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부활절 제5주 그가 나간 후에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사도행전 | 행 11:1-18
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4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5 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6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7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8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9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10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11 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12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13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응송 | 시 148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서신 | 계 21:1-6a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복음 | 요 13:31-35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13:34, 35을 묵상하십시오.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께 영광이 임하셨다면, 제자들에게는 어느 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합니까?
② 행 11:5-18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시작되고 제자들에게 명령된 사랑의 계명은 어디로 확대되었습니까?
③ 계 21:1을 묵상하십시오. 사랑의 계명과 하나님의 영광이 완성된 세계를 보고 사도 요한은 무엇을 보았다고 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그가 나간 후에
덴마크 작가인 ‘카렌 블릭센(Karen Christence Blixen)’이, ‘아이작 디네센(Isak Dinesen)’이라는 필명으로 쓴 책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에 ‘키타우(Kitau)’라는 키쿠유족 청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키타우가 어느 날 작가인 블릭센의 집을 찾아와 관리인으로 일하게 해달라고 해서 고용했었는데, 석 달쯤 지난 후에 다시 블릭센을 찾아와서 이번에는 인근 지역인 몸바사의 셰이크 알리 빈 살림(Sheik Ali bin Salim)이라는 이슬람 교인의 집에서 일하고 싶다며 추천서를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자기 집 일이 손에 익은 키타우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급료를 더 올려주겠다고 블릭센이 말하자, 키타우의 대답이 급료를 더 받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기독교인이나 무슬림이 되기로 결심했는데, 두 종교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 일단 주인이 기독교인인 집에 와서 석 달을 머물며 하인노릇을 하며 기독교인의 생활 방식을 보았으니, 이제 셰이크 알리 빈 살림의 집에 가서 석 달을 살며 무슬림의 생활 방식을 본 후에 두 종교 중 한 종교를 선택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 끝에 블릭센은 이런 독백을 남깁니다. “맙소사, 키타우, 그럼 여기 처음 왔을 때 그런 얘길 했어야지.”(카렌 블릭센/민승남 옮김 「아웃 오브 아프리카」 열린책들 54-55쪽)
만약 똑같은 상황이 우리에게도 생긴다면 우리도 블릭센처럼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작가인 블릭센의 입장에서는 이때의 키타우가 마치 부지중(不知中) 찾아오신 예수님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제자들의 생활방식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때때로 착잡하게 드러나는 순간들이 많이 포착됩니다. 어쩌면 오늘 말씀도 그중 하나이겠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이 있기 직전의 상황을 그리고 있는 요 13:2절에 보면 의미심장한 표현이 하나 나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 당신의 죽음을 알고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마음과 너무 달랐던 유다의 속내에 대한 요한의 고발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이어지는 말씀을 계속 따라가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장면이 그려지는데, 그런 후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주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 15). 나머지 제자들은 유다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주님께서 안심하실 만큼 생활 방식이 성숙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단한 여정을 마치고 집에 들어왔을 때, 적어도 주님의 제자라면 스스로 종의 위치에서 대야에 물을 받아와 형제들의 발을 씻어주던지 그렇게까지 못하겠으면, 발을 씻을 수 있도록 물과 수건이라도 준비해놓던지 해야 할 텐데,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선뜻 종이 하는 그 일을 자기가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중에 예수님께서 심령이 괴로워하시면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 13:21) 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그려지고, 그 증표로서 유다가 ‘적신 떡 조각’을 받고 어둠을 향해 나아가는 장면(요 13:30)이 요한에 의해 매우 극적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이 있은 후에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 13:38). 예수를 팔아넘기는 일에는 유다의 이름이, 예수를 부인하는 일에는 베드로의 이름이 거명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은 평범한 일상에서가 아닌 제자들의 이기적인 속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던 민망한 상황 속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민망한 상황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받으실 ‘영광’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 요 13:31
제자들의 상태를 감안하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기적인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있고, 그중 하나는 예수를 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베드로는 곧 예수님을 부인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인자가 ‘지금’ 영광을 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어둠을 향해 나간 유다’(요 13:30)는 곧장 산헤드린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예수를 넘길 방도를 모의할 것이고, 그로 인해 예수의 체포에는 속도가 붙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임박해 오는 당신의 수난을 바라보며 주님은 구속사역의 완성의 때를 보는 것이며, ‘지금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수난은 일시적으로 사탄의 승리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주님은 당신께서 받으실 영광으로 여겼고, 당신의 영광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지금 받았다’고 선언하신 그 영광에 대해 숙고(熟考)하게 해줍니다.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이 영광은 어떤 막연하고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아버지의 신성(神聖)에 참여하는 영광이고,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영광을 받았다”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장차 이루실 부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 요 13:32
우리는 이 말씀 안에서 성부와 성자께서 긴밀하게 일치를 이루고 계심을 봅니다. 성부는 성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고, 성자는 성부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이 영광은 단지 그것만을 목적으로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받으실 영광은 철저하게 십자가에서 당하실 수난과 죽음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로 이해 완성될 우리 구원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당하실 수난과 죽음을 바라보며, 그로 인해 성취될 인류의 구원을 희망하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십자가를 자신의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희생으로 인하여 이루어질 인류의 구원을 열망하며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그 희망에 공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주님의 희망이 시작되는 시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그가 나간 후에 | 요 13:31a
