’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born of God)’ 혹은 ‘거듭난 사람(born again)’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수덕(修德)신학’ 혹은 ‘신비(神秘)신학’ 저서들을 보면 ‘영성생활의 도정’은 여러 단계로 구분되어 있는데, 인간이 그리스도인의 ‘완덕(完德)’ 혹은 ‘완전(完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거듭남으로부터 출발해 성화로 이어지는 과정을 충실히 밟아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에서 좀처럼 ‘그리스도의 완전’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을 ‘육에 속한 사람’ 혹은 ‘어린 아이’(고전 3:1)라고 표현하며, “내가 너희를 단단한 음식을 먹일 수 없어 젖을 먹였다”(고전 3:2)라고 안타까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어린 아이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영적 성숙에 접어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고전 2:6).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을 ‘영에 속한 사람’(고전 3:1), 혹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롬 8:5)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당부하십니다.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나 또한 온전함에 이르는 것’ 그것이 바로 영적 성숙에 접어든 신자의 자태이겠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도 산상수훈의 연장선상에서 주어졌는데,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소금과 빛의 삶’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 네 의를 드러내실 분이 네 앞에 가실 것이며, 주님의 영광이 네 뒤에서 호위할 것이다. 그 때에 네가 주님을 부르면 주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가 여기에 있다' 하고 대답하실 것이다. 네가 너의 나라에서 무거운 멍에와 온갖 폭력과 폭언을 없애 버린다면,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 | 사 58:7-11 새번역
사실 이사야 선지자의 이 말씀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다분히 종교 의식으로 금식을 하면서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사 58:3) 하며 생색을 내기에 바빴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금식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시비와 다툼으로 일관하고 약한 자들을 주먹으로 치는 일(사 58:4)이 다반사였습니다. 이사야에 따르면 그런 왜곡된 금식의 관행을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금식은 그런 것이 아니라, 부당하게 묶인 사슬을 풀어주고, 압제받는 사람을 자유롭게 놓아주고, 그들이 진 멍에를 부숴 버리는 것이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옷을 입혀 주는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산다는 건 바로 그런 것이겠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때때로 감동적인 말씀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에게서 병의 사슬을 벗겨주신 후에, 단 한 번도 ‘내가 너를 고쳐주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고쳤다”(마 9:22;막 10:52;눅 18:42 등)고 말씀해주심으로서 그의 믿음을 격려해 주십니다. 주님은 참 신앙의 의미를 그렇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예수님의 그러한 모습에 대해 “예수님께서 그러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 ‘사(私)’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 했습니다. 이아무개 대담․정리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삼인) 196쪽
세상의 소금이요 빛으로서 착한 행실을 실천하려면, 우리에게도 ‘사(私)’ 즉 ‘사사로움’이 없어야 합니다. ‘사(私)가 없다’는 것은 나를 드러내지 않고, 성령께서 하시도록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즉 사사로움을 비우는 것은 의지력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올 때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신학이라면, 이제부터는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말씀을 경청하고 성찬에 참여해야 할까요? 말씀은 성경의 지식을 전하기 위해, 즉 성경의 정보만을 전달하기 위해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목사의 설교는 ‘술(述)’이거나 ‘설(說)’ 즉 ‘잘 설명된 지혜’가 되면 안 되고, 성도를 하나님의 능력 앞에 세우는 통로여야 합니다. 성찬은 더 분명합니다. 성찬은 이해의 대상이 아닙니다. 참여의 사건입니다. 우리는 떡과 잔을 ‘분석’하지 않습니다. 받아서 먹고, 마십니다. 여기에는 ‘논증(論證)’이 아니라 ‘몸의 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바울이 말씀한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이 성찬의 자리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소금으로, 또한 세상의 빛으로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인격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도, 지혜나 지식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착한 행실을 위해 자꾸만 인간적인 노력을 더하려고 하는 것은 내 안의 빛을 잃어버린 결과로 보아야 합니다. 내가 온전히 주님을 향해 서 있고, 주님의 빛이 내 존재를 환하게 밝히고 계시며,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 나를 감싸고 있다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착하게 사는 것은 매일매일 우리 일상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의미는 명료합니다. 한 사람의 멍에를 덜어주는 것, 한 사람의 배고픔을 채우는 것, 한 사람의 수치를 가려주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빛의 삶이고, 이사야가 해석해준 참된 금식이며, 바울이 말씀한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떠나 거룩해지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복판에서 소금으로 빛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Exercitatio
① 나의 경건함이 혼자만의 장소에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② 나의 ‘소금과 빛 된 삶’이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사 58:1-12
1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2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 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3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 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 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 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 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 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 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 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12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 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 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응송 | 시 112
1 할렐루야. 복되어라, 주님을 경외 | 하-며
○ 그의 계명을 좋아 | 하는 사 - 람,
2 그의 자손은 세상의 영도자가 | 되 - 고
○ 정직한 후예의 축복을 | 받으리 - 라.
