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사순절 제3주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사 55:1-9
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 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 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 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 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4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 로 삼았나니 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 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 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 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 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응송 | 시 63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서신 | 고전 10:1-13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 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 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 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복음 | 눅 13:1-9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 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 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사 55:2-3을 묵상하십시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② 고전 10:12을 묵상하십시오. 다 함께 신령한 음식을 먹고 음료를 마 시고도 멸망한 사람들을 예로서 바울이 경고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③ 눅 13:4, 5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은 실로암 망대의 사건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십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신비현상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에 따르면, 하나님의 성스러움과 만날 때, 사람들은 역설적인 ‘양가감정(Ambivalence)’을 체험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는 ‘누멘적인 것(Numinous, Das Numinose)’이라는 개념으로 이 양가감정을 설명하는데, 하나님의 성스러움이 사람들에게 감성적 영역에서는 위압적이고 압도적인 두려움(Tremendum) 혹은 경외감에 휩싸이게 하는가 하면, 말씀과 시로 만나는 이성적(理性的) 영역에서는 매료하며 매혹하는 어떤 것으로서의 친밀함을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루돌프 오토/길희성옮김 「성스러움의 의미」 분도출판사 41-96쪽)이 두 감정이 바로 영성 형성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과 경외감은 사람들에게 거룩한 긴장감을 갖도록 하고, 매혹적이며 친밀한 느낌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과 더욱 가까이 동행하게 만들어줍니다. 우리 그리스도도인들이 이 두 감정 즉 경외감과 친밀감을 균형 있게 경험하려면 기도와 말씀 묵상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을 통한 감성과 이성의 균형 혹은 조화가 우리 신앙을 신선하게 하고 깨어있게 하며 내적 뜨거움을 간직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성경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호소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 사 55:6
이사야 선지자의 이 호소를 듣는 청중은 동시대에 바벨론 포로생활을 견디고 있던 유다인들입니다. 그들은 기원전 587년을 전후로 여러 차례 나누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서 몇 십 년을 포로 신분으로 지낸 상태입니다. 그들은 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잘 믿으려고 애를 썼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민(選民)인 자신들을 특별하게 지켜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나라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과 다윗 궁이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성전과 궁 안에 있던 값진 집기들도 모두 강탈당했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은 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고, 나머지 백성들은 초토화된 유다 땅에 남아 치욕스럽게 지배당하는 삶을 감내했습니다. 그렇게 고통과 치욕을 감내하는 동안 그들의 신앙에도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한편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점점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무능력하던지 아니면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유다가 다시는 일어설 수 없다는 패배감으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일부에서는 여전히 여호와 신앙을 붙들고 있었지만 대다수 백성은 포기하거나 냉소적 태도로 바뀌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당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인들 중에는 바벨론의 정치 경제 문화와 종교에 동화된 이들도 있었습니다. 바벨론 문명이 자신들의 문명보다 훨씬 세련돼 보이고 능력도 있어 보였습니다. 당시의 바벨로니아는 고대 근동의 패권을 쥐고 있던 제국이었습니다. 페르시아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천하무적이었습니다. 그런 나라의 학문이나 정치 경제 문화와 종교는 식민지 백성들의 마음을 점점 매료 시켰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유다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찾거나 부를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신앙이 없어도 바벨론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대, 같은 상황을 견디면서 이사야 선지자는 생각이 많이 달랐습니다. 그는 지금이야 말로 여호와를 만날 때이고, 여호와가 가까이 계실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외칩니다.야훼를 찾아라. 만나주실 때가 되었다. 그를 불러라, 옆에 와 계신다. | 사 55:6 공동번역
