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3주 하늘로 가는 길 the way to heaven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왕하 2:1-2, 6-14
1 여호와께서 회오리 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2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6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이에 두 사람이 가니라 7 선지자의 제자 오십 명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 가에 서 있더니 8 엘리야가 겉옷을 가지고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마른 땅 위로 건너더라 9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10 이르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고 11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 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12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 13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 요단 언덕에 서서 14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이르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응송 | 시 77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서신 | 갈 5:1, 13-24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복음 | 눅 9:51-62
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 묵 상 | meditatio
① 눅 9:62을 묵상하십시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란 신 자의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까?
② 왕하 2:9을 묵상하십시오.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는 스 승의 말에 엘리사가 구한 것은 무엇입니까?
③ 갈 5:16, 22을 묵상하십시오. 성령을 따라 행하면 이루지 않는 것은 무엇이며 이루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묵상 나눔
하늘로 가는 길 | the way to heaven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이 1948년에 집필한 자서전 ‘칠층산(The Seven Storey Mountain)’은 20세기 판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80여 년이 지난 현대에도 많은 구도자들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1915년 한창 전쟁 중이던 스페인과 접경한 프랑스 산맥의 어느 기슭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날의 자신에 대해 “나는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본성은 자유로웠지만 또한 내가 태어난 이 세상의 모습을 따라 횡포와 이기심의 노예이기도 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인간들,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태어났으면서도 공포와 절망적 자기모순 속에 허덕이며 사는 인간으로 가득 찬 지옥과 같다”고 혹평했습니다. 그는 미국과 프랑스, 영국을 오가며 자랐는데,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날들이 많다보니, 그의 어린 시절은 외로움에 방황한 시간들이 많았고, 사춘기 때는 불안한 감정의 폭풍우 속을 헤매야 했고, 청년 때는 종교와 철학의 단편 지식을 무의식중에 쌓아가다가 급기야 자신의 의식 속에 뿌리내린 것들이 사상체계를 이루며 한편으로는 복종을 거부하는 반항아가 되고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세계를 갈망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자기 안의 갈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을 향해 걷기 시작한 것은 콜롬비아대학에 다니던 때입니다. 그는 인간 존재의 핵심에 한 가지 역설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인간 본성은 그 자체로는 자신의 가장 중대한 문제를 전혀 또는 거의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을 향해 걷기 시작하는데, 그 첫 걸음을 그는 “내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먼저 부르신 것이었다.”라고 회상합니다. 마침내 트라피스트의 수도사가 된 그는 관상생활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참된 갈망을 갖게 됩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화의 은총’, 곧 하나님 자신의 삶과 아울러 영혼의 모든 약점과 한계를 극복하고 미친 듯이 반란을 일으키는 육신을 제어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능력을 주신다.” (토머스 머튼/정진석 옮김 「칠층산」 바오로딸 801쪽)
이 고백 안에서 그가 쓴 책이 바로 ‘칠층산’입니다. ‘칠층산’은 ’영혼이 하나님께 가는 길‘을 의미합니다. 단테가 쓴 ‘신곡’ 연옥편에서 유래한 제목인데, 이때부터 그는 자기 인생을 ‘하나님께 가는 길’이라고 고백합니다. 존 웨슬리 역시 그와 같은 고백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존재에 대해 ‘창공을 가르는 화살처럼 인생을 지나는 피조물’, ‘하나님께로 와서 하나님께 돌아가는 영(전 12:7)’, ‘거대한 구덩이 위를 얼마간 맴돌다 영원히 사라지는 물 한 방울(눅 16:26)’ 같을 뿐이라며, 그렇게 찰나를 살아가는 존재로서 자신이 알고 싶은 한 가지, 그것은 ‘하늘로 가는 길(the way to heaven)’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웨슬리의 고백에 따르면 ‘그 길(the way)’을 하나님이 직접 내려오셔서 가르쳐 주셨는데,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신 것도, ‘한 책’ 즉 성경에 ‘그 길’에 대해 적어놓으신 것도 ‘하늘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하늘로 가는 그 길에 필요한 지식이 충분히 담겨있는 그 ‘하나님의 책(the Book of God)’을 달라고 기도했고, 자신이 '한 책의 사람(homo unius libri)'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한 책을 열어 읽었습니다.