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부활절 제4주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사도행전 | 행 9:36-43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 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8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응송 | 시 23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서신 | 계 7:9-17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복음 | 요 10:22-30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 하는 것이거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10:26, 27을 묵상하십시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양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② 행 9:36, 39을 묵상하십시오. 욥바의 여 제자 다비다는 예수님의 양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았습니까?
③ 계 3:13-17을 묵상하십시오. ‘흰 옷 입은 자들’(13절) 즉 ‘예수님의 양들’에게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은 어떠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부활절 넷째 주일 예배에 참여하신 여러분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축복합니다. 특별히 지나간 날들을 어머니로 아버지로 살아오며 자녀와 가정을 위해 헌신하신 이 땅의 어르신들께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가 함께 하시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을 맡기시기 전에 외적으로 그리고 내적으로 그를 준비시키셨습니다. 처음 게네사렛 호수가에서 베드로를 만났을 때, 주님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 라고 말씀하시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많이 잡히는 체험을 하게 하신 후에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 5:1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름을 ‘시몬’에서 ‘베드로’로 바꾸어주시는가 하면(요 1:42),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고백을 들으신 후에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라고 칭찬해 주시고, 주님께서 수난을 앞두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잠들어 있었을 때는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막 14:37) 라며 꾸중도 하셨습니다. 그런가하면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 32) 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주님은 부활하신 후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신 후 다시 세 번 반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 21:15),
“내 양을 치라”(요 21:16),
“내 양을 먹이라”(요 21:17).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 요 10:22
이 수전절에 관해 알려면 수전절이 제정되던 당시의 시대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BC 175년 셀류커스(Seleucus) 제국의 왕위에 오른 안티오쿠스 4세(Ἀντίοχος Ⅳ)는 아테네의 시민이면서 에피큐러스 철학을 신봉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당시 강대국이던 로마가 헬라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는 것을 보며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헬라화 정책을 취합니다. BC 167년, 예루살렘을 정복해 헬레니즘의 도성으로 만들어버린 그는 예루살렘에 사는 유다인 중 헬라주의자들을 시켜 그리심 산에 제우스 신전을 설치한 것에 이어 예루살렘 성전을 제우스신에게 바치게 합니다. 그리하여 소위 ‘멸망케 하는 가증한 물건’이라고 불리는 제우스 신상(神像)이 예루살렘 성전에 세워지게 됩니다(제2 마카비서 6:1-7). 그들은 할례와 안식일을 지키는 것, 그리고 제물 바치는 것을 금지했고, 그 종교금지 조치를 어기면 사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야훼를 배신하게 되었고, 심지어 율법에 충실한 사람들마저 야훼를 버렸습니다(제1 마카비서 1:11, 52). 하지만 율법에 대한 억압은, 그 반작용으로 율법에 대한 또 다른 열정을 자극했습니다. 시온의 하나님만을 모든 역사와 세계의 하나님으로 믿는 이스라엘의 신앙 앞에서 다른 신은 우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성전모독은 경건한 유다인들을 자극했고, 그들의 분노는 마침내 독립투쟁으로 이어졌는데, 이것이 마카베오 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BC 165년 유다 마카비가 이끈 군대가 엠마오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는데(제1 마카비서 3:27-4:25), 이때 그들이 눈부신 승리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방적인 것들에 의해 더러워진 성전을 다시 깨끗하게 하고, 그해 겨울에 성전 재봉헌식을 거행하게 됩니다. 그 성전을 재 봉헌하는 축제를 ‘하누카(חנוכה, Hanuka)’ 즉 ‘수전절’이라고 하고, ’하누카’는 봉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수전절’을 ‘봉헌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A.H.J. 군네벡/문희석 옮김 「이스라엘 역사」 한국신학연구소 246-255쪽)
유다인들은 독립기념일이기도 한 이 수전절이 되면 8일 동안 매일 하나씩 하누카 촛대에 불을 밝히는데, 가운데 촛대에는 8일 동안 촛불을 밝혀두기 때문에 총 아홉 개의 촛불을 밝히게 되고, 그래서 수전절을 ‘빛의 절기’라고도 합니다. 예수님도 이 빛의 절기를 지키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행각을 거니실 때,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대들듯이 물었습니다.
