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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마지막 주(종려주일) 경청이 순종을 낳는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5-04-12 19:32
조회
170
사순절 마지막 주 | 종려주일 (다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사 50:4-9
4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9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응송 | 시 31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서신 | 빌 2:5-11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복음 | 눅 23:32-38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사 50:4-5, 8절을 묵상하십시오. 고난 받는 종이 모욕을 겪으면서도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무엇입니까?
② 눅 23:34을 묵상하십시오. 인간의 야만적인 폭력과 모욕을 겪으시는 중에도 예수님의 시선은 어디에 있습니까?
③ 빌 2:6-11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재를 이마에 바르고 흙으로부터 와서 흙으로 돌아갈 내 존재를 기억하며 시작된 사순절 여정이 시나브로 마지막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주님의 발자국을 따라 이 사순절 길을 걸어오는 동안 우리 각자는 어떠한 내적 변화를 이루었을까요? 무심히 본능을 따라 살아온 지난날을 회개하며 다시금 그리스도께로 돌아서서 말씀을 경청하고 말씀에 순명하는 회심을 이루었을까요? 또 주께로 돌아서서 말씀을 경청하며 회심을 이룬 그리스도인답게 편리 지향적이고 소비 지향적이던 삶을 떠나 생태 지향적 삶에로의 회심을 이루었을까요? 그런 회심과 변화들이 사순절을 지나며 이루어야 할 그리스도인 영성생활의 과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순절의 끝자락에 맞이한 수난주간을 전통적으로 교회는 성주간(聖週間)이라고 부릅니다. 사순절 여정의 마지막 가파른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는 교회력으로 연중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시기여서 이 기간을 성주간이라고 부르는데, 이 극적이고 성스러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념하게 될 것입니다. “기념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살아계시고, 현재 우리 가운데 현존해 계시며,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종려주일인 오늘은 주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찬미하고 환호하던 군중들이 이내 표정을 바꾸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그 거칠고 비정했던 모습들 속에서 내 자화상을 목격하고, 성목요일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하셨던 당부의 말씀을 듣고, 성찬에 참여해서는 다음의 말씀을 들으며 주님의 살과 피를 모시게 될 것입니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마 26:26).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 28). 아니 어쩌면 성찬에 참여하기 이전에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유다에게 하셨던 그 말씀을 내가 듣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눅 22:22). 그리고 성금요일에는 십자가 위에서 주님이 하신 일곱 마디 말씀을 묵상하고(마 27:46;눅 23:34-46;요 19:26-30). 부활절 전 날인 토요일 저녁에는 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 부활 대축일 저녁기도(성무일도)’를 드리면서 파스카 성삼일 축제를 마무리하고 부활의 아침을 맞이합니다.
오늘은 성주간의 첫날인 종려주일입니다. 러시아의 트페로 화파가 15세기에 그린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제목의 이콘이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라고 한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예수님은 뒤에서 따라오는 사도들을 향해 가볍게 머리를 돌리고 계시고, 오른 손으로는 당신을 만나러 오는 군중들에게 강복하십니다. 이 이콘에서의 도시는 모두 기묘한 각도이고,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진 모습인데, 그 이유는 이곳이 지상의 도시가 아니라 천상의 예루살렘이고, 이곳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법칙이 잠시 정지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 이콘에는 구세주께서 오시는 길에 나뭇가지를 꺾어 놓고, 겉옷을 깔아놓는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일찍이 시인은 시 8:2절에서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라고 노래했었고, 예수님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주님을 찬미하던 어린이들에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노했을 때(마 21:15),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마 21:16b)라고 물으신바 있습니다. 반면에 어른들은 매우 침울해 보입니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를 종식(終熄)시킬 혁명적 지도자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가 자기들이 기대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머잖아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마 27:22)라고 외칠 것입니다.(장긍선 「이콘-신비의 미」 기쁜소식 179-183)
실제 고난주간 내내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피조물인 인간의 거센 저항과 공격입니다. 구약성경은 자기의 동족들에게 온 몸을 내어맡긴 채 채찍과 뺨을 맞고 수염을 뽑히며 침 뱉음을 당하는 하나님의 종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복음서의 말씀은 무죄하신 그리스도를 거슬러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꾸미는 비정한 음모의 현장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고난주간의 의식들은 슬픔을 내면에 끌어안은 채로 치러지지만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은총으로 인해서는 감사와 기쁨을 만감(萬感)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스케테에서 어떤 형제가 사부 모세를 찾아가 한 말씀을 구하자, 늙은 사부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가서 네 독방에 앉아있으라. 그러면 독방이 네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한 형제가 사부 히에라쿠스에게 한 말씀을 청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늙은 사부가 말했습니다. “네 독방에 앉아있으라.”
