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사순절 제5주 유다의 욕망과 마리아의 헌신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사 43:16-21
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17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응송 | 시 12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서신 | 빌 3:4b-14
4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 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복음 | 요 12:1-8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12:3-7을 묵상하십시오. 가룟 유다의 말에 담긴 의미와 마리아의 모습에서 비교되는 것은 무엇인가?
② 사 43:18, 19을 묵상하십시오.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라는 말씀을 보며 기대하게 되는 세상은 어떤 것인가?
③ 빌 3:7-9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이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았을 때, 그는 어떠한 실천을 보이는가?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유다의 욕망과 마리아의 헌신
사순 시기가 깊어가고 성(聖)과 속(俗)의 갈등이 우리 내면에서 점점 더 치열해짐을 느낄수록 저만치 다가오는 부활에 더 간절하게 시선을 두게 되는 요즘입니다. 지난 주간 우리는 제주 4.3 희생자 77주년 추념일을 지났고, 그 다음 날 4월4일에는 현직 대통령의 파면이 헌법재판소에서 선고되는 장면을 생방송으로 지켜보았습니다. 77년이라는 제법 긴 시간의 차이가 있음에도 제주 4·3은 지나간 역사가 아니고, 현재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오늘의 사건일 수 있음을 우리 국민들은 지난 122일 동안 절감했었습니다. 77년 전 해방 직후 이념과 분단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통령 이승만은 자신에게 비판적인 국민들을 제거하기 위해 1948년 11월 제주에 계엄을 선포했습니다. 그 계엄은 채 두 달을 가지 않았지만, 계엄이 만든 공포는 제주민들의 삶에 박혀 계속되었습니다. 제주에서 태어나 지금껏 제주에서 살고 있는 김수열 시인은 최근에 펴낸 시집의 표제작 ‘날혼’ 에서 ‘험악한 사삼 시절 / 동광리에서 죽어간’ 사람들과, ‘무등이왓 속칭 학살터에서 / 어처구니없이 솎아져 총 맞아 죽은 이들’의 비극을 소환했습니다. 그에게 4·3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상처이고, 그 여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통제되지 않은 개인의 욕망을 위해 제주도민의 10분의 1을 죽인 국가폭력이 2025년 12월3일에 재발될 뻔한 것입니다. 사람 안에 똬리 튼 이 ‘욕망(慾望)’을 헨리 나우웬은 ‘영원한 계절’에서, ‘현대 사회의 저변에 깊숙이 흐르는 상실감을 설명해주는 가장 적절한 단어’라고 했습니다.(마이클 포드/최규택 옮김 「영원한 계절」그루터기하우스 108쪽).그에 따르면 사람들이 세상에서 자기만족의 열쇠로 여겨 의지하는 ‘부와 권력의 축적’, ‘지위와 명예의 획득’, ‘색욕과 사랑의 구분 없는 성적 만족’ 등을 향한 탐닉은 우리로 하여금 끝이 없는 망상들과 부질없는 욕망에 집착하게 하지만, 그러나 그 탐닉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의 갈망을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결핍으로 인해 사람들은 저마다의 태도를 정하게 됩니다. 더 큰 욕망을 찾아서 탐닉하던지, 아니면 부질없는 욕망을 떨쳐버리고,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추구를 향해 나아가던지 입니다. 지난 주 복음서에 등장했던 둘째아들은 후자였습니다. 탐닉은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을 떠나 먼 나라에서 ‘부질없는 욕망’에 집착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심각한 소외와 배고픔에 처해지면서 그는 가장 근원적이며 본질적인 만족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망상으로부터 돌아설 수 있었고, 아버지께 돌아가 ‘화목’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사순절은 이렇게 ‘우리 내면의 욕망’과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추구’가 가장 첨예하게 충돌하는 시기인데, 사순절 제5주인 오늘 복음서 역시 이 두 가치관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하는 현장을 보여줍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 요 12:1-2
예수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 즉 수난주간이 시작되기 전,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의 집에 예수님께서 방문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이 때를 ‘유월절 엿새 전’이라고 말함으로써 오늘 복음서의 이야기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그리고 수난과 죽음 사건의 서막임을 암시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요한은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인물로 두 사람을 언급합니다. 한 사람은 마리아이고, 한 사람은 유다입니다.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라는 상황설정으로 보아 이 자리는 죽은 오빠를 살려주신 주님을 초대해서 감사를 표현하는 자리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마르다는 음식 장만에 여념이 없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에 앉아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장면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평범하게 볼 수 있는 잔칫집 풍경입니다. 그런데 돌연 이 평범한 풍경을 깨는 사건 하나가 발생합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 요 12:3