여기에서 ‘그’는 유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당하실 수난과 죽음 그리고 그로 인해 받으실 영광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굳이 ‘유다가 나간 후에’ 그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중요한 말씀을 ‘그가 나간 후에’(요 13:31)에 하실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암시하는 것이 있습니다. 유다가 있는 동안에는 예수 공동체가 진정한 영광을 향해 나아갈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일행이 중요한 갈림길에 설 때마다 예수님과 유다 사이에 벌어졌던 갈등을 기억합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마리아가 향유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사건이었습니다(요 12:3). 그때 유다가 역정을 내며 한 말이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속내는 가난한 사람이 아닌 돈에 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철저하게 세속적이었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기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고, 주님은 그를 굳이 설득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유다는 ‘자기 생각’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님 반대편 어둠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그 사실과 관련해 신약학자인 크레이그 키너(Craig S. Keener)는 우리가 유의해서 봐야 할 몇몇 성서적 정황들을 소개합니다.먼저 그는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요 13:18) 하신 주님의 말씀에 주목했습니다. 이 찰나에 주님께서 보신 것은, 다윗이 비탄 속에서 울부짖던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9) 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자기 친구이자 신하인 아히도벨에게 배신당했었는데, 주님은 유다도 아히도벨처럼 당신을 배신하실 것을 아신 것입니다. 여기서 ‘발꿈치를 든다’는 성서적 인용문은 말이나 나귀가 자기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을 발로 차는 이미지를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의 배신을 한층 더 가증스럽게 만든 것은 그 배신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 음식을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인애(仁愛)의 유대감을 상징했습니다. 식탁에서 함께 먹었던 사람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히는 것은 가장 사악한 사람이 아니면 모두가 꺼리는 중대범죄였습니다. 더욱이 유다는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후대 랍비 문헌에 나타난 좌석 배치를 감안할 때, 왼쪽 자리는 공격에 취약한 자리이기 때문에 왼편에 앉는 사람은 더 큰 신뢰를 받는 사람이고, 따라서 왼쪽에 앉는 사람에게 더욱 큰 명예가 주어졌다고 합니다. 만약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오른 쪽 자리에 앉았다면(요 13:25), 왼쪽 자리는 예수님이 쉽게 떡 조각을 적셔주신 것으로 보아(요 13:26) 유다가 앉아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예수님 제자들에 대한 성서 기록을 볼 때, 왼쪽 자리는 베드로가 앉아야 하는 자리였다고 합니다.
유다는 의도적으로 베드로를 낮은 자리에 앉게 하고, 더욱이 막 14:20절에서는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음으로써 고의적으로 서열을 위반하는 반역을 저지르고 있는데, 마가의 내러티브에 의하면 이때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적신 떡을 건네주시는 순간에도 유다의 배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유다가 나간 후’ 즉 배신자가 사라지고 순수한 11 제자만 남았을 때에야 비로소 깊은 진리가 담긴 고별설교를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 고별 설교란 다름 아닌, ‘당신이 영광 받으실 때’가 무르익었음을 선포하시고(요 13:31-32), ‘당신께서 당하실 수난의 불가피성’을 설명하신 것(요 13:33),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새 계명을 부여하신 것입니다.(크레이그 S. 키너/이옥용 「요한복음 Ⅲ」 2451-2469쪽)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 요 13:34a
사실 이 계명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언약백성들에게 거룩한 이웃 관계를 위한 율법의 대강령으로 이미 이렇게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 그러면 왜 주님은 이미 주어진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굳이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 계명이 레 19:18절의 율법의 대강령을 계승하면서도 사랑의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이웃사랑의 기준을 “네 자신과 같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애(自己愛 narcissism)가 강한 사람에게는 이 기준도 굉장히 파격적인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이웃 사랑의 기준을 당신에게로 높이셨습니다.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요 13:34b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이것이 예수님께서 새롭게 제정하신 이웃 사랑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요일 4:8, 16),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셔서(골 1:15; 고후 4:4),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요 13:1) 그 사랑을 모본으로 우리의 이웃사랑을 재조정 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흔적이 곳곳에 배여 있는데, 오늘 복음서의 계명을 말씀하시기 전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 15). 주님이시고 선생이신 당신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 그것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의 첫 번째 모본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셨습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이웃 사랑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과 일치하려는 영적 노력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영성 생활입니다. 이때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 현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요 13:35
모든 사람이 우리의 행동을 보며 ‘예수님의 제자’로 알아보는 것, 주님은 그런 현상을 두고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요 13:31a)고 하시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요 13:31b)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영광을 받으실 때,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더없는 영광이겠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영광이 어디에까지 이르러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 행 11:18