(헨리 나우웬/윤종석 옮김 「영성수업」 두란노 118쪽)
4-5세기 경 이집트 사막의 교부들 세계에서 ‘독방에 앉아있으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라’는 의미였습니다. 말씀이 마리아의 태 안에 성육신하기 전에 마리아는 들려오는 말씀을 경청했었습니다. 마리아의 경청과 순종으로 인해 말씀이 마리아 안에서 육신이 될 수 있었습니다. 경청(傾聽)은 하나님의 살아있고 창조력 있는 말씀에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이 갖는 중심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침마다 이사야의 귀를 열어 귀를 깨우쳐 말씀을 알아듣게 하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모욕과 수치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그는 아침마다 하나님께로부터 공급을 받았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그렇습니다. 이사야의 힘은 언제나 주 여호와의 도우심에 의존되어 있었습니다. 선을 위해 싸우다가 고난을 당하는 이들의 처지를 헤아리고 계신 하나님 말씀을 아침마다 경청했기에 그는 모진 수치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아무런 표정의 동요 없이 이겨내었고, 수치를 수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 ‘말씀묵상과 기도’ 즉 수련입니다.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발간한 ‘매일 기도서’에 따르면 ‘렉시오(Lectio)’ 즉 ‘성경 읽기’의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됨으로써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려는 것에 있습니다. 즉 우리가 성경을 읽는 목적은 단지 성경에서 정보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종국적으로 새로운 존재로 지음받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묵상(meditation)’은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받아들이며 그 말씀의 주변을 거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가리켜 빅토르 위고(Hugh of Saint Victor)는 ‘마주한 진리의 핵심을 꿰뚫기’라고 표현했고, 묵상의 즐거움은 좋은 벗과의 대화에 흠뻑 빠져드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에벌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은 ‘하나님의 현존 속에서의 사유’라고 했습니다.(스티브 하퍼/정명성 옮김 「매일 기도서」 KMC)
이렇게 ‘독서’를 통해 받고 ‘묵상’을 통해 깊이 생각한 말씀들을 ‘관찰(tem-plari)’ 즉 ‘관상(Contemplation)’함으로써 ‘기록된 말씀’은 우리 안에서 ‘살아있는 말씀’이 되고, 이러한 영적 노력을 통해 우리들은 비로소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침마다 자신의 귀를 열어 깨우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룬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고백을 보십시오.
어린양이 마치 초장을 향해 가는 것처럼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저항이나 두려움이나 원망도 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 사람들아 이러지 말게” 라거나 “왜 네게 이러느냐?”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시관을 쓰신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릴 때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으며, 사람들이 당신 얼굴에 침을 뱉을 때도 침묵하셨고, 십자가가 무거워 넘어지실 대도 참으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가혹한 아픔을 겪으실 때도 사람들이 아닌 아버지께 호소하셨습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도 그분께서는 땅을 내려보지 않고 하늘을 쳐다보셨습니다. 그분 능력의 원천은 땅이 아니라 하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 위로의 원천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진정한 본향은 지상 나라가 아니라 천상왕국이었기 때문입니다.(니콜라이 벨리미로비치/박효섭 옮김 「오홀리드 프롤로그 상上」 카리스마타 코이노니아 449쪽)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의도적인 모욕을 받아들이심으로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당신 안에서 성취되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저들의 야만적인 폭력과 모욕이 자행되던 그 처참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도 정확하게 이사야의 예언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Exercitatio
① 말씀에의 경청이 없어 무기력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② 말씀과 기도로 이어지는 수련을 통해 세상을 이기고 있는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사 50:4-9
4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9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응송 | 시 31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서신 | 빌 2:5-11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복음 | 눅 23:32-38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사 50:4-5, 8절을 묵상하십시오. 고난 받는 종이 모욕을 겪으면서도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무엇입니까?
