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8주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렘 29:1, 4-7
1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이 같은 편지를 느부갓네살이 예 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고 간 포로 중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 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보냈는데 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 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5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6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 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 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응송 | 시 66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서신 | 딤후 2:8-15
8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9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 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14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 을 망하게 함이라 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복음 | 눅 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 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 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 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 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눅 17:15-19을 묵상하십시오. 나병이 깨끗함을 받은 사람 중에 몇 명이 주께로 돌아갔으며, 주님은 그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② 렘 29:5-7을 묵상하십시오. 고향으로 돌아갈 꿈을 품고 있던 유민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③ 딤후 2:11을 묵상하십시오. 주님과 함께 죽은 사람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떼가
누우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중 몇 마리는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 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복효근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시인은 오늘 우리가 살아 숨 쉬는 것이 누군가의 희생의 결과임을 알아봅니다.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진 삶이라서 그만큼 우리 삶은 거룩한데, 그 누구는 다름아닌 포악한 권력의 아가리에 자신을 던져 다른 차원의 존재와 삶을 보여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분 때문에 우리 삶은 그토록 거룩합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는 그분을 향해 과연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 것이며, 언젠가 누우떼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중 몇 마리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 쪽으로 발을 옮기듯 예수님께서 당신 살이 찢겨 살리신 이 생명, 예수님의 죽음에 빚진 이 목숨의 방향을 나를 희생해 타인을 살릴 수 있는 쪽으로 돌리고 있는 것일까요? 사람은 깨달은 만큼 살고, 느끼는 만큼 사는 것인데, 오늘 우리는 그 실례를 복음서에 나오는 사람들에게서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한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눅 17:13) 하고 크게 소리쳤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눅 17:14) 말씀하셨고, 그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길에 나병이 치료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서가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것은 이후 그들의 반응입니다.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 눅 17:15, 16
누가가 전해주는 바는 이렇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았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한 사람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했다. 그 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예수님께서 그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를 받아주시며 이렇게 물으십니다.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 눅 17:17, 18
그리고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 17:19) 이 이야기의 의미를 잘 이해하려면 지난 주 복음서와 연결시켜서 보아야 합니다. 지난 주 복음서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6) 이 말씀에 의하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는 사람은 마치 뽕나무가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기듯 마음속 깊이 뿌리박고 있는 자아(自我)라는 뽕나무를 완전히 뿌리 뽑아 복음의 바다에 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의 사람은 도무지 자기라는 것을 내세우거나 주장하는 태도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무아(無我)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자아(自我)를 완전히 뿌리째 뽑아낸 사람입니다. 지난 주일 주님의 말씀대로라면, 이런 믿음의 사람은 마치 하루 종일 들에서 일하고 돌아온 종이 집에 와서도 주인의 식탁 시중을 다 들고 나서야 비로소 밥을 먹고, 그러면서도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자세를 맞추어 “저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눅 17:10) 라고 겸손히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마리아인 나병환자가 바로 이런 겸손함이 몸에 배인 사람입니다. 지금 그에게는 모든 것이 경이롭고 신비하며 감사할 뿐입니다. 그는 지금껏 자아랄 게 없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채, 일상적인 사람의 영역 밖에서 ‘사람에 속하지 못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내일도 모레도 그렇게 자아가 결여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자아(自我)를 지니고서는 이런 감사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아의 본질은 자기중심성이며, 이 에고(ego)로부터 교만함과 무례함이 배어나오기 때문입니다.그러면 이 사마리아인을 제외한 나머지 아홉 명의 나병환자는 똑같은 나병환자인데 왜 예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던 걸까요? 그들은 이 사마리아인 나병환자와 달리 자기중심적 자아가 있었던 걸까요? 그들은 자아가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자아(自我)로 돌아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몸이 깨끗하게 됨과 동시에 예수님이 아닌 자기 안의 욕망을 먼저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욕망 가운데로 되돌아간 것이고, 따라서 감사란 그들에게 과분한 것이었습니다. 집으로 달려간 그들의 선택이 꼭 비난 받을 건 아니지만,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이 그 믿음으로 인해 육신의 질병뿐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받은 것을 보았을 때, 나머지 아홉은 절반의 치유만 받고 만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런 그들과 사마리아인 나병환자의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된 차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격의 차이였을까요? 기질적 차이였을까요? 민족성의 차이였을까요? 아닙니다. 믿음의 차이였습니다. 사마리아인 나병환자에게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나병과 싸우는 와중에 마치 뽕나무가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기듯 마음속 깊이 뿌리박고 있던 자아(自我)를 뿌리째 뽑아 복음의 바다에 심은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자기가 깨끗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을 찬미하며 예수님의 은혜에 전율할 수 있을까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으로, 자아를 뽑아 버린 사람입니다.