(아드 폰테스 웨슬리 「The Way, 그 길」 대한기독교서회 6쪽)오늘 우리도 웨슬리처럼 하나님 앞에서 한 책을 열어 읽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들 역시 ‘하늘로 가는 길’에 관해 가르쳐줍니다. 구약성경은 여호와께서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고,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즉 ‘하늘로 가실 때’가 가까워져서(눅 9:51) 예루살렘을 향해 가실 때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엘리야도 예수님도 ‘하늘로 가는 길’을 가시려는 순간에 공통의 과제에 직면합니다. 그것은 세상에 남겨질 제자와 관련한 것이었고, 그들이 미성숙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엘리야는 제자 엘리사에게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왕하 2:9a)고 말합니다. 이때 엘리사가 스승 엘리야에게 한 말은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왕하 2:9b)였습니다. 스승 엘리야에 비해 자신이 영적으로 많이 미성숙한 상태임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각기 미성숙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분노해서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눅 9:54) 하고 묻는 모습에서 아직 ‘하늘로 가는 길’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미성숙함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바로 그러한 미성숙함으로 인해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갈 5:16)라고 말씀함으로서 ‘하늘로 가는 길’은 ‘성령을 따라가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복음서의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 눅 9:51
이 장면은 평범해 보이지만 조금 깊이 묵상해 보면 누가가 무엇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지가 드러납니다. 학자들은 이 장면을 '누가의 대 삽입'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누가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은 역설입니다. 승천(昇天)하실 기약이 차가던 그때, 주님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향한 길로 떠나기로 굳게 결심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늘로 가는 여정의 서막으로서 먼저 죽음을 향해 걷기로 ‘마음을 굳히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빠스카 신비를 향한 예수님의 인식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당신이 죽어야만 하늘로 가는 길이 열린다는 것, 즉 ‘고통의 신비’가 없으면 ‘영광의 신비’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구속의 도시’로 올라가시는 첫 길목에서 맞닥뜨린 사마리아 사람들의 적개심은, 장차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를 향해 퍼부어질 맹렬한 반대의 서곡(序曲)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걸 아셨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해서 그들을 불살라 버리자’는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를 오히려 꾸짖으시고(눅 9:55), 겸손히 다른 마을로 우회해서(눅 9:56) 예루살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이 일화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예수님의 마음과 제자들 마음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길이 ‘하늘로 가는 길’임을 아셨기에 사사로운 적개심에 크게 마음을 두지 않으셨지만, 제자들은 그 길이 ‘하늘로 가는 길’임을 몰랐기에 사사로운 적개심에도 일일이 반응을 보인 것이고, 예수님은 그 길이 ‘하늘로 가는 길’임을 아셨기에 적개심 앞에서 사랑의 방식을 보이실 수 있었지만, 제자들은 그 길이 ‘하늘로 가는 길’임을 몰랐기에 적개심에 대해 보복의 방식을 요구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죽음도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임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 여정에 한 가지 이야기가 추가됩니다.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 눅 9:57
누가는 이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고 불특정 인물로 묘사하고 있지만, 같은 장면을 기록한 마태는 이 사람을 ‘서기관’(마 8:19)이라고 증언했습니다. 권력에 있어 유대사회의 최고위층에 속한 서기관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선 것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더구나 ‘어디로 가시든지’ 라는 말은 그가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를 수행하며 섬기는 제자가 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가 예수의 어떤 점을 보고 따르려 하는 건지, 그리고 어떤 제자 상(像)을 가지고 제자가 되겠다는 건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계속 이어지는 예수님의 답변을 볼 때, 이 사람은 예수님의 권능에 매력을 느낀 것 같습니다. 반면에 영광 이면에 가려진 고난이나, 권능 이전의 가난함은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 눅 9:58