② 눅 23:34을 묵상하십시오. 인간의 야만적인 폭력과 모욕을 겪으시는 중에도 예수님의 시선은 어디에 있습니까?
③ 빌 2:6-11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경청(傾聽)이 순종(順從)을 낳는다.
재를 이마에 바르고 흙으로부터 와서 흙으로 돌아갈 내 존재를 기억하며 시작된 사순절 여정이 시나브로 마지막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주님의 발자국을 따라 이 사순절 길을 걸어오는 동안 우리 각자는 어떠한 내적 변화를 이루었을까요? 무심히 본능을 따라 살아온 지난날을 회개하며 다시금 그리스도께로 돌아서서 말씀을 경청하고 말씀에 순명하는 회심을 이루었을까요? 또 주께로 돌아서서 말씀을 경청하며 회심을 이룬 그리스도인답게 편리 지향적이고 소비 지향적이던 삶을 떠나 생태 지향적 삶에로의 회심을 이루었을까요? 그런 회심과 변화들이 사순절을 지나며 이루어야 할 그리스도인 영성생활의 과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순절의 끝자락에 맞이한 수난주간을 전통적으로 교회는 성주간(聖週間)이라고 부릅니다. 사순절 여정의 마지막 가파른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는 교회력으로 연중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시기여서 이 기간을 성주간이라고 부르는데, 이 극적이고 성스러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념하게 될 것입니다. “기념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살아계시고, 현재 우리 가운데 현존해 계시며,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종려주일인 오늘은 주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찬미하고 환호하던 군중들이 이내 표정을 바꾸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그 거칠고 비정했던 모습들 속에서 내 자화상을 목격하고, 성목요일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하셨던 당부의 말씀을 듣고, 성찬에 참여해서는 다음의 말씀을 들으며 주님의 살과 피를 모시게 될 것입니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마 26:26).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 28). 아니 어쩌면 성찬에 참여하기 이전에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유다에게 하셨던 그 말씀을 내가 듣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눅 22:22). 그리고 성금요일에는 십자가 위에서 주님이 하신 일곱 마디 말씀을 묵상하고(마 27:46;눅 23:34-46;요 19:26-30). 부활절 전 날인 토요일 저녁에는 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 부활 대축일 저녁기도(성무일도)’를 드리면서 파스카 성삼일 축제를 마무리하고 부활의 아침을 맞이합니다.
오늘은 성주간의 첫날인 종려주일입니다. 러시아의 트페로 화파가 15세기에 그린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제목의 이콘이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라고 한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예수님은 뒤에서 따라오는 사도들을 향해 가볍게 머리를 돌리고 계시고, 오른 손으로는 당신을 만나러 오는 군중들에게 강복하십니다. 이 이콘에서의 도시는 모두 기묘한 각도이고,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진 모습인데, 그 이유는 이곳이 지상의 도시가 아니라 천상의 예루살렘이고, 이곳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법칙이 잠시 정지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 이콘에는 구세주께서 오시는 길에 나뭇가지를 꺾어 놓고, 겉옷을 깔아놓는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일찍이 시인은 시 8:2절에서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라고 노래했었고, 예수님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주님을 찬미하던 어린이들에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노했을 때(마 21:15),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마 21:16b)라고 물으신바 있습니다. 반면에 어른들은 매우 침울해 보입니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를 종식(終熄)시킬 혁명적 지도자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가 자기들이 기대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머잖아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마 27:22)라고 외칠 것입니다.(장긍선 「이콘-신비의 미」 기쁜소식 179-183)
실제 고난주간 내내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피조물인 인간의 거센 저항과 공격입니다. 구약성경은 자기의 동족들에게 온 몸을 내어맡긴 채 채찍과 뺨을 맞고 수염을 뽑히며 침 뱉음을 당하는 하나님의 종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복음서의 말씀은 무죄하신 그리스도를 거슬러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꾸미는 비정한 음모의 현장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고난주간의 의식들은 슬픔을 내면에 끌어안은 채로 치러지지만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은총으로 인해서는 감사와 기쁨을 만감(萬感)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 사 50:4
‘고난 받는 종의 노래’중 세 번째 노래인 이 대목은 42장과 49장에 있는 두 노래와 차이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 종의 노래에 등장하는 종은 매우 온유하고 조용합니다. 그는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고(사 42:2)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서 세상에 정의를 시행할 것입니다(사 42:3-4). 두 번째 종의 노래에 등장하는 종은 하나님께서 어머니 복중에서부터 부르신 종입니다(사 49:1).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귀기울이 않아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내 힘을 다하였다”(사 49:4)라며 낙심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사명을 감당케 하십니다(사 49:5). 반면에 오늘 말씀인 세 번째 종의 노래에 등장하는 종은 ‘고난 받는 종’입니다. 여기서 고난 받는 종은 '나'라는 일인칭 형식을 빌어 자기에게 주어진 종의 사명을 세 가지로 노래합니다. 첫째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이고, 둘째는, 아침마다 깨어서 말씀을 이해하는 일이고, 셋째는 여호와의 도움을 받아 박해를 이겨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 사명을 감당해 내기에는 당시 시대가 너무 완고하고 사나웠습니다. 그의 고백이 처절합니다.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 사 50:6