3 그의 집에는 부귀영화가 깃 | 들이고
○ 그의 의로운 행실은 영원히 | 기억되리라.
4 그는 어질고 자비롭고 올바른 사람 | 이 - 라
○ 어둠 속의 빛처럼, 정직한 사 | 람을 비춘다.
5 인정이 많고 동정어려 남에게 꾸어 | 주 - 며,
○ 모든 일을 양심으로 | 처리한 - 다.
6 그 사람은 흔들리지 | 않겠고
○ 영원히 의로운 사람으로 | 기억되리라.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서신 | 고전 2:1-12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 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 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 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 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 | 마 5:13-20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 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 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 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마 5:13-14을 묵상하십시오.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정체를 소금과 빛이라 하시는데 ‘어디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까?
② 사 58:6-8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어떤 것 이며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③ 고전 2:4, 5을 묵상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말씀과 전도의 힘을 어디 로부터 공급을 받았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
주님은 그리스도인을 ‘교회의 빛’으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세상 복판’에서의 빛으로 소금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빛은 교회 안에서의 내적 경건을 넘어 세상 복판에서의 실천적 삶으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의지로만 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할 속에서 비로소 가능하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일치와 연대 안에 있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가파도기아 교부들은 하나님의 모든 행위를 항상 삼위일체 신앙 안에서 고백해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행위가 삼위일체적이라는 가파도기아 교부들의 신앙과 고백은 당연히 창조행위에서의 성령의 참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저자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라고 했을 때, 교부들의 전통은 이 기록을 성령이 만물을 원초적으로 지탱하고 계시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로고스에 의한 창조질서가 나타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성 대 바실리오스는 이렇게 썼습니다.만물의 원리는 하나요, 그것은 성자를 통하여 창조되고, 성령 안에서 완전케 한다. 존 메이엔도르프/박노양 그레고리우스 「비잔틴 신학, 역사적 변천과 주요 교리」(정교회출판사) 341쪽
바실리오스는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를 완전하게 하는 성령의 역할을 ‘성화(sanctification)’와 동일시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과 자연 전체가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 있고, 성령으로 가득 채워질 때만 완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함축합니다. 교부들은 칠십인역 성경에서 성령과 동일시 된 ‘하나님께서 사람의 코에 불어넣으신 생기(창 2:7)’가 인간을 하나님 형상이 되게 했다고 고백합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그것을 ‘하나님의 숨이 먼지와 섞였다’고 표현했고, 성 요한 크리소스톰 역시 ‘먼지로 창조된 존재가 생명의 숨을 받음으로써하나님의 형상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앤드루 라오스 엮음/하성수 옮김 「교부들의 성경주해, 구약성경 Ⅰ」(분도출판사) 103쪽이 고백은 우리를 창 2:7절로 이끌어 갑니다. 창세기 저자의 증언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다음 ‘생기(生氣)’ 즉 당신의 ‘숨(네페쉬)’을 그 코에 ‘불어넣으심(와이파흐)’으로서 사람의 숨결이 되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숨결을 받아 숨을 쉼으로서 흙으로 대변되는 육(肉)의 한계를 극복하고 영적(靈的) 존재로 발돋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형상을 상실했습니다. 