이 말씀에서 보는 예수님 제자도의 첫째 조건은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는 모든 인간적 확실성’ 포기하는 것'입니다. 여우나 새에게조차 허락된 ‘보금자리’라는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마저 보장받지 못하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예수님 말씀의 속뜻은 “그래도 따르겠느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이 물음은 우리를 향하신 물음이기도 합니다. 여우에게도 있고, 새에게도 있는 몸을 누일 곳 하나 없으셨던 주님을 생각하면 “그래도 따르겠느냐?” 라시는 물음에 대해 우리는 솔직한 대답을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님을 따름에 대한 전혀 새로운 차원의 고민으로 우리를 이끕니다.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 눅 9:59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던 사람에게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셨던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전혀 따를 뜻이 없어 보이는 한 사람을 향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앞의 사람과 달리 이 사람은 가족을 핑계로 내세우며 미온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는 주님께 청합니다.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주십시오. | 눅 9:59b 공동번역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죽은 이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가정적, 종교적, 사회적 영역에서 중요한 의무였습니다. 장례의 의무는 율법을 공부하는 일이나, 성전 예배, 유월절 제사, 할례를 받는 것보다 우선권을 가졌고, 그래서 시체를 만지지 말아야 하는 제사장도 친척이 죽은 경우에는 시체를 만지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심지어 연고자 없이 죽은 사람을 묻어주는 일은 이생과 내생에 하나님의 보상이 약속된 사랑의 행위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은 그 도리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 단호했습니다.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 눅 9:60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죽은 자들'이란, 아직 하늘로 가는 길을 알지도 들어서지도 못한 자들입니다. 그들이 하늘로 가는 길을 알고 들어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복음 전파를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는 말씀은, 그만큼 하늘로 가는 길을 알리는 것이 잠시도 지체하면 안 될 만큼 긴급성을 요하는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매순간순간이 우리에게 있어서나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나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결정적 순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그 결정적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에게 하늘로 가는 길을 알리는 그 사명이 다른 모든 것, 심지어 가족들에 대한 의무까지도 이차적인 것으로 미루어둘 만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주님은 ‘부모를 장사지내는 일’과 ‘하늘로 가는 길을 알리는 일’ 이 두 가지 가치를 서로 대립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과 ‘하늘로 가는 길을 알리는 일’이 지닌 절대적 ‘우위성’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의 모든 부르심은 ‘하늘로 가는 길’을 위한 부르심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라 ‘하늘로 가는 길’을 걷는 것은 ‘지붕 위에 서서 외쳐야 할 만큼’(마 10:27) 긴박하고도 절대적인 부름과 설득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는 길을 걷는 여정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또 하나의 자세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 눅 9:61
이 장면은 엘리사가 밭을 갈다가 엘리야의 부름을 받고 “나로 내 부모와 입 맞추게 하소서”(왕상 19:20a)라고 청했던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때 엘리야는 이렇게 반응했었습니다. “어서 가보게. 내가 어찌 작별 인사를 금하겠는가?”(왕상 19:20b 공동번역). 그러나 같은 요청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엘리야의 반응보다 훨씬 엄격했습니다.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 눅 9:62
주님의 이 말씀은 BC 80년, 그리스의 교훈 시인인 ‘헤시오드(Hesiod)’가 했던 격언을 인용한 것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농부의 유일한 목적은 ‘곧게 고랑을 내는 일’입니다. 농부가 다른 일에 신경 써 뒤를 돌아본다면 고랑은 결코 곧게 갈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는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라고 말했지만, 그러나 그 마음은 망설임으로 가득했습니다. 그 망설임을 어쩌지 못하고 따라나선다면, 그 사람은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며 끝내 일에 집중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따름'에 있어 엘리야보다 훨씬 엄격하게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부름의 중심이 바로 ‘당신’이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로 말미암은 ‘하늘로 가는 길’이 그만큼 절대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이나, 예수님께 부름 받은 두 사람이나, 그들 중 누구도 제자로서 합당한 자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처음 사람’은 마음속에 속된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두 사람은 “나를 따르라”는 소명을 받았지만, 내심 속된 미련이 뒤를 돌아보게 했기 때문입니다. 낡은 세계의 한 부분이라도 포기하지 못한다면 ‘하늘로 가는 길’은 지장 받게 되어 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따른다는 것은 정해진 걸음을 채운다는 것을 뜻한다. 부름을 받고 이미 내디딘 첫걸음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을 그의 과거 생활로부터 갈라놓는다. 이와 같이 따르라고 하는 그 부름은 즉시 새로운 상황을 창조해낸다. 이전의 상태에 머무는 것과 따르는 것은 서로 배타적인 두 개의 입장이다"(S. 치프리아니/오영민 역 「말씀과 전례」 성바오로출판사 63쪽)