여기에 종이 당하는 고난의 현장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등을 때리고, 수염을 뽑고, 침을 뱉습니다. 수치와 모욕감을 느끼게 해서 사람의 인격을 살해하는 잔인한 행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이 이런 모욕을 당한 건 자기의 잘못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직무로 인해 이런 고난을 당합니다. 이사야의 직무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곤고한 사람을 말로써 격려할 수 있게 하셨고, 아침마다 귀를 깨우치셔서 학자처럼 알아듣게 하셨습니다(사 49:4). 그런데 그런 사명을 받아 실천한 사람이 왜 그런 모욕과 수치를 당해야 했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듣기 싫었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싫어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야 했던 것이 ‘말씀을 선포하는 것에서 자기 존재의 근거와 이유를 찾았던’ 선지자들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자기에게 다가온 고난을 거부하지 않고 자신을 완전히 맡겼습니다. 때리는 이에게 등을 맡기고, 수염을 뽑는 이에게 뺨을 맡기고, 침 뱉는 이 앞에서 얼굴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런 삶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사야 선지자가 모욕과 수치를 이겨내고 선지자로서 자기 길을 다 갈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말씀을 ‘듣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학자’를 뜻하는 ‘림무드(דומל)’라는 히브리어에는 ‘말하는 혀’ 못지않게 ‘듣는 귀’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전하는 것’보다 우선인 것입니다. 그 사실은 5절에서도 잘 드러납니다.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 사 50:5
이 말씀은 앞에 있는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라는 말씀을 다시 강조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사야는 이 고백을 통해서 자신의 귀를 열고 깨우쳐 주시는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의 ‘영성수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스케테에서 어떤 형제가 사부 모세를 찾아가 한 말씀을 구하자, 늙은 사부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가서 네 독방에 앉아있으라. 그러면 독방이 네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한 형제가 사부 히에라쿠스에게 한 말씀을 청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늙은 사부가 말했습니다. “네 독방에 앉아있으라.”
(헨리 나우웬/윤종석 옮김 「영성수업」 두란노 118쪽)
4-5세기 경 이집트 사막의 교부들 세계에서 ‘독방에 앉아있으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라’는 의미였습니다. 말씀이 마리아의 태 안에 성육신하기 전에 마리아는 들려오는 말씀을 경청했었습니다. 마리아의 경청과 순종으로 인해 말씀이 마리아 안에서 육신이 될 수 있었습니다. 경청(傾聽)은 하나님의 살아있고 창조력 있는 말씀에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이 갖는 중심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침마다 이사야의 귀를 열어 귀를 깨우쳐 말씀을 알아듣게 하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모욕과 수치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그는 아침마다 하나님께로부터 공급을 받았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 사 50: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그렇습니다. 이사야의 힘은 언제나 주 여호와의 도우심에 의존되어 있었습니다. 선을 위해 싸우다가 고난을 당하는 이들의 처지를 헤아리고 계신 하나님 말씀을 아침마다 경청했기에 그는 모진 수치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아무런 표정의 동요 없이 이겨내었고, 수치를 수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 ‘말씀묵상과 기도’ 즉 수련입니다.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발간한 ‘매일 기도서’에 따르면 ‘렉시오(Lectio)’ 즉 ‘성경 읽기’의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됨으로써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려는 것에 있습니다. 즉 우리가 성경을 읽는 목적은 단지 성경에서 정보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종국적으로 새로운 존재로 지음받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묵상(meditation)’은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받아들이며 그 말씀의 주변을 거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가리켜 빅토르 위고(Hugh of Saint Victor)는 ‘마주한 진리의 핵심을 꿰뚫기’라고 표현했고, 묵상의 즐거움은 좋은 벗과의 대화에 흠뻑 빠져드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에벌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은 ‘하나님의 현존 속에서의 사유’라고 했습니다.(스티브 하퍼/정명성 옮김 「매일 기도서」 KMC)