아담의 타락과 함께 사람은 외적 육체는 입었지만 내적 생명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냥 내버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내적생명을 잃은 인간이 처해질 절대고독에 당신 아들을 대신 던져 넣으심으로서, 그 사랑과 희생을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적생명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 내적생명은 철저하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어서, 그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을 주님은 ‘성령으로 난 사람(born of Spirit)’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born of God)’ 혹은 ‘거듭난 사람(born again)’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수덕(修德)신학’ 혹은 ‘신비(神秘)신학’ 저서들을 보면 ‘영성생활의 도정’은 여러 단계로 구분되어 있는데, 인간이 그리스도인의 ‘완덕(完德)’ 혹은 ‘완전(完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거듭남으로부터 출발해 성화로 이어지는 과정을 충실히 밟아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에서 좀처럼 ‘그리스도의 완전’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을 ‘육에 속한 사람’ 혹은 ‘어린 아이’(고전 3:1)라고 표현하며, “내가 너희를 단단한 음식을 먹일 수 없어 젖을 먹였다”(고전 3:2)라고 안타까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어린 아이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영적 성숙에 접어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고전 2:6).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을 ‘영에 속한 사람’(고전 3:1), 혹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롬 8:5)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당부하십니다.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나 또한 온전함에 이르는 것’ 그것이 바로 영적 성숙에 접어든 신자의 자태이겠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도 산상수훈의 연장선상에서 주어졌는데,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소금과 빛의 삶’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마 5:13a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의 이 말씀이 ‘누구’를 향하고 있었는지 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란 다름아닌 어둠과 죽음이 드리운 가버나움 지역에 살던 사람들입니다. 오래 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을 할 때도, 어둡고 그늘진 죽음의 땅(사 9:2)이었던 그곳은, 마태가 복음서를 쓰고 있던 당시에도 여전히 이방인만 거주하는(마 4:15), 그늘진 죽음의 땅(마 4:16)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주님께서 부르시는 ‘너희’는 동시대의 종교 엘리트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어둠의 땅 갈릴리에 살던 사람들, 상처 입고 애통하던 사람들, 이제 막 온유함과 긍휼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곳으로 주님께서 이사야가 예언한 빛으로 들어가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라고 외치셨습니다. 그러자 어둠과 심령의 가난 에 지친 이들이 돌이켜 빛이신 주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현재를 애통해하며, 주님 말씀을 따라 온유함의 사람, 긍휼함의 사람, 청결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으며,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이들을 향해 오늘 복음서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마 5:13)이라고 말씀하시고, 또 “너희는 세상의 빛”(마 5:1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참 뜻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삶을 소금의 속성(屬性)에서 발굴해 내십니다. 소금은 음식에 뿌리면 썩지 않을 뿐 아니라, 감추어진 풍미를 더해주는 효과가 뛰어납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내면이 정화되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복판에서 말씀의 열매를 맺으며 산다면, 세상 또한 말씀에 의해 정화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맛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 마 5:13b
고대세계에서 사용되던 대부분의 소금은 소금물을 증류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늪지 등에서 염분을 추출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염분을 추출한 다음에 남은 불순물은 아무 맛도 쓸모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대개 이 맛을 잃은 불순물은 지붕 위에 뿌려졌는데, 당시 지붕은 운동장이나 집회장소로 쓰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발에 밟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소금이 맛을 잃는 현상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소금을 말씀하실 때,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소금의 사명은 ‘양념’이거나 ‘방부제’이거나 입니다. 그러니까 소금은 ‘소금 자체’로는 아무런 쓸모도 의미도 없습니다. 어딘가에 들어가 섞일 때만 비로소 자기 존재성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어딘가에 섞여 맛을 내야하고, 어딘가에 섞여 썩지 않게 해야 합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주님은 무리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 마 5:14, 15