하누카 촛대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 요 10:24a 표준 새 번역
대부분 주석학자들은 이때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는 유다인들을 ‘적대자들’이라고 분석합니다. 혹은 ‘예수를 반대하는 종교지도자들’이라고도 하는데, 독립기념일을 맞아 고조되는 기쁨과 적대자들의 공격이 한편으로는 매우 대조적으로 느껴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로고스요, 지혜요, 세상의 빛인 분이 솔로몬의 행각 위를 걷고 있는데, 그 빛을 몰라보는 적대자들의 편협한 시선은 역설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의 마음을 졸이게 했다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뜻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 당신은 우리를 불안하게 할 것인가?” 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언제까지 우리를 근심하게 하고, 성가시게 하고, 괴롭게 할 것인가?” 라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왜 정식 신학교육을 받지도 않은 당신이 성전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 가고 있느냐?” 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질문에서 그들이 정말 알고 싶어 하는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당신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 | 요 10:24b 표준 새 번역
예수 때문에 자기들의 권위가 도전받는 것에 대한 불쾌감과 짜증이 배여 있는 “당신이 그리스도가 맞느냐”는 이 질문은 아이러니하게 요한신학의 핵심적 주제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우리를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아가 맞느냐”는 의미도 은연중에 포함되어 있어서 평상시에도 민감했던 이 질문은, 특히 BC 165년 셀류커스 제국에 맞서 승리한 마카베오 혁명을 기념하는 축제기간에는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독성이 가득 묻어있는 이 질문은 결과적으로 예수를 돌로 치려고 하는 살의(殺意)로(요 10:31), 그리고 예수를 체포하려는 시도로(요 10:39) 발전됩니다. 그런데 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굉장히 단도직입적입니다.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그 일들이 곧 나를 증언해 준다. 그런데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 요 10:25-26 표준 새 번역
여기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내가 이미 너희에게 말했는데 너희가 내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그 일들이 나를 증언해 주는데 너희가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는 내가 말을 해도 믿지 않았고, 행동을 해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거듭거듭 당신의 정체에 대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나는 양의 문”(요 10:7)이라고도 하셨고, “나는 선한 목자”(요 10:11)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같은 유다인이면서,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동을 보면서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진단하십니다.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 요 10:26 표준 새 번역
이 말씀은 몇 가지 의미를 그 안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선한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양은 다른 목자의 양이거나, 아니면 염소이거나, 예수님의 양떼를 늑탈하기 위해 양의 옷을 입은 이리입니다(마 7:15). 목자와 양의 관계성립을 생각할 때, 이 말씀은 어떤 경우라도 그들에게는 불행한 진단입니다. 만약 그들이 ‘다른 목자의 양’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자들입니다. 실제 유다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믿지 않음으로 스스로 예수님의 양떼가 아님을 자인하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양이 아니고 ‘염소’라고 한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주님은 ‘양과 염소의 비유’(마 25:32-46)에서 염소들을 향해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라고 명하신 바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양의 옷을 입은 이리’라고 한다면 문제는 더더욱 심각해집니다. 주님은 마 7:15절에서 거짓선지자들을 향해 “양의 옷을 입은 노략질하는 이리라”시면서, 그들에게 미혹된 것만으로도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마 7:19)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양’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자부심만 충만했지 정작 그들의 삶은 양의 모습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염소’이거나 ‘양의 옷을 입은 이리’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양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주님은 이렇게 정의하십니다.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 요 10:27 표준 새 번역
오늘 말씀이 있기 전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을 향해 가슴 아픈 말씀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사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요 8:37a) 라시며 그들의 혈통을 인정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이 이렇습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너희에게 내 말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요 8:37b 공동번역). 얼마나 가슴 아픈 진단입니까? 지금 우리의 마음 상태는 어떤가요? 주님 말씀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는가요? 주님의 양으로서 그 분 말씀을 경청해 마음에 쌓고, 주님은 그런 나를 당신의 양으로 알고 계시는 것일까요?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을 곳이 없을 때,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너는 내 양이 아니다 | 요 10:26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게 하고, 주님께서 나를 당신의 양으로 아시도록 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을 내 안에 있게 하는’ 수행방법으로 우리교회에서 실천하고 있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는 라틴어 표현이라서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습니다. 우리 언어로는 대개 ‘거룩한 독서(Holy Reading)’ 혹은 ‘영적 독서(Spiritual Reading)’ 혹은 ‘성독(聖讀)’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성독 : 귀고 2세의 수도사의 사다리’를 해설한 최대형 목사에 따르면, 개신교 전통에서 이 렉시오 디비나가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예배 중 교독하는 것도 렉시오 디비나이고, 어려서 교회학교에서 성경말씀을 암기하는 교육을 받아온 것도 렉시오 디비나이고, 제자훈련에서 말씀을 암기하는 것도 렉시오 디비나라는 것입니다.(귀고2세/엄성옥 「성독聖讀 : 귀고 2세의 수도사의 사다리」 은성출판사 17쪽)이 ‘렉시오 디비나’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게 하는 믿음의 원천이고,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는 안내자이기 때문입니다. 렉시오 디비나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에 있어서 단순히 ‘정보 습득적(혹은 기능적)’ 성경 읽기를 넘어, ‘영성 형성적’ 성경 읽기에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정보 습득적’ 성경 읽기는 본문의 표면을 신속하게 훑으려 하는 직선적 방법이지만, ‘영성 형성적’ 성경 읽기는 독서(lectio), 묵상(meditatio), 기도(oratio), 관상(contemplatio)이라는 네 단계의 영적 사다리를 오르는 동안 본문의 깊은 차원을 천천히 음미하는 방법입니다. 엘레드 스콰이어(Aelred Squire)는 ‘거룩한 독서(Holy Reading)’라는 책의 ‘교부들에게 질문함’이라는 장에서 성 티에리의 윌리엄(St. William of Thierry)의 말을 이렇게 소개해 줍니다.