1224년 어느 날 성 프란치스코가 라베르나 산에서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라베르나는 시커먼 침엽수가 드문드문 있는 바위산인데, 성 프란치스코는 이 산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늘에서 날개 여섯 달린 세라핌과 그 한복판에 빛으로 싸인 그리스도가 보입니다. 프란치스코가 그렇게 예수님을 보고 있는 동안 산꼭대기가 어찌나 훤하게 빛이 나는지, 인근의 노새꾼들이 아침이 밝은 줄 알고 서둘러 안장을 얹었다가 나중에 다시 동이 터오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적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수난 중에 입으신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 등의 다섯 상처가 프란치스코에게 그대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으려 애쓰던 성 프란치스코가 수난의 아픈 흔적을 고스란히 나눔으로써 주님과 하나 되는 신비를 경험한 그 사건을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五傷)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오상(五傷)’ 즉 ‘다섯 가지 상처’는 자아가 뽑혀나간 흔적입니다. 마치 거목의 뿌리가 뽑히면 거기 큰 구덩이가 생기듯, 인간의 자아가 뿌리째 뽑혀나간 자리에는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신 상처만 남는 것입니다. 이것의 신학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일치, 혹은 ‘그리스도 닮기(Imitatio Christi)’입니다. 이후로 프란치스코의 삶 전체는 ‘그리스도를 닮는 사랑의 여정’이었습니다. 그에게 오상은 단순한 표적이 아니라, 내적 일치의 외적 징표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이 프란치스코의 몸에 새겨졌다는 것은, 그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일치되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그는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외형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입고 싶었다.(보나벤투라, 대전기 XIII장)”고 고백했고, 몰트만(J. Moltmann)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이것을 고난 속의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석했습니다. ‘고난과 죽음의 방법으로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사랑과 자유를 열어주시며’ 그럼으로써 그는 ‘전 존재와 더불어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이토록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공감하고 참여하는 ‘참여적 사랑’입니다.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Evagrius Ponticus)의 표현대로라면 ‘사랑 안의 변형’이라 하겠습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영적 여정을 ‘정화(purificatio)’→ ‘조명(illuminatio)’→‘일치(unio)’로 설명했는데, 프란치스코의 오상은 이 세 단계를 넘어, ’사랑의 일치’에 도달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경험한 게 그것입니다. 그는 나병환자가 된 후에 모든 자아가 뿌리 뽑혔습니다. 그 무아(無我)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보게 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친 건 아마도 그의 의견이었을 것입니다. 상처가 치유된 후에 집으로 달려가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리스도께로 돌아가 엎드려 감사하는 그에게서 참 신앙인을 봅니다.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 눅 17:16
이렇게 자기가 엎드릴 수 있는 대상을 경험한다는 건 한 개인으로서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 주님 앞에 이렇게 절실하게 엎드려 보셨습니까? 나를 살리기 위해 치르신 희생에 압도당해, 예수님만이 나의 생명임을 고백하며, 내 자아를 뿌리째 뽑아버리고 주님께 엎드려 진정한 감사를 드리신적 있으십니까? 예수님을 나의 생명으로 인식하고 경험한다는 건, 단지 세례 받고 교회에서 헌신하는 것을 뛰어넘어 보다 깊은 사랑에의 공감과 변화를 요청합니다. 우리는 그 순간부터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죄성(罪性)이 다시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자아를 뿌리째 뽑아 주님께 심으며 나의 믿음을 심화시켜야 할 것이고, 오늘 복음서의 사마리아 사람처럼 감사하며 주님과의 내적 일치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그 흔적은 절망 중에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을 때, 악한 세상 가운데서 선을 향해 나아갈 때, 우리 안에 새겨지는 그리스도의 자국입니다. 오늘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당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있던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 렘 29:4-7
당시 포로로 끌려가 있던 유민들 사이에는 바벨론이 곧 패망할 것이고, 우리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거짓 예언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은 유민들 마음에 공연한 기대심리를 갖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감내해야 할 회개의 시간으로 70년은 족히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 수형(受刑) 기간은 그들의 자아가 뿌리째 뽑혀나가야 할 70년입니다. 신앙생활은 절대 조급하면 안 됩니다. 회개 없는 회복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회개하지 않고도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건 사탄의 달콤한 유혹입니다. “너희는 거기에서 집을 짓고 살아라. 과수원을 마련하고 과일을 따먹으며 살아라. 장가들어 아들딸을 낳고 며느리와 사위를 삼아 손자 손녀를 보아라. 그 나라가 잘되도록 힘쓰며 기도해라. 그 나라가 잘되어야 너희도 잘될 것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복역의 의무를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정하신 70년은 그저 허송세월하며 시간만 때우라는 그런 기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며 어설픈 자존심 내세우지 말고, 포로로 끌려간 자로서 정착에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복역의 때가 다 찰 때까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과 생산 뿐 아니라 신자가 마땅히 해야 할 기도 역시 게을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겸손히 마땅한 도리를 다하다 보면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이르러 그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감내해야 할 진정어린 회개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화의 길을 다 걸어야 주님은 우리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십니다.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 딤후 2:11-13
주와 함께 죽은 자만이 주와 함께 살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는 “신뢰할 만하다 이 말씀이여”란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토대로 이 말씀을 디모데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세례를 뜻하고, 참는다는 것은 세례 받은 이후로 지난한 성화(聖化)의 과정이 필요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고난을 안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그 고난 때문에 불평하고 고난 때문에 절망하고 자살합니다. 그러나 내게 닥친 고난을 인내하고 선용하며, 거북이 등처럼 단단해진 자아의 껍질을 깨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인내하며, 묵묵히 그리스도인의 길을 걷는 자녀에게 어느 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나병환자의 썩은 몸에서 믿음을 꽃피워낸 사람, 나병환자의 죽은 몸에서 생명을 꽃피워낸 사람, 병 나았다고 당장 집으로 달려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달려와 엎드린 사람, 그리하여 그리스도와의 내적 일치를 이루고, 예수의 사랑이 내 안에서 불이 된 사람, 이후로 그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언젠가 누우떼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중 몇 마리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 쪽으로 발을 옮기듯 그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예수님께 빚진 자기 생명의 방향을, 자기를 희생해 타인을 살리는 쪽으로 돌리지 않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위에 세워진 삶이기에 그의 삶은 거룩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희생 위에 세워진 존재로서, 그 희생과 사랑에 공감하는 참여적 사랑으로, 주님과 같은 방향으로 자신을 던져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Exercitatio
① 나를 구하신 주님을 떠나 나만을 위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②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그리스도와 같은 뜻을 품고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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