이사야 선지자는 무엇을 근거로 동족들에게 “여호와를 찾으라”고, “그를 부르라”고, “그가 옆에 와 계신다”고 단언하는 걸까요? 새롭게 부상한 신흥 제국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패망시키고 유다가 다시 독립국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당시 선지자들은 국내외 정세를 주목했습니다. 그들은 정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국제 정세를 꿰뚫어 안다고 해서 모두가 이사야처럼 말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지금 이사야 선지자는 단지 국제정세만 보고 여호와를 찾으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는 더 근본적인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우선 이사야 선지자가 볼 때, 유다인들의 영혼이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혼을 풍요롭게 하지 못하는 헛된 것에 온통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헛것은 우리의 영혼을 파괴합니다. 헛것은 아무리 소유해도 만족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힐 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볼 때 이미 유다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완전히 외면하고 바벨론 문명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삶이 바로 헛된 일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들에게 묻습니다.어찌하여 너희는 양식을 얻지도 못하면서 돈을 지불하며, 배부르게 하여 주지도 못하는데, 그것 때문에 수고하느냐 | 사 55:2 표준 새 번역
앞에서 이사야는 바벨론 문화에 미혹되어 타고 남은 재로 배를 채우기 위해(사 44:20) 허탄한 마음으로 은과 금을 달아 도금장이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神)을 만들게 하고, 그 우상에게 엎드려 숭배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한바 있습니다(사 46:6). ‘은금을 저울에 달아 주는 것’과 ‘수고’는 당시의 물품 대금 지불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먹지도 못하는 양식을 사기 위해서 그렇게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분별력 결여와(44:19), 정신적 미혹됨과(44:20), 허망한 노력(44:12)에 대해 지금 이사야 선지자는 격노하는 것입니다. 바벨론 문명이 아무리 화려해도 그들에게 참된 양식이 되어줄 수 없었고, 따라서 참된 배부름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그 속에 함몰되어 버렸습니다. 거기에 길들여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여호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더 이상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한 번 물질에 길들여지거나 문명이 주는 편안함을 맛보고 나면 어느 시기가 지나면서부터 그것의 옳고 그름을 더 이상 분별하지 않게 됩니다. 영혼의 질식 상태에 놓이는 것이고, 영혼이 잠들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훗날 우리의 후손들은 지금의 대한민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바벨론 문화에 중독되어 있던 고대 유다인들과 매우 유사한 상태였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고대 유다인들은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지를 들으며 ‘저 사람 너무 극단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일리가 있는 것이, 나라가 망한 게 벌써 언제이고, 유다신앙 전통이 사라져버린 게 벌써 언제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들도 민족도 지켜주지 못했는데, 바벨론 문명은 유다전통보다 세련되고 합리적인데다, 군사력 또한 유다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강력했습니다. 누가 옳을까요? 바벨론 문명이 헛되다는 이사야 선지자일까요? 바벨론 문명에 적응해 살아간 유다인들일까요?우리가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결단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지난 구약의 역사가 그랬고, 신약의 역사도 그랬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의 길을 따른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도바울 시대에 사도 바울의 길을 따라 함께 길을 걸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많은 신앙인들이 양식 아닌 것을 위해 돈을 쓰고,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해 수고하고 있습니다(사 55:2). 오늘 우리는 어떤 신앙인일까요? 선지자와 사도들이 걸어간 길 위에 결기 있게 서 있는 ‘남은 자’일까요? 아니면 시대 흐름에 적당히 편승해서 출세를 꿈꾸는 세속적 종교인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기가 어려운 이유는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구약의 말씀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사 55:7, 8
왜 하나님은 사람들을 향해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도 너희의 길과 다르다“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 사 55:9
평생 동안 신앙생활을 해오면서도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고 깊은 그리스도교 영성을 맛보지 못한 채 허망한 꿈에 매여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들을 때뿐이고 자기 생각대로 밀고 나갑니다. 이제 우리는 그 허망한 사슬을 끊고 내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생각을 마음에 담고 따라가야 합니다. 사순절은 그 훈련을 하는 계절입니다. 시리아인 성 에프렘은 이렇게 사순절의 기도를 드렸습니다.우리 생명의 주이시며 스승이시여,
나태한 마음과 실망, 권력의 욕망과 헛된 말을
나에게 주지 마소서.
그리고 주의 종에게 정결과 겸손과
인내와 사랑의 마음을 주소서.
주님이시며 임금이시여,
나로 하여금 내 잘못을 알게 하시고,
내 형제를 판단치 않게 하소서.
주는 영원히 영광을 받으시나이다.