우리는 성경이 기록되었을 때와 동일한 정신으로 성경을 읽어야 하며 동일한 정신으로 이해해야 한다. 주의를 집중하여 바울의 글을 읽고, 깊이 숙고함으로써 그의 정신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결코 바울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의 경험에 의해서 시편이 말하는 것을 깨닫지 않고서는 다윗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의 다른 책들도 동일하다. 단순히 읽는 것과 주의를 집중하는 것의 차이는 우정과 환대, 또는 우정과 의례적인 인사의 차이와 같다.(M. 로버트 멀홀랜드/최대형 옮김 「영성 형성을 위한 거룩한 독서」 은성출판사 64쪽)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정보를 습득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본문의 깊은 차원을 천천히 음미하며 순종하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숙고함으로써 그 말씀을 하신 주님, 혹은 선지자, 혹은 사도들의 뜻을 공감하고 삶으로써 그 뜻을 살아내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써 그러한 영적 삶을 살아갈 때, 주님은 이렇게 약속해 주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요 10:28, 29
사도행전에 그런 여인이 등장합니다.요빠에는 다비타라는 여신도가 살고 있었다. 그 이름은 그리스말로 도르가, 곧 사슴이라는 뜻이다. 그 여자는 착한 일과 구제 사업을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 그 무렵에 병이 들어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깨끗이 씻어서 이층 방에 눕혀놓았다. | 행 9:36 공동번역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우리에게 이 여인의 이름을 알려줄 뿐 아니라, 이름의 뜻까지 알려준 것에는 뜻이 있습니다. 이름이 그녀의 성품을 드러내주기 때문입니다. 유다인인 그녀의 히브리어 이름은 '다비타'인데, 헬라인들이 자기들 언어로 ‘도르카스(Δορκάς)’ 즉 ‘사슴’이라고 불렀습니다. 되새김질하는 반추 동물인 사슴은 높은 곳에 살며, 멀리서 접근해 오는 천적(天敵)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은 이 동물들이 시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도르카데스(dorcades)’라고 부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란 그런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되새김질하며 주의와 지혜를 위의 것들에 두고 살아가는 동시에 늘 신중함과 분별로 스스로를 경계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동물들은 율법이 정한 깨끗한 동물이고(레 11:3;신 14:6), 그 본성이 온순해 주변을 편하게 할 뿐 아니라 죽어서는 가죽과 고기를 제공합니다. 다비다는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헬라 과부들의 도르카데스였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이 여인에 대해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라고 그녀의 행적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시체를 곱게 씻어 다락에 뉘어놓고 서둘러 베드로가 있는 룻다로 사람을 보냅니다(행 9:37). 베드로가 도착해서 다락에 올라가 보니 주변에서 과부들이 울고 서 있었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에게 옷가지를 보여주는데(행 9:39), 그 속옷과 겉옷들은 도르가가 과부들이 추울 때 그들을 입히기 위해 만든 옷가지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 걸었던 진정한 양의 모습을 봅니다. 그녀는 이상을 높은 곳에 두고, 말씀을 마음에서 되새김할 뿐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해서 선행과 구제에 온 힘을 쏟아 붓는 여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양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있게 할 뿐 아니라, 말씀을 따라 내 사랑이 필요한 형제를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당신의 양을 보시면서 “나는 그들을 알며”(요 10:27) 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르가가 그런 여인이었기에 주님은 그녀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 행 9:40-42
주님의 양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그 결과로 많은 사람이 주를 믿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러한 삶을 살았던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우리에게 소개합니다.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 계 7:15-17
이 말씀은 ‘흰 옷 입은 자들’(계 7:13) 즉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계 7:14)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양들’인데,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라는 말씀은 광야에서 섬세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신 하나님의 돌봄을 떠올리게 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태양이나 어떤 뜨거운 열도 그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며,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시며,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실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미래를 소망하십니까? 이 영광스러운 내 인생의 결론을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양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숙고함으로서, 말씀의 깊고 크신 의미를 깨달을 뿐 아니라, 그 말씀에 순명하는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우리 모두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은 어버이주일이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부모님과 나의 관계 안에서도 성찰해 봐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양이기 때문에 예수님 말씀을 내 마음에 두듯이, 부모님의 자식이기 때문에 그분들 말씀을 내 마음에 두고 항상 되새기고 공경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할 때 주님은 우리를 당신 보좌 앞에 있게 하시고, 우리 위에 장막을 치셔서, 광야 같은 세상을 안전하게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Exercitatio
①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는 ‘다른 양’이 되어있지 않은가?
②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며 마음에 두고 순종하는 ‘예수님의 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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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 후 마지막 주 하나님의 빛으로 이루는 파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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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5.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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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 후 제7주 상한 감정에 직면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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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5.0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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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 후 제6주 마음을 가꾸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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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5.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