원래 이스라엘은 광야 성 기후이기 때문에 외출했다 돌아오면 반드시 먼지 묻은 발을 씻어야 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서 종으로서의 자세를 보여주신바 있습니다. 하지만 종도 아닌 여염집 여자인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닦았다는 사실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예외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마리아의 행동을 놓고 두 개의 가치관이 충돌하는 것을 봅니다.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 요 12:4-5
유다의 말에 따르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향유의 가격은 ‘삼백 데나리온’입니다. 삼백 데나리온은 당시 군인이나 일반 노동자의 1년 연봉입니다. 예수님 시대 나드 기름은 전량 동방에서 들여왔고, 좋은 향기와 함께 피부병 치료에 탁월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서는 아주 귀했습니다. 결코 함부로 쏟아 부을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다의 주장은 왜 그 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돕는데 사용하지 않고 예수의 발에 허비하느냐는 것입니다. 유다의 이 말은 오늘날 우리가 듣기에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신학자들은 유다의 이 주장에 ‘도유사화(桃乳蛇話)’라는 딱지를 덧붙였습니다. ‘도유사화’란 말은 조선 중종 때 있었던, 왕에게 한 거짓말에서 유래했는데,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속은 거짓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다의 주장이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러나 그 속에는 거짓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 역시 유다의 주장 속에 담긴 음흉한 속내를 여지없이 밝힙니다.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 요 12:6
요한의 말은, 유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명분으로 삼고는 있지만 그러나 그는 본래 돈에 환장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껏 예수님 일행의 돈을 훔쳐간 도둑으로서 삼백 데나리온을 훔칠 기회가 사라진 것에 대해 그저 분통을 터뜨리고 있을 뿐이라는 요한의 분석입니다. 결국 그는 그 ‘부질없는 열망’을 어찌하지 못해 급기야는 스승 예수를 팔아버리기에 이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리아의 태도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요? 그녀는 단지 예수님을 사랑해서 그의 발에 지극히 비싼 향유를 낭비해버린 것일까요? 아니면 오라버니 나사로를 살려준 것이 고마워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음으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한 것일까요? 아니면 베다니에 사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죄를 지은 여자’(눅 7:37)로서, 자신을 받아준 예수님께 대한 고마움의 표현일까요? 그런데 주님은 마리아의 이 행동에서 단지 사랑하는 마음이나 고마움과는 비교될 수 없는 그녀의 헌신의 가장 거룩한 동기를 발굴해 내십니다.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 요 12:7
주님의 이 말씀에 따르면, 마리아는 주님의 장례를 위해 향유를 간직해 왔으며, 이제 마침내 때가 되어 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입니다. 즉 마리아의 행동은 ‘제의적 행위’였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실제로 마리아의 이 헌신이 있고 나서 예수님의 구원행위가 궤도에 오릅니다. 요한복음 13장부터 21장까지는 일명 ‘영광의 책’으로 불립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부분, 즉 ‘고난, 죽음, 부활, 보혜사 성령’의 사건이 13장-21장에 집약되어 있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구원의 사건이 완성되며, 이로서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마리아의 헌신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여는 ‘서막’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유다가 보인 ‘부질없는 탐닉’과 비교되는 마리아의 ‘아름다운 헌신’ 여러분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으십니까? 더욱이 지금 이곳은 ‘베다니’입니다. 베다니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관련해서 매우 상징적인 곳입니다. 먼저 이곳은 예수님께 적대적인 고장입니다. 오늘 말씀 직전의 상황을 전하는 요 11:50-53절에 따르면 이곳의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이 의회를 소집해 본격적으로 예수를 죽일 계획을 모의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살해할 계획을 모의한 장소인 이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제의적 행위를 보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또 이 베다니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곳입니다. 베다니는 예수님의 죽음이 준비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부활을 암시한 장소인 것입니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 가슴에 다가오는 울림의 깊이가 다릅니다.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 요 12:7 표준 새 번역
여기서 마리아의 지향이 돋보입니다. 그녀는 주님의 죽음으로 완성되어 가는 하나님 나라를 보며 그 나라를 위해 자기의 소중한 것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요청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마음과 시선입니다.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 사 43:18