어느 날 유대인들에게 이방인 고넬료와 그의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고넬료에게 세례를 준 사람이 베드로라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간 것도, 그들의 집에 들어간 것도, 그들과 함께 식사한 것도, 유대인의 법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일제히 베드로를 비난했고, 베드로는 그 일에 대해 설명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사도행전의 배경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자신이 욥바에서 본 환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나는 욥바 성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내가 무아지경 가운데서 환상을 보았는데,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퉁이에 끈이 달려서 하늘에서 내 앞에까지 내려왔습니다.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땅 위의 네 발 가진 짐승들과 들짐승들과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들으니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하는 음성이 내게 들려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속된 것이나 부정한 것은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하는 음성이 두 번째로 하늘에서 들려 왔습니다. | 행 11:5-9 표준 새 번역
그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세 사람이 베드로를 찾아왔는데, 그들은 베드로를 초청해서 세례를 받기 위해 로마 사람인 고넬료가 심부름을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고넬료의 집에 가서, 그와 가족들에게 세례를 주었더니 성령이 처음 제자들에게 내리시던 그대로 그들에게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난하던 유대인들은 그 말을 듣고 잠잠해졌다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다”(행 11:18)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마침내 이방 세계에로까지 확대된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신비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완성될 당신의 사랑을 보며, 그 십자가로 인한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이 ‘주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기 시작했는데, 그 사랑이 이방인에게까지 이르자, 하나님의 영광이 이방인들 위에서도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이방인들 위에 임재 하셨습니다. 그 광경을 황홀하게 바라보던 사도 요한이 오늘 서신서를 쓰면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에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노라.” | 계 21:1-5a 표준 새 번역
우리의 이상(理想)이 주님과 같고 사도들과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에서 자신의 영광을 보시고, 자신의 영광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셨습니다. 심지어 그 영광이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일지라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라시며 당신의 죽음을 통한 하나님과 자신의 영광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셨기 때문에 주님은,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그 기준과 모본으로서 당신을 제시하실 수 있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을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로 이끄시는 이 중요한 말씀을 ‘유다가 나간 후에’ 하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유다 개인에게는 큰 비극이고, 주님의 마음에는 큰 슬픔이었습니다. 안톤 슈낙(Anton Schnack)의 수필집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 있는 글입니다.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발견된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편지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소행이 내게 얼마나 많은 불면(不眠)의 밤을 가져오게 했는지 모른다.”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하나의 치기 어린 장난, 아니면 거짓말, 아니면 연애 사건이었을까. 이제는 그 숱한 허물들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는데, 하지만 그때 아버지는 그로 인해 애를 태우셨던 것이다.
안톤 슈낙/차경아 역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문예출판사 9-10쪽
유다의 소행으로 인해 주님은 심령의 괴로움 속에서(요 13:21) 슬픔과 불면의 밤을 보내셔야만 했습니다. 그렇듯 우리의 소행으로 인해 주님께서 불면의 밤들을 지내시면 안 되겠습니다. 주님과 같고 사도들과도 같은 우리의 사랑이 주님의 영광이고 우리 모두의 영광이 되는, 그리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의 날들이 이어지고 매일 매일이 새로운 날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Exercitatio
① 주님과 다른 나의 지향이 주님의 슬픔이 되고 있지 않는가?
② 주님 닮은 사랑으로 인해 사람들이 주님 제자로 알아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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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마지막 주(종려주일) 경청이 순종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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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5.04.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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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제5주 유다의 욕망과 마리아의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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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5.04.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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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제4주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 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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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5.0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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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제3주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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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5.0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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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제1주 유혹이 나을 찾아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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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5.03.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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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 후 마지막 주 하나님의 빛으로 이루는 파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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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5.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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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 후 제7주 상한 감정에 직면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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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5.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