빛 역시 그 자체를 위해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빛은 주변을 밝게 비추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소금이 그렇듯 빛도 어딘가를 향해 비칠 때만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처럼 참된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해 밝히 비치어서 세상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길을 찾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마 5:16
빛이 사람들에게 비치게 하는 방법으로 주님은 ‘착한 행실을 보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면서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 착한 행실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지난 주 말씀과 연결 지어 생각하면, 자신과 이웃을 위해 애통하는 것, 온유함으로 긍휼을 실현하는 것, ‘의(義)’를 위해 박해를 감수하며,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것 등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래야 한다고, 그래야 빛인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내는 사람인 겁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이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낯설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세상’이란 선민으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과 대립하는 현실이었기 때문에, 세상은 오히려 경계하고 극복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라면, 세상을 경계하고 극복할 대상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가 부패를 막고 맛을 내야 할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둠 속에 유폐되어버린 사람들을 빛 가운데로 이끌어내야 할 대상으로 여겨, 세상 어둠 속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빛을 밝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국적으로, 피부색으로, 이념과 문화로, 성별과 빈부의 차이로 온통 가르고 나누지만, 그러나 주님은, 세상의 소금이며 빛 된 너희는, 온유함이 복이며, 긍휼함이 복임을 아는 너희는, 나뉘고 갈라진 세상에 빛을 비치게 해, 갈라진 세상이 얼마나 부패한 세상인지 알게 하고, 온유와 긍휼이 회복된 세상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세상 속에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일까요? ‘세상 속에서’ 온유한 자로 살고, ‘세상 속에서’ 긍휼한 자로 살고 있는 것일까요? 더 나아가 ‘세상 속에서’ 의(義)를 갈망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요? ‘세상 속에서’ 의를 위해 박해를 감수하고 있을까요? ‘세상 속에서’ 평화를 이루기 위해 헌신하고 있을까요? ‘세상 속에서’ 청결한 마음 그대로 살아내고 있을까요? 오히려 욕망에 겨운 자로 살고, 사납고 음흉하며 교만한 자로 살고, 박해하는 자로 살고, 평화를 깨는 자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구약 성경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착한 행실을 이렇게 노래합니다.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 네 의를 드러내실 분이 네 앞에 가실 것이며, 주님의 영광이 네 뒤에서 호위할 것이다. 그 때에 네가 주님을 부르면 주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가 여기에 있다' 하고 대답하실 것이다. 네가 너의 나라에서 무거운 멍에와 온갖 폭력과 폭언을 없애 버린다면,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 | 사 58:7-11 새번역
사실 이사야 선지자의 이 말씀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다분히 종교 의식으로 금식을 하면서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사 58:3) 하며 생색을 내기에 바빴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금식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시비와 다툼으로 일관하고 약한 자들을 주먹으로 치는 일(사 58:4)이 다반사였습니다. 이사야에 따르면 그런 왜곡된 금식의 관행을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금식은 그런 것이 아니라, 부당하게 묶인 사슬을 풀어주고, 압제받는 사람을 자유롭게 놓아주고, 그들이 진 멍에를 부숴 버리는 것이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옷을 입혀 주는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산다는 건 바로 그런 것이겠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때때로 감동적인 말씀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에게서 병의 사슬을 벗겨주신 후에, 단 한 번도 ‘내가 너를 고쳐주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고쳤다”(마 9:22;막 10:52;눅 18:42 등)고 말씀해주심으로서 그의 믿음을 격려해 주십니다. 주님은 참 신앙의 의미를 그렇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예수님의 그러한 모습에 대해 “예수님께서 그러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 ‘사(私)’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 했습니다. 이아무개 대담․정리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삼인) 196쪽