여기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기억하지 말라는 과거는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셨던 그 과거입니다(사 43:16, 17).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 가슴 벅찬 역사를 기억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이어지는 말씀에 해답이 있습니다.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 사 43:19-23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새 일을 행하시는 미래의 하나님이십니다. 과거에 홍해를 갈라 조상들을 구원하신 사건도 매우 귀하고 중요한 사건이지만, 하나님께서 장차 이루어 가실 새 구원역사는 더 귀하고 중요한 역사입니다. 그 ‘새 구원역사’가 무엇입니까? 포로로 끌려온 유다 백성들에게 절망의 상징인 바벨론과 조국 사이에 가로 놓인 광야와 사막을 희망의 상징으로 바꾸어 놓겠다는 것입니다.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하나님께서는 이 이상(異象)을 이사야 한 사람에게만 보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겔 47:1-12절에서 에스겔 선지자에게도 보다 명료한 이상을 보여주신바 있습니다. 성전(聖殿) 문지방 밑에서 솟아난 물줄기가 제단 동쪽으로 흐르다가, 제단을 한 바퀴 돈 다음에 다시 성전 제단의 남쪽으로 흐르기 시작해서 넓고 메마른 아라바 사막을 적셔 나가는데, 그 물이 발목까지 불어나더니(겔 47:3), 무릎까지 불어나더니(겔 47:4a), 허리까지 불어나더니(겔 47:4b), 마침내 사람이 건너지 못할 강물이 되어 사해로 흘러들어 죽은 바다를 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물줄기가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고(겔 47:9), 고기떼가 되살아나고(겔 47:10), 과실나무가 자라나는(겔 47:12) 이상(異象)입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생명의 이상을 믿고 그 이상에 내 희망과 삶을 두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가졌던 신앙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오빠가 살아난 것보다 더 큰 사건이 주님의 죽음 너머에 준비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마리아는 똑같은 사건 속에서 하나님께서 열어 가시는 ‘생명’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미 그 ‘생명’에 자신을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향유를 부어 주님의 장사를 준비합니다. 바로 그 신앙을 주님은 기뻐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마리아를 칭찬하신 것은 향유를 부어드린 행동 자체가 아닙니다. 마리아의 믿음입니다. 설사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는 유다의 휴머니즘이 진심이었다 하더라도 생명을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헌신하는 마리아의 마음보다 더 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극단의 상황에서 마리아는 생명을 보았고, 생명의 주님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생명을 노래한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일입니다. 오늘 서신서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봅니다. 어느 날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어왔을 때, 그는 자기 존재에 대한 새로운 성찰에 직면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 빌 3:7-9
바울의 이 고백이 우리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대개 우리는 그 반대입니다. 바울이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린 것들을 우리는 오물통에서 다시 찾아 두릅니다. 헨리 나우웬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저변에 깊숙이 흐르는 상실감은 바로 이 ‘부질없는 추구’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어떻게 살기를 원합니까? 내 삶에서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그 소중한 것 때문에 내 향유를 깰 수 있는 사람, 주님은 우리에게서 그것을 기대하시지 않겠습니까? ‘침묵 속에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에서 영국의 트라피스트 수도자였던 리스의 ‘성(聖) 에일레드’가 이런 말을 합니다.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국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 침묵과 관상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을 일으켜 육신의 감각을 떠나야 하며, 순명의 빛나는 갑옷을 입어야 한다. 우리의 순명은 사심이 전혀 없는 순수한 사랑에서 우러나야 하며,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는 것이어야 한다. (토마스 머튼/오무수 옮김 「침묵 속에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 분도출판사. 19쪽)
사순절이 깊어 어느덧 부활의 고동소리가 지면 전체를 채워가고 있는 지금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어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전부인 향유를 부어드린 마리아처럼 지금까지 유익하게 여기던 것들을 배설물과 ‘해(害)’로 여기고 오로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를 소망한 바울처럼, 우리가 살고 간 흔적의 곳곳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름다운 생명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지금 나의 소중한 것들을 헌신한 흔적들이 보석처럼 남아있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Exercitatio
① 부질없는 추구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② 아름다운 추구로 시간을 생명으로 채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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