이렇게 ‘독서’를 통해 받고 ‘묵상’을 통해 깊이 생각한 말씀들을 ‘관찰(tem-plari)’ 즉 ‘관상(Contemplation)’함으로써 ‘기록된 말씀’은 우리 안에서 ‘살아있는 말씀’이 되고, 이러한 영적 노력을 통해 우리들은 비로소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침마다 자신의 귀를 열어 깨우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룬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고백을 보십시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 사 50:8
이사야는 늘 이렇게 자신과 가까이 계신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오실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보십시오.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 눅 23: 32, 33
예수님 수난 이야기의 절정은 예수님께서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서, 무법자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두 강도가 함께 못 박혔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에게 모욕을 주려는 목적으로 무법자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 사실은 이미 오래 전 이사야에 의해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사 53:12a은 이렇습니다.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슬라브 문화권의 교부들이 쓴 ‘오홀리드 프롤로그’,에 여러 세기 전 이사야 선지자가 미리 내다보고 예언한 경이로운 희생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어린양이 마치 초장을 향해 가는 것처럼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저항이나 두려움이나 원망도 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 사람들아 이러지 말게” 라거나 “왜 네게 이러느냐?”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시관을 쓰신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릴 때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으며, 사람들이 당신 얼굴에 침을 뱉을 때도 침묵하셨고, 십자가가 무거워 넘어지실 대도 참으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가혹한 아픔을 겪으실 때도 사람들이 아닌 아버지께 호소하셨습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도 그분께서는 땅을 내려보지 않고 하늘을 쳐다보셨습니다. 그분 능력의 원천은 땅이 아니라 하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 위로의 원천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진정한 본향은 지상 나라가 아니라 천상왕국이었기 때문입니다.(니콜라이 벨리미로비치/박효섭 옮김 「오홀리드 프롤로그 상上」 카리스마타 코이노니아 449쪽)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의도적인 모욕을 받아들이심으로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당신 안에서 성취되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저들의 야만적인 폭력과 모욕이 자행되던 그 처참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도 정확하게 이사야의 예언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 눅 23:34
이 기도는 누구를 위한 기도일까요? 당신을 판 유다와 도망가 버린 제자들이었을까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던 사람들일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b). ‘많은 사람의 죄’ 바로 우리 모두의 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심으로써 우리의 병든 영혼을 치유하셨으며, 우리와 같아지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인간의 상태를 태초의 모습대로 회복시키십니다. 그래서 오늘 서신서에서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빌 2:9-11
주님은 죽음에 이르도록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최선이었고, 그의 낮춤은 하나님의 높임을 거쳐 우리의 영원한 파스카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수난과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능욕당하고 버림받았습니다. 십자가는 고독의 끝자락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소외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아버지께서 가까이 계신 자리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폭력과 미움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능합니다. 작은 모욕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영적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과 함께 길을 가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내 가까이 계심을 알고 그 하나님께 영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려면 이사야 선지자처럼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이 ‘알아들음’이 이사야로 하여금 모진 수치와 모욕을 개의치 않고 ‘고난 받는 종’의 길을 가게 했던 것처럼, 이 ‘알아들음’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잔인한 폭력과 모욕을 개의치 않고 ‘수난당하는 어린 양’의 길을 가시게 한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깊이 읽고 묵상하고 관상할 때, 그 ‘경청’과 ‘알아들음’으로 인해 주님을 따라 십자가에 참여하고, 주님과 함께 부활의 아침을 맞을 것입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Exercitatio
① 말씀에의 경청이 없어 무기력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② 말씀과 기도로 이어지는 수련을 통해 세상을 이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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