세상의 소금이요 빛으로서 착한 행실을 실천하려면, 우리에게도 ‘사(私)’ 즉 ‘사사로움’이 없어야 합니다. ‘사(私)가 없다’는 것은 나를 드러내지 않고, 성령께서 하시도록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즉 사사로움을 비우는 것은 의지력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올 때 가능한 것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 고전 2:4, 5
바울의 이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이 말을 할 줄 몰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학자였고, 철학과 수사학의 언어를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의도적으로 ‘사람의 지혜’로 설득하는 방식을 내려놓습니다. 당시 철학자들이 설명과 설득의 도구로 ‘은유(隱喩 metaphora)’와 ‘수사(修辭)’를 동원했던 것과 그는 결을 달리합니다.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이 보여 준 증거로 하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이성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이성을 성령 아래에 둔 것입니다. 은유와 수사의 역할은 길을 설명하는 것까지입니다. 그 길로 설어가게 하는 능력은 성령의 역할입니다. 논어 술이편 1장에서 공자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을 강조합니다. 성인의 사상을 전할 때 다결과로 만 ‘술(述)’ 할 수는 있지만 독창적으로 지어내거나 창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노자 도덕경 18장에도 비슷한 경고가 나옵니다. ‘대도폐(大道廢) 유인의(有仁義)’ 하고 ‘혜지출(慧智出) 유대위(有大僞)’ 한다. ‘대도(大道)가 무너지니까, 그 결과로 인의(仁義) 즉 어짊과 올바름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고’. ‘사람의 지혜가 대단한 취급을 받게 되니까, 그 거짓이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노자와 공자가 경계한 것은 지식과 지혜 그 자체가 아니라, 지식과 지혜가 길을 대신하려 드는 순간이었고, 바울이 경계한 것은 ‘인간의 지혜가 성령을 대신하려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대비(對比)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지혜는 ‘이해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살게’ 만듭니다. 노자가 두려워한 ‘혜지(慧智)’의 문제는 이해는 하면서도 ‘살지는 않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두려워한 것도 같습니다. 믿음이 ‘이해한 것’에서 멈추고,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설득하지 않으려 합니다. 대신 성령이 일하시도록 자리를 비웁니다.여기까지가 신학이라면, 이제부터는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말씀을 경청하고 성찬에 참여해야 할까요? 말씀은 성경의 지식을 전하기 위해, 즉 성경의 정보만을 전달하기 위해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목사의 설교는 ‘술(述)’이거나 ‘설(說)’ 즉 ‘잘 설명된 지혜’가 되면 안 되고, 성도를 하나님의 능력 앞에 세우는 통로여야 합니다. 성찬은 더 분명합니다. 성찬은 이해의 대상이 아닙니다. 참여의 사건입니다. 우리는 떡과 잔을 ‘분석’하지 않습니다. 받아서 먹고, 마십니다. 여기에는 ‘논증(論證)’이 아니라 ‘몸의 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바울이 말씀한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이 성찬의 자리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소금으로, 또한 세상의 빛으로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인격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도, 지혜나 지식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착한 행실을 위해 자꾸만 인간적인 노력을 더하려고 하는 것은 내 안의 빛을 잃어버린 결과로 보아야 합니다. 내가 온전히 주님을 향해 서 있고, 주님의 빛이 내 존재를 환하게 밝히고 계시며,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 나를 감싸고 있다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착하게 사는 것은 매일매일 우리 일상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의미는 명료합니다. 한 사람의 멍에를 덜어주는 것, 한 사람의 배고픔을 채우는 것, 한 사람의 수치를 가려주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빛의 삶이고, 이사야가 해석해준 참된 금식이며, 바울이 말씀한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떠나 거룩해지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복판에서 소금으로 빛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Exercitatio
① 나의 경건함이 혼자만의 장소에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② 나의 ‘소금과 빛 된 삶’이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
첨부파일 : 주현-후-제5주-‘세상-속에서-빛과-소금.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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