그런 까닭에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는 길을 걸으려는 이들은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이 하는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 갈 5:13
우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육체의 쾌락을 누리라고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함으로서 하늘나라의 가치를 이 땅에서부터 실현하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땅의 가치관에 중독되어 있다 보니 하늘나라 가치로 살아가는 것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갈 5:16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죄의 법과 마음의 법 사이에서 곤고함을 호소하던 바울이 어느 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신을 해방했음을 깨닫습니다(롬 8:2). 그것은 놀라운 깨달음이었습니다. 번번이 죄의 법에 패하던 자신을 추슬러서 ‘참된 해방’을 얻게 된 영적 쾌거였습니다. 그래서 토머스 머튼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우리는 “우린 승리하리라” 라고 노래하는 사람들이 아닌 “오늘은 주님의 날,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 분은 승리하리라”라고 노래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로버트 인초스티/강창헌 옮김 「토마스 머턴의 씨앗」 생활성서사 79쪽 )오늘 구약성경에서 승천을 앞둔 엘리야는 제자 엘리사에게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왕하 2:9a) 라고 말합니다. 그때 엘리사가 했던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 왕하 2:9b
엘리사는 스승처럼 ‘하늘로 가는 길’에 정말 필요한 것이 무언지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알고 싶은 한 가지, 그것은 바로 ‘'하늘로 가는 길’입니다. 그 분은 한 책에 그 길을 적어놓으셨습니다.”라고 한 웨슬리의 고백처럼, 우리가 알고 싶은 한 가지 역시 ‘하늘로 가는 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하늘로부터 강림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순간은 그 길을 흔들림 없이 걷기 위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결정적 순간들’인데, 복음서의 제자들처럼 주님과 다른 길에 서서 주님과 다른 감정에 휩싸여, 생애 결정적 순간들을 허비하고 있거나,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 라고 결단했으면서도 여전히 마음이 망설임과 미련으로 가득 차서 진정한 따름의 길에 집중하지 못한다면 그 연약한 마음을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엘리사는 이렇게 구했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우리 역시 성령의 도우심을 끊임없이 구하며, 하늘로 가는 길에서 낙오하지 않고 신실하게 완주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Exercitatio
① '하늘로 가는 길'에 미련과 망설임으로 주저하고 있지 않은가?
② '하늘로 가는 길'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걷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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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5.0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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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제4주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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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5.05.10 |
435 | 다운로드 |
부활절 제3주 성사적 사랑으로의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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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5.05.03 |
434 | 다운로드 |
부활절 제2주 부활신앙은 우리를 정의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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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5.0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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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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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5.0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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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마지막 주(종려주일) 경청이 순종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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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5.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