(알렉산더 슈메만/박노양 「대 사순절」 정교회출판사 61쪽)
교회는 전통적으로 사순절이 되면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각 기도의 마지막에 이 기도문을 두 번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이시여, 죄인인 나를 깨끗하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고 마쳤습니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내 생명의 주이시며 스승이신 하나님 앞에서 나태함과 욕망들을 이기고, 정결과 겸손과 인내와 사랑의 마음을 회복했습니다. 지금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인들의 마음을 두들겨 그들이 망각했던 신앙 전통을 회복할 뿐 아니라 바벨론에 길들여지지 않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벨론 문명에 길들여지지 않는 노력은 쉽지도 않을 뿐 아니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시대정신으로부터의 이탈이었고, 사회안전망을 포기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유다인들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일은 잃어버린 영적 전통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가치를 깨닫고 나면 바벨론문명이 제아무리 화려하고 매력 있어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건 시간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여호와를 찾으라”고, “그를 부르라”고 외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바벨론 포로 시절의 유다인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혀 새로운 상황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의 당부는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찾아야 하고, 여호와를 불러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그것이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 사 55:3
‘영혼이 산다’는 말은 이 세상의 수고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원천적 자유의 세계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세계입니다. 실제 이사야의 예언은 5백년이나 세월이 흐른 뒤에 그들의 기대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구원은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사람의 것과 다르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의 고향은 후미진 나사렛입니다. 예수의 아버지는 평범한 목수였습니다. 예수는 3년 가까이 유랑생활을 하다가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처형당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라고 외쳤고, 예수님은 저항 한 번 하시지 않고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예수를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히 사람의 생각과 방법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 방법으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 고전 10:1-5
이 말씀은 우리에게 신앙의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다 같이 출애굽에 성공했습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었습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다수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못한 채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경고합니다.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 고전 10:12
오늘 복음서에서 주님은,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찾아왔을 때(눅 13:1),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 눅 13:3
오늘 말씀 바로 앞 장에서 주님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눅 12:49) 라든지,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눅 12:56) 라는 경고의 말씀으로 당시 사람들이 영적나태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이런 경고의 말씀이 들려올 때, 대개 사람들이 자신과는 무관한 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적 나태에 빠진 사람들을 향해 영적 긴박감을 회복해서 심판에 대비할 것을 촉구하시던 ‘그 때 마침’(눅 13:1) 무리에 섞여 그 경고의 말씀을 듣던 두어 사람이 마치 남의 일처럼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 제물에 섞었습니다. | 눅 13:1 표준 새 번역
어쩌면 이 사람은 죽은 사람이, 예루살렘 사람이 아닌 갈릴리 사람들임을 말함으로서 예루살렘 사람으로서의 우월감을 나타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역사학자인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이 일은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가뜩이나 문화적 우월감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피식민지 백성인 유대인들을 학살한 일은 수없이 많았는데, 그 중에 가장 빈번하게 큰 희생을 당한 사람들은 유대혁명의 중심에 섰던 갈릴리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오늘 두어 사람이 예수님께 한 말은 이런 뜻으로 읽혀집니다. “당신은 자꾸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경고를 하는데, 정작 심판은 갈릴리사람들이 당하지 않았습니까?” 회개라든지 심판이라든지 말하려면 갈릴리사람들에게나 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이랬습니다.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 눅 13:2-3
주님의 이 말씀은 듣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그들’의 문제로 이야기했을 뿐인데, 주님은 ‘나’의 문제로 대답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당한 것이라고 말 한 것인데, 주님은 ‘너’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똑같이 망한다고 대답하신 겁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불편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현대인을 가리켜 ‘고장 난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장 난 인간의 특색으로는 결속감정이 없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능력에 결속된 존재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을 여전히 낯설어하고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어리석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13세기 아프가니스탄의 시인인 루미는 도로테 죌레의 이 말을 다른 방법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담가놓으신 포도주가 넘치는데, 우리는 잔이 없다는 핑계로 마시지 못한다”는 겁니다. 믿음이 고장 난 존재로 살면 안 되겠습니다. 상투적인 신앙생활을 이제 멈춰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성스러움 앞에 결연하게 서서, 감성적으로는 경외감 가득 주님을 느끼고, 말씀과 시로 만나는 이성적 영역에서는 매료되고 친밀함을 느끼며 거룩한 긴장감 가득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려면 기도와 말씀 묵상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을 통한 감성과 이성의 균형 혹은 조화가 우리 신앙을 신선하게 하고 깨어있게 하며 내적 뜨거움을 간직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혼의 촉수가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는 가운데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생명이 나날이 영혼을 채워가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Exercitatio
① 내 생각에 갇혀 실상은 넘어진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② 내 길보다 높으신 하나님의 길을 